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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Nov 12. 2021

추억 속 사진을 감상하세요.
by 12년 전 오늘

구름 속에 있던 그 시절 내 이야기들

 연이틀 가을비가 내려서일까. 창틈으로 떨어진 햇살이 침대 시트를 그을릴 것처럼 이글이글거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가 지났다. 전엔 해 뜰 때쯤 잠들어도 여덟 시엔 눈을 떴는데 요즘은 서너 시까지만 늑장을 부려도 연이틀 늦잠을 잔다.

 한 손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남은 손으로는 습관처럼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세 개의 알림이 첫 화면에 떠 있었다. 둘은 일상적인 메시지였다. 며칠 전에 산 스웨터의 배송이 시작됐고, 지난번 구매로 980원의 포인트가 적립됐다는 것. 남은 하나가 흥미로웠다.


11월 10일

2009.11.8~2009.11.14에 촬영한 2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12년 전, 추억 속의 사진을 감상하세요.

by 12년 전 오늘 [MYBOX]


 우연이든 필요에 의해서든 한동안 쓰지 않던 클라우드 서비스에 접속했을 때 겪게 되는 일이다. 십 이년 전이라. 그때 내가 몇 살이었더라. 회사는 다닐 때였나. 누굴 만나던 시절이었지. 괜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메시지를 클릭하니 모니터에 청설모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뒤이어 반쯤 가린 밤하늘이 나오더니 슬라이드 쇼가 끝났다. 달랑 두 장뿐이었지만 사진들을 보자마자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곳이 어디였고 누구와 함께였는지, 심지어 찍은 카메라의 기종까지. 그뿐 아니다. 아무리 살살 걸어도 숨길 수 없었던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그날 입었던 퀼팅 점퍼의 쫀쫀한 시보리 감촉, 무릎을 베고 누워 맡았던 사랑했던 이의 숨 냄새 같은 것들도 함께 엮여 올라왔다. 일제히 기억의 관을 타고 흘러 각각의 감각 기관들을 자극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종종 소름 끼칠 만큼 선명하고 광범위할 때가 있다. 덕분에 잠은 확 깼다.

 십 이년 전 가을 풍경을 보니 문득 오늘은 계절이 얼마나 물들었나 싶어 베란다로 왔다. 여기서 보는 풍경도 십이 년 전 남이섬 못지않다. 길바닥은 비바람에 떨어진 누런 부스러기들이 눌어붙어 맨질맨질 윤이 나고 저 멀리 북한산엔 덜 붉거나 더 붉은 점들이 곧 흘러내릴 것 마냥 흩뿌려졌다. 그 위로 이름 그대로의 공색 펴 바른 하늘. 거기 몽글몽글 각양의 순백 뭉치들이 매달려 있다. 그래, 해마다 며칠씩 늦고 빠르대도 십일월 둘째 주가 가을의 절정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습관처럼 손에 쥐고 있던 아이폰으로 가로 몇 장, 세로 몇 장 사진을 찍어 놓는다. 그리고 몇 줄 생각난 것들을 메모해 두려는데 홈 화면의 위젯에 떠 있는 사진에 눈이 간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아침 바다 사진. 요즘 쓰는 클라우드 서비스가 멋대로 붙인 제목이 일 년 전 오늘 내가 여수에 있었다는 건 일러준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나는 자꾸 입에 침이 고인다. 쓰읍.


“요때 여수 왔스믄 삼치회 드시야죠잉.”

 형님뻘 쯤 되는 택시 기사는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신이 난 듯했고 나도 질세라 맞장구를 쳤다. 암요, 익히 들었답니다. 아따 지금 가고 있는 주소가 바로 거그랑께요오.

 문수동 어느 조용한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에 도착한 건 이제 막 해가 떨어진 여섯 시 즈음. 하지만 안은 이미 사람으로 북적였고 진동하는 술냄새에 입구서부터 코가 시큰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구석 자리를 겨우 차고앉으니 저 멀리 들릴 듯 말 듯한 소리. 곧바로 뒤따라 들어온 팀은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날만큼은 내가 여수 최고의 행운아가 틀림없었다.

 잠깐 고개 돌린 사이 한 상 가득 반찬들이 오르더니 곧이어 왜소한 체격의 남성이 제철 선어회 접시를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삼치 그리고 병어란다. 그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쌈장 만드는 방법과 첫 점에 어울리는 조합을 설명했다. 질깃해 보이는 김 한 장에 두툼하게 썬 고기 한 점, 갓김치와 초생강도 한쪽씩, 양파 조금 그리고 마늘은 쌈장에 찍어서. 이럴 땐 누구라도 한없이 고분고분해진다. 혹 하나라도 놓칠까 귀 쫑긋 세우고 따라 하게 된다. 그렇게 한 입 가득 싸 넣은 첫 점은 어찌나 폭신하던지 꼭 잘 삶은 육고기를 씹는 것 같았다. 식감을 누리고 난 후엔 제철 생선의 녹진한 기름기와 잘 익은 갓김치의 알싸함, 쌈장의 짭조름함, 양파의 달큰함이 차례로 혀 구석구석을 콕콕 찔렀다. 다만 그걸 다 느낄 새도 없이 입 안에서 곧 녹아내리는데 그게 얼마나 사람 감질나게 하던지. 금세 한 접시를 비우고 결국 다음 날 저녁에도 다시 찾아가게 만들었다.


 혹자는 클라우드 서비스가 인류의 지능 저하를 초래할 거란다. 기억할 필요가 없어지면 더 이상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과거의 기록 덕에 더 많은 것들을 추억할 수 있게 된 나는 아직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어차피 몇 줄 글과 비좁은 프레임은 도화선일 뿐, 머릿속 장면들은 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또 섬세하니까. 게다가 기억은 대체로 하기보단 되는 것 아니던가. 무엇보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아니었으면 지금이 삼치회의 계절이란 걸 깜빡 잊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생각 난 김에 여수부터 훌쩍 다녀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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