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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01. 2015

17장. 모스크바를 걷다

러시아의 영혼이 살아 있는 거리, 푸쉬킨스카야

이 곳만의 거리 풍경이 좋아서
종일 걸었던 날



오랫동안 계획해 온 여행에는 누구나 빈 틈 없는 완벽한 스케줄을 바라고 세우지만, 제 여행 중  하루쯤은 아무 계획 없이 혹은 갑자기 떠오르거나 지나치다 눈에 들어온 곳으로 무작정 떠나 보는 '자유 속의 자유' 여행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서울보다 모스크바의 풍경과 공기가 익숙해지던, 행인들을 보며 제 머리만 검다는 사실조차 잊혀 갈 때쯤 저에게 그 '소중한 하루'를 주었습니다. 외국 관광객을 위한 장소가 아닌, 현대 모스크바 사람들이 실제 숨 쉬는 곳을 꼭 가보고 싶었으며, 그래서 결정한 장소는 붉은 광장과 마네쥐 광장 건너편에 있는, 후에 저에게 '가장 모스크바다운 거리'로 기억된 푸쉬킨스카야(Pushkinskaya) 지역, 트베르스카야(Tverskaya) 거리였습니다.


오늘은 '미친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느끼지 못했을 모스크바의 '숨'과 종일 무작정 걸어본 날, 걸으며 알게 된 것 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하도를 통해 마네쥐 광장 앞의 대로를 건너 미뜨로 Okhotnyy Ryad 전철역 앞에 서면 붉은 광장이나 아르바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평범하지만 특별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거리의 이름은 트베르스카야(Tverskaya) 거리로 여행자들을 위한 대형 호텔과 레스토랑들이 몰려 있는 지역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곳의 시설들은 제가 원하던 '평범한 모스크바의 거리'와는 그 거리가 멀었습니다만, 러시아 전통 건축 양식이 적용된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고,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무언가 더 신비로운 것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실패를 감수하고 이 날 하루를 기꺼이 이 곳에 '흘려'보기로 결정합니다.


모스크바의 건물들은 같은 거리에 있지만 그 외형이나 색상이 정말 다채롭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통일성 없는 난잡한 도시 조경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성 강한 건축물들이 만드는 조화가 생각보다 너무 멋집니다. 다 '성, 성, 성' 같은 유럽의 유명한 도시 건물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이 곳만의 장면들이 아닐까요?



거리 곳곳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멋진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물론 저 건물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National Hotel이지만, 이 건물 외에도 거리 곳곳에 옛 러시아 풍경이나 여인의 초상화 등이 걸려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멋진 그림이 걸려있으니 마치 야외 전시를 다니는 기분마저 들더군요.



거리를 조금 따라 들어가니 유명 브랜드의 매장과 고급 레스토랑 사이로 제가 원하던 모스크바의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매점(?)'은 공연 티켓을 파는 거리 판매소입니다. 시내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곳으로 공연 문화가 어느 나라보다 성숙하게 발달된 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이 거리 근처에는 러시아 최고의 공연장인 볼쇼이 극장이 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극장에서 많은 공연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공연 관람 계획이 없었던 여행이라 아쉽게도 티켓 종류와 가격 등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허름한 건물이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허름한 식당, 혹은 오래된 사무실 건물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사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엠게우(МГУ)의 단과대학 건물이라고 하네요. 모스크바의 대학교는 한국과 달리 단과대학이 모여 있는 대형 캠퍼스가 있는 형태가 아니라 이렇게 인접한 지역에 각 학부 건물이 각각 위치해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 쳐도 이 생뚱맞은 건물이 대학교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긴 꽤나 도심이라고요.-사실 쓰면서도 좀 헛갈립니다- 


이 거리 곳곳에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강의동(?)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찾은 건 저 건물 하나였습니다. 아, 물론 이 건물은 단과대학 건물로 엠게우는 모스크바 내에 초대형 캠퍼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대학교와 달리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는 세계 어느 대학교와 견줘도  손색없는 거대한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거리에 있는 모스크바 대학교의 크고 작은 건물들은 건물마다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학생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하네요 -면학분위기 조성!-


세계 최고 볼쇼이 극장도 이 거리에

모스크바 여행의 특징은 주요 관광지가 이렇게 촘촘히 모여 있어 핵심 포인트(?)만 짚는다면 속성으로 진도를 뺄(?)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인 볼쇼이 극장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 알았나요..? 마네쥐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볼쇼이 극장은 엄청난 규모와 러시아 전통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을 외관에 품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열리는 공연의 수준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극장 앞에 구름처럼 모여든 예술 도시의 풍경을 기대했습니다만, 주로 저녁에 공연이 열리기 때문인지 아직은 텅텅 비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이 볼쇼이인 줄도 몰랐다는 뒷얘기-



어딘가 친근한 느낌의 동춘 서커스식(?) 공연 포스터



초호화 백화점이라는 이 곳은 '쭘(ЦУМ)'


볼쇼이 극장 옆에는 또 하나의 대형 백화점인 '쭘'이 있습니다. 어딘가 '굼'의 짭(?) 같기도 하지만 모스크바에선 부유층을 위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모인 고급 백화점이라고 하네요. 규모는 굼 백화점보다 작지만 그 설명을 듣고 나서 인지 어딘지 건물도 좀 더 귀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걷기 바빠 내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백화점 앞에 늘어선 호화 외제차 -아니, 여긴 외국이니까 외제차가 아닌가- 를 보며 호화 백화점의 정취를 겉으로나마 느껴봅니다. 볼쇼이-쭘으로 이어지는 이 고급 진(?) 라인을 거니는 옛 러시아 귀족들의 모습이 왠지 상상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쭘 백화점 뒤편의 작은 광장에는 이렇게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렸습니다. 정말 빈 틈 없이 놀자판(?)을 잘 깔아놓은 성실한 모스크바식 시민의식입니다. 호화 백화점이라는 인식과 주요 관광지인 붉은 광장 인근에선 조금 떨어진 접근성 때문인지 이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쭘 주변 거리들은 명품 부띠끄들이 모여있는, 서울로 치면 '청담동' 같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 브랜드의 로드숍 등을 이 거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거리에 모피 입은 여유 있는 체중의 러시아 귀부인들이 많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요?


