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가장 모스크바 다운 풍경들
해가 뜨지 않는 도시(?)
겨울의 모스크바, 어둠 속에서의 하루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겨울이면 단 하나 심각하게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태양’입니다. 겨울철 모스크바는 ‘밤의 도시’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하루 중 대부분이 ‘어둠’입니다. 제가 이 곳을 찾은 한겨울엔 오전 열시가 임박해서야 해가 뜨고, 오후 세시가 넘으면 이미 뉘엿뉘엿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니까요. 하루 24시간 중 단 여섯시간 정도만 해를 볼 수 있는 이 야박한 계절. 게다가 거의 매일 흐린 날씨 때문에 그마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안 그래도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는 어둠 속에서 더욱 꽁꽁 얼어붙고, 괜시리 날씨 탓으로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수 많은 ‘밤의 도시’들이 해가 진 후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었다면, 모스크바는 정말로 ‘밤이 너무 길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낮이 짧아서야 제대로 여행을 할 수 있을까요? 빼꼼히 고개 내밀었던 해가 금방 떨어져버리고 어둠이 온 땅을 채우면, 그 아름답다는 성 바실리 대성당이며 붉은 광장도 색을 잃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러시아 건축물도, 색다른 거리 풍경도 무슨 소용인가요?
이런 질문에 차마 ‘모스크바는 낮보다 밤이, 여름보다 겨울이 더 아름답습니다.’ 라는 대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이 긴긴 밤을 보내기 위한 러시아인들의 지혜들이 이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밤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동들이 분명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렘 때문에 일찍 깬건가'
첫 아침을 맞은 여행 둘째 날 아침, 호텔 창 밖의 풍경을 보고 든 생각이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30여시간 가까이를 깨 있다 겨우 든 숙면은 무척 상쾌했지만, 아직도 창 밖은 한밤중이었기 때문인데요, 시계를 보니 제 착각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침 아홉시가 넘은 시각에도 아직 모스크바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기억하는 이 날 일출 시간이 아홉시 오십분이었으니 그야말로 ‘늦잠꾸러기’입니다. 하지만 늦은 해 덕분에 거의 매일 모스크바의 해 뜨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그것만큼은 행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해가 늦게 뜨다보니 모스크바의 하루는 한국보다 늦게 시작되는 편입니다. 아침 열시가 되어야 외출할 정도로 밖이 밝아지기 때문에 열한시쯤 되어야 거리에 사람도 좀 늘어나고, 전철에도 출근 인파가 모여들더군요. 사실 해가 워낙 낮게 뜨는지라 열한시가 넘은 시각에도 종종 사진처럼 새벽녘이나 해질녘 같은 분위기가 나곤 합니다.
이런 겨울철 날씨 때문에 러시아는 이번 겨울부터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역에 ‘윈터 타임’을 부활시켜 시각을 한 시간 늦췄습니다. 따라서 한국과의 시차도 기존의 5시간에서 6시간으로 한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죠. 2011년 섬머타임 폐지로 서울 기준 다섯시간의 시차로 조정되었지만, 그에 따라 자국민의 건강 악화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되어 다시 한시간을 늦췄다고 하네요. 이제 한국과 모스크바의 시차는 6시간입니다.
워낙에 해가 짧아 오후 세시가 넘으면 당황스럽게도 ‘뉘엿 뉘엿’ 해 질 준비를 합니다.
말로만 듣던 이 짧은 하루를 실제로 겪어 보니 어쩐지 이 곳에서는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16시간쯤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게다가 겨울의 모스크바는 툭하면 눈이 오고, 그게 아니더라도 종일 흐린 날이 계속되기 일쑤라 그나마 몇 시간 안 되는 해도 구경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위 사진 속 장면이 오후 네시가 조금 넘은 오후니, 모스크바의 짧은 낮에 대한 야속함을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해가 짧고 날씨도 궂어 여행하기 참 힘든 겨울의 모스크바 날씨에는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겠습니다.
저는 밤의 도시 모스크바가 하루에 두 번 기지개를 켠다고 말하겠습니다.
아침 열시나 되어서야 잠에서 깬 이 도시는 늦잠 때문인지 종일 어딘가 찌뿌둥하고 우울해 보입니다. 잔뜩 흐린 하늘이 꼭 그렇게 보이지요. 그렇게 짧은 태양을 스쳐 지나 보내고 나는 오후 다섯시, 본격적인 밤이 시작되는 이 시각에 ‘밤의 도시’는 다시 한 번 크게 기지개를 켜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박차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죠. 제게는 이 도시의 겨울은 그렇게 보입니다. 짧은 태양 때문에 자칫 우리는 이 도시 사람들이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이상적인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은 긴긴 밤 때문에 늦은 밤까지 하루가 지속되는 것이죠.
