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강, 떠올려보면 항상 네가 있었지
파리 부럽지 않은 모스크바의 낭만
모스크바 강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부럽습니다, 세느강을 아직 가보지 못했으니까요, 하하. 거창한 도발로 시작한 오늘 이야기는 주요 관광지가 아닌 모스크바 시의 풍경, 그중에서도 모스크바 강에 대한 것입니다. 여행하는 동안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가 어딘가 서울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시내 중심부에 몰려있는 관광지 위치와 시내 중심가와 주변부의 심한 경제적 격차, 그리고 도시를 둘로 나누는 바로 이 '모스크바 강'의 존재입니다. 서울의 한강과 비슷하게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 모스크바에도 있으며, 그에 따라 강 남/북의 발달 상태와 겉으로 보이는 풍경도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서울과 반대로 모스크바에선 강 북쪽이 좀 더 번화가이며 중심지라는 것이 차이가 되겠지만요.
모스크바 중앙을 가로지르는 모스크바 강의 모습을 지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의 모습이며, 놓인 다리들의 존재가 꼭 서울의 모습 같지 않나요?
지도에 표시된 모스크바 주요 관광지가 주로 강 주변에 모여있는 것을 보니, 역시 인류 문화는 물가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세계사 수업 내용이 기억납니다. 제가 묵은 숙소 가 있었던 스몰렌스카야와 키에브스카야 역시 모스크바 강과 근접해 있는 곳이죠. 서울과 다른 것이 있다면 모스크바 시 전체로 보았을 때 모스크바 강은 남쪽에 치우쳐 흐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요 문화 유산이나 관광지는 북쪽에 보여있고요. 물론 2012년 영역 확장 전 모스크바 시는 지금보다 작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한 강 북쪽이 예전부터 정치, 경제적으로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겠네요. -서울은 강남, 모스크바는 강북-
모스크바 시를 관통하는 강이라 모스크바 어느 곳에서나 이 모스크바 강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의 삶과 매우 밀접해 있으며, 고대 유물이나 관광지뿐 아니라 현재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주요 중심지와 번화가, 쇼핑타운 역시 모스크바 강과 인접해 있습니다. 유럽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모스크바는 24시간 내내 시끄럽고 인파도 가득하지만 이 강만은 언제 가도 고요합니다. 강가에 즐비한 호텔 주변을 걷다가도 모스크바 강 옆 산책로나 다리 위에 서면 마치 복잡한 도시를 멀리 떠나 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어느 강이나 그렇겠지만 서울 못지 않게 시끄러운 도시라 그 대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 강의 풍경은 이 도시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계절별로 변화무쌍하게 얼굴을 바꾸며 모스크바의 외모를 상징하는 강 풍경은 많은 관광객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 곳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찾았던 한겨울엔 저렇게 이 곳 러시아의 강추위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죠.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공원인 고리키 공원에도 이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모스크바 강은 한강보다는 전체적으로 그 규모가 작아 다리를 통해 도보로도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간에 따라 강폭이 한강 못지 않게 넓은 곳도 있으니 혹시 저처럼 도보로 다리를 건널 계획이 있으시다면 미리 지도를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모스크바 강을 찾아오면 몰라보게 고요해지는 느낌과 도시 속 오아시스가 만드는 풍경들 때문에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모스크바 강을 도보로 건너 이동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다른 유명 관광지 못지 않게 이 다리를 걷다 보면 '아 내가 이 도시에 와 있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여행 마지막 날, 짐을 모두 정리하고 공항에 가기 전 조금 남은 시간에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모스크바 강 주변 산책이었습니다. 사진 속 풍경은 마지막 산책 중 스몰렌스카야 지역의 한 주택가 골목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강의 풍경입니다. 물이 생각보다 맑은지 낚싯대를 드리운 시민의 모습과 그 뒤로 유유히 지나는 유람선의 풍경이 이 복잡한 도시 속에서 이 강이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이 강 자체가 너무 좋아서, 잠시나마 이 도시의 한 조각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만끽하고자 이 강을 남에서 북으로, 또 다시 남으로 건너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강은 도시의 한 부분이며 다리는 목적지로 향하는 한 수단입니다. 추운 날씨에 많지 않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며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것은, 애석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죠. 그 아쉬운 삭막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어느 도시든 강 다리를 화려한 외형으로 만들고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채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스크바 강의 풍경 역시 같습니다. 가끔 벌어지는 작은 이벤트가 있다면, 무심하게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문득 고개를 돌려 강 풍경을 바라본 후 잠시 멈춰 서서 사진 두어 장을 찍고 다시 가던 길을 가는, 그 정도였습니다. 이 날 이 강에서 이만큼 즐거운 사람은 아마 저 혼자뿐이었던 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강의 풍경은 꽤 멋있습니다. 다리 주변에 몰려 있는 멋진 러시아 건물들이 강과 멋진 조화를 보여주고 있고, 오래된 다리 자체도 유럽 도시를 상상할 때 보았던 그것들 못지 않게 고풍스러웠기 때문이죠.