고급 브랜드들이 몰려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인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의 외국 관광객들의 쇼핑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고급 상점다운 외관 때문에 거리 풍경도  아름다웠습니다. 아마 러시아 여인들이 기분 내기 위해 찾는 거리가 아닐까 싶어요?!


여전히 함께인 푸쉬킨과 그녀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이 날의 유일한 목적지(?)였던 푸쉬킨의 동상입니다. 러시아인의 존경을 받는 대문호 푸쉬킨이 이 곳에서 부인 나탈리야에게 청혼을 했다고 하네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곳에는 이렇게 두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모스크바에만 여러 곳, 러시아 전역으로 치면 수 많은 푸쉬킨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렇게 도시 곳곳에 그를 기념하는 장소까지 있는 것을 보면 푸쉬킨이 정말 러시아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 맞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이 쌓여 그냥 지나치기 쉬운 조용한 풍경이지만, 나머지 계절에는 동상 앞에 작은 분수가 있어 시민들의 쉼터로도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그 풍경들


푸쉬킨의 동상과 볼쇼이 극장, 쭘 등 몇몇 '핫 플레이스'와 여행객을 위한 대형 호텔들이 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이 거리는 너무나도 평온하고 평범한 모스크바의 거리입니다. 오후 내내 이 곳을 걸으면서 받은 수 많은 시선들은 그 만큼 이 곳이 여행객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는 거겠죠. 때문에 거리는 인파 없이 너무나도 평온했고, 건물들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낡고 나이 들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꼭 이런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이 날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 거리 곳곳을 걸으며 시간이 조금만 늦게 지나가길, 아니면 오늘만큼은 해가 좀 늦게 지기를 바랬던 기억이 나네요.



부서진 택시 속 졸고 있는 기사님의 모습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스크바 곳곳에는 저런 높은 퀄리티의 그림이 곳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동심을 깨워 준 모스크바 속 작은 연못

너무 멀리 걸어왔다 싶었을 때쯤 발견한 이 연못의 이름은 Patriarch입니다. -사실 지금 지도 보고 알았습니다- 연못이라기엔 큰 규모로 모스크바의 혹독한 겨울에 이미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이 찰랑찰랑 차오른 연못 주위로 나무와 풀이 무성한 봄에 다시 오면 어떨까 생각했던 장소였습니다. 아마도 그 날엔 이 아이들의 표정이 어떨까, 지금 떠올리면 그게 더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Patriarch 연못 주변엔 모스크바 시민들이 이용하는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카페 등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모스크바를 찾으셔서 관광객이 아닌 진짜 모스크비치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이 곳에서 식사를 하고 이 연못 주변을 산책하다  차를 마시면 완벽하겠네요 :) 하나같이 이전까지 보아왔던 러시아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작은 규모의 가게들과 주민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풍경들을 보며, 이것이 관광지 모스크바가 아니라 진짜 사람 사는 모스크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크리스마스를 맞아 만든 양 장식, 너무 예뻤습니다 :)


한적한 거리 위 아주 작은(?) 축제

모스크바 곳곳이 그렇지만, 이 트레브스카야 지역에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공원이 이렇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이 풍경은 아마도 땅이 충분히 넓은 러시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느덧 해가 지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이 작은 공원에는 마치 숨겨진 축제장처럼, 이 곳을 수고스레 찾아오지 않는 이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주변 주민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열렸을 법한 크리스마스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정말, 관광객이 아닌 그들만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축제 풍경이야 여느 모스크바 관광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비슷한 모양의 노점과 제 눈에는 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만드는 풍경들이 이 곳에서는 어딘지 소박하게 느껴집니다. 관광지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아 크리스마스 밤 같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야기입니다- 여유로움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빠지면 서운할 산타와의 기념사진


그렇게 평범한 거리와 고요한 축제 모두를 감상한 길 위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자유롭고 자유로웠던 하루를 마칩니다.



이제 조금은,

모스크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도시에 머무는 시간으론 짧지 않은 여행 기간이기에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돌아보았고,  두세 번씩 가 본 곳도 있습니다만 사실 제가 이 곳 모스크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 '자유 여행 하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구글이나 위키백과를 통해 사진과 설명을 보고 외우는 것처럼 지나가는 관광지 관람이 아닌 살아있는 모스크바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저에게, 이 곳이 물론 최고였다고는 확답할 수 없겠지만 분명 붉은 광장이나 굼 백화점에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제 모스크바에 대해, 이 거대하지만 알고 보면 좁은 도시의 풍경들에 대해 이제 조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날이 없었다면 저는 모스크바의 한 '관광객'으로 남았을 테고, 오늘처럼 이렇게 '절절하게' 이 도시를 추억하며 글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걷기만 하는 여행이 때로는 길에 돈을 뿌리는 커다란 낭비처럼 느껴지겠지만, 때로는 책에 나오지 않는 곳에서 도시의 진짜 민낯과 마주하고 '가야 하는 곳'이 아닌 '가고 싶어 진 곳'을 걸으며 여행은 더욱 성숙해집니다.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계획하지 않았던 것에도 두려움을 버리는 것, 제 모스크바 여행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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