실제로 이 곳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라이프 사이클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열시-열한시, 점심을 서너시에 먹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곧 죽어도 열 두시엔 점심을 먹어야 하는, 때 맞춰 배가 고파지는 우리와는 참 다르죠? 후에 안 이야기지만 나라별로 날씨와 기온에 따라 식사 시간부터 업무 시간까지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큰 차이가 있다고 하니 새삼 재미있습니다.
한국의 일곱시 풍경은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할까’라는 고민이 곳곳에 가득하죠, 일 초라도 빨리 집에 가서 지친 몸을 누이려는 사람들과 이대로 일만, 공부만 하다 보내면 하루가 너무 후회될 것 같아 무엇이든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거리며 지하철, 버스 등을 채우고 있습니다. 굳이 그 곳에 쭉 살지 않아도 누구든 느낄 수 있는 치열한 하루의 끝 풍경이죠.
하지만 모스크바의 저녁 일곱시 풍경은 전혀 다릅니다. 일찌감치 어둠이 내린 이 도시의 밤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마무리’라는 인상도, 하루가 끝나간다는 위기감 역시 줄 수 없습니다. 겨울이면 오히려 ‘밝음’보다 익숙한 이 ‘어두움’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있죠. 참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붉은 광장과 굼 백화점의 화려한 겨울 축제를 통해 러시아인들이 겨울을 즐기는 장면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 곳 사람들이 이 긴긴 겨울밤을 이겨내는 중요한 비결 중 하나로 바로 이 ‘축제’를 들 수 있습니다. 축제야말로 낮보다 밤이 더 즐거운 것이니까요, 게다가 모스크바의 한겨울엔 1월 7일 크리스마스가 있으니 이렇게 매일 거대한 축제가 벌어질 만도 합니다. 오후 일곱시쯤부터 모여든 사람들이 이 붉은 광장을 가득 채우면, 이대로 밤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올 때까지 계속 되는 ‘기춘제(?)’처럼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웃고, 행복해합니다. 무엇보다, 이 겨울 축제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열정은 대단해 보입니다. 이 추운 날씨,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들어 눈 젖은 빵과 차를 즐기는 것을 보면 말이죠.
이 붉은 광장의 겨울 축제는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스크바 겨울 풍경을 대표하는 풍경이자, 러시아인 관광객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니까요. 동화 속 배경 같은 이 광장을 느끼고 나면, 오히려 매일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리게 될 것도 같습니다.
마네쥐 광장의 환상적인 야경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붉은 광장에서 마네쥐 광장으로 이어지는 이 축제와 야경을 즐기다보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밤이 때로는 여섯시간짜리 낮보다 더 짧게 느껴지기도 하겠네요. 이 곳의 조명 장식물들을 보면, 이 긴긴 겨울밤이 모스크바인들에게 어떤 것을 주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해가 진 후의 이 새까만 캔버스에 색색의 조명으로 ‘그림’을 그리는 비결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스크바의 야경 솜씨는 ‘능수능란’합니다.
이런 겨울 축제는 시내 중심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동네에나 크고 작은 공원이 주택가와 골목 사이에 위치한 특성을 살려 곳곳에 겨울 축제가 벌어지는데요, 이 겨울의 도시를 걷다 보면 축제의 조명 행렬이 채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축제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쯤 되면 이 곳 사람들이 긴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 조명으로 밤을 밝히는지, 아니면 원래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 의문에 빠지게 되죠? 실제로 제가 방문한 러시아의 홀리데이 시즌에는 도시 전체가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 축제에 취해있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웠고, 짧은 해가 지는 것이 마냥 아쉽지 않았죠.
먹고 마시는 것만이 겨울 축제가 아니죠. 추운 날씨 덕분에 모스크바 곳곳에는 자연산(?) 스케이트 장이 겨울 내내 운영됩니다. 동네 작은 호수나 공원의 개울이 겨울이 되면 멋진 스케이트장 혹은 트랙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죠. 한국에선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나 즐길 수 있는 스케이트를 이 곳 사람들은 식사 후 공원 조깅하듯 즐기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 혹독한 겨울 날씨가 묘하게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밤이 긴 모스크바에서 오후 8시면 한창 저녁을 먹을 시간입니다. 많은 레스토랑에는 이제 막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연인 혹은 맘 맞는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즐기는 풍경을 손쉽게 볼 수 있죠. 때문에 대형 쇼핑몰이나 식당가가 가장 활발한 시간대도 이 때입니다. 긴 밤과 어둠에 대한 보상심리라도 있는 것처럼 모스크바의 대형 쇼핑몰들은 지나치게 밝은 실내 조명을 쏘아대며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밤풍경들을 만들고 있죠.