많은 관광지를 다니면서 모스크바 강이 만드는 풍경 역시 다양한 장면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저에게 가장 멋지게 남았던 장면이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장소였는데요, 고리키 공원을 다녀와 종종걸음으로 강을 건너던 중 발견한 이 장면은 거대한 표트르 대제의 동상과 모스크바 강의 얼음을 깨며 달리는 유람선,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모스크비치의 모습이 '겨울의 모스크바이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눈에 보이는 저런 풍경이라면 추운 날씨쯤 하루 참고 연인과 손을 잡고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물론 봄, 여름에는 강가에 종일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더 좋겠군요.
이 표트르 대제의 동상은 모스크바 강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구조물입니다. 역사를 예술로 풀어낸 이 나라 사람들의 방식에 새삼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할 정도로 거대하고, 동시에 아름답죠. 다른 관광지처럼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만질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만 이 거대한 예술품은 이렇게 먼 발치에서 도시 풍경과 함께 감상하는 것이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에 짧은 시간 이 곳에 머무는 여행자들은 따로 눈여겨 볼 시간조차 내기 어렵겠지만, 종종 이 강이 주는 특별함은 모스크바 풍경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특히나 해 질 녘의 어스름한 하늘 아래, 이제 막 불을 밝힌 조명과 만드는 모스크바 강과 다리의 풍경은, 일부러 시간을 맞춰 이 곳을 찾게 할 정도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이 넓은 도시가 이 강 없이 단단한 땅으로만 되어 있다면 얼마나 척박한 느낌으로 가득했을까'라며 상상해봅니다. 해가 짧고 흐린 날씨가 계속되는 모스크바의 겨울에 한 가지 위로받게 되는 것이 있다면, 매우 아름다운 노을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노을에선 러시아의 어떤 멋진 건물보다, 명품 숍이 즐비한 중심가 거리보다 아슴푸레 '밤의 도시'를 맞는 이 강이 가장 멋진 씬 scene을 만들어줍니다.
서울의 한강이 밤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모스크바의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 역시 굳이 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찌감치 해가 저물어 '밤의 도시' 모스크바가 두 번째 기지개를 켜면, 다리와 건물의 조명을 받아 얼어붙은 강이 더 아름답게 흐릅니다. 경관을 해치는 것 같았던 강 위 얼음들이 겨울밤의 정취로 바뀌고, 유난히 빨갛고 노란 조명들 때문에 비현실처럼 보정된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 강의 밤은 이런 아름다운 야경을 놓치지 않고 잡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합니다. 꽁꽁 언 강 속을 지나는 유람선은 그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되겠네요. 특히나 이렇게 걷기조차 쉽지 않은 한겨울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밤의 붉은 광장을 향해 걷는 길에 발견한 저 야경에서 유람선이 빠졌다면 어쩐지 허전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유람선도 꼭 한 번 이용해 보고 싶었는데, 저녁 시간이 여의치가 않아 포기해야 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못내 아쉽습니다. 유난히 붉게 타는 붉은 광장의 야경에도 모스크바 강은 빠지지 않습니다.
제가 여행했던 도시들엔 공교롭게도 도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오사카의 도톤보리 운하가 그랬고 이번 모스크바 강이 그랬습니다. 게다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 한강이 있는 서울이니 강이 없는 도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네요. 모스크바에서의 이 강의 의미 역시 여느 도시의 그것보다 작지 않습니다. 강 주위로 발전한 문화, 예술의 흔적들을 통해, 그리고 현재 모스크비치의 삶과 이 강의 거리를 짐작해보며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은 종종 목적지로 가는 길의 방해물이 되기도 하지만 특유의 단절성 때문에 도시 사람에겐, 각박한 삶과 잠시나마 스스로를 격리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되고, 여행자에게는 이 도시의 모습을 머리와 가슴에 각인시키는 진한 잉크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귀국 전 마지막 산책 장소를 이 모스크바 강으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찍은 제 마지막 사진 속, 모스크바 강을 걷는 저 남성의 뒷모습이 왠지 이번 여행을 정리하는 제 모습 같아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 바로 이 모스크바 강이었다는 것은 저에게 정말 의미 있고 기쁜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