식당과 쇼핑몰들의 운영 종료 시간은 열시 내지 열한시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지만, 근무 시간이 대체로 짧은 유럽 도시들에 비하면 늦은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사람들이 머물 곳들이 일찍 문들을 닫아버리면 늦게 시작된 하루가 채 끝나지 않은 모스크비치들은 얼마나 방황하겠어요. 24시간 하는 식당과 카페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의 공통점 하나를 더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 의미로, “밤을 참 좋아한다”
밤이 더 깊어 조명마저 침묵하게 되는 시간이 되면 이 깊은 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느낌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유럽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이 도시 곳곳이 텅 빈 골목길을 내어주지요. 낮에 내린 눈이 녹으며 높아진 습도로 거리 소음은 더 심해집니다. 조금 춥긴 하지만 이 때가 가장 걷기 좋은 시각이었습니다. 이름부터 어딘가 스산하고 쓸쓸한 이 도시가 가장 ‘모스크바’다워지는 시간이랄까요.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에 가기 전 목적지 없이 생소한 길로 걷는 것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날씨가 춥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밤 새 걷고 싶을 정도로요.
걱정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건물과 거리 풍경들은 낮보다 밤에 더 아름다웠습니다. 가로등이며 조명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밤이 칠흑처럼 어둡거나 외롭지 않았거든요. 저에겐 오히려 여행 전 찾아본 많은 사진들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스크바의 이 밤 풍경들이 정말 소중했습니다.
도시 중심을 가르며 흐르는 모스크바 강 때문에 야경은 더욱 촉촉해지고, 땅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에는 저마다 매력적인 조명들이 달려있었죠. ‘백야 현상으로 해가 지지 않는 모스크바의 여름엔 이 멋진 야경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쉽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죠.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이 멋진 야경은 저처럼 마냥 걸으면서 맘 속 지도를 채워가는 것도 좋지만, 사진처럼 쇄빙선을 타고 한 번에 듬뿍 담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네요.
오후 네시부터 시작된 이 어둠이 이 곳 모스크바에서는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제 막 이 겨울밤 풍경이 익숙해지고 축제가 즐거워지기 시작하는데, 야속한 하루가 마무리 되었네요. 아마 오후 다섯시나 열한시나 새까만 것은 매한가지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긴긴밤에 열한시가 넘으면 두 번째 저녁 식사가 필요해지고, 어짜피 내일 아침에도 지금처럼 어두울거라는 생각으로 24시간 하는 카페를 찾아보곤 합니다. 한국에선 상상하지 못했던 이 긴 어둠이 의외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오히려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늦은 밤 아르바트의 한 골목길에서 해 봅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지겠지만, 이제는 걱정되지 않습니다. 모스크바의 밤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 알았으니까요.
‘어둠을 전제로 보낸’ 여행자의 하루는 매우 걱정스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흔히 여행지의 풍경, 여행 사진 하면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쨍쨍한 장면들을 떠올립니다, 저도 물론 어느 곳을 여행하든지 그런 ‘Best Scene’을 기대하게 되구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의 겨울은 0점입니다. 하루 여섯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낮 시간동안 원하는 곳을 몇 군데나 볼 수 있겠으며, 그마저도 날씨가 쉽게 허락해주지 않아 잔뜩 구름낀 하늘 아래 우중충한 풍경이 오히려 익숙하니까요. 때문에 대부분 겨울의 러시아 여행은 추천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겨울 밤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모스크바의 ‘그 무엇’이 분명 있습니다. 흐린 날씨에 하루를 모조리 어둠 속에서 보낸 후에 느낄 수 있었죠. 러시아의 건축물들은 마치 현대의 조명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처럼 야경에서 더 아름다워 보이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겨울이 아니면 이렇게나 행복할 수 없는 축제를 열며 지혜롭게 까만 밤을 채워갑니다. 그 방법들은 매우 적절했는지 사람들은 추위도 잊은 채 행복해하고, 저같은 여행객도 밤 늦게까지 이 도시를 걷고 즐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꼭 피해야 할 이 끝 없는 어둠이 저에겐 가장 모스크바다운 밤 풍경들로 남아, 다른 계절에 왔다면 느낄 수 없는 것들로 더욱 소중하게 남았습니다. 어느샌가 저는 이 말도 안되는 날씨에 매료되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