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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13. 2015

28장. 돌아오는 날, 꿈은 모두 끝났다.

안녕, 모스크바.

여행도 꿈도 이제  마무리할 시간
미친 여행, 그 마지막 날



마지막 밤엔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피곤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다섯 시쯤에야 잠들어 일어난 시각이 아침 아홉 시, 이제 막 모스크바의 늦은 해가 떠오른 시각이었습니다. 이제 이 짧고 늦은 해가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맞은 이 날은 제 모스크바 여행의 마지막 날입니다. 휴대폰 달력과 다이어리, TV 속 날짜까지 전부 확인해 봐도 확실히 그 날이 맞습니다.


'벌써 12일이 됐어', 혼자뿐인 숙소에서 혼자 중얼거린 이 말은 아마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어서였나 봅니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여행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날 아침은 예보에도 없던 맑은 하늘이 활짝 반겨준, 운 좋은 날이었죠.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제 사 온 과일과 치즈 등을 썰어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해결합니다. 서울 가서도 혼자 이렇게 음식을 해 먹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단숨에 '응'이란 대답은 나오지 않는군요. 스스로도 이 곳에서의 제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봅니다. 혼자 하는 식사가 한국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일부러 장을 봐 온 적도 많으니 저도 제가 낯설  수밖에요. 이 곳에서의 마지막 식사니만큼 과일이고 빵이며, 주스까지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합니다.




TV에서 본 익숙한 인물, 매일 아침 TV 뉴스에 장시간 출연하시는 러시아 최고의 분량 사냥꾼(?)이지만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좀 다르네요.



이른 아침을 해결하고 전 날 잠이 오지 않아 미리 정리해 둔 짐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제 떠날 준비가 다 끝났구나라며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열 시 삼십 분입니다.


숙소에 있어봐야 멍하니 푸틴 아저씨 얼굴만 감상할 게 뻔하니 조금이라도 모스크바 풍경을 눈과 맘에 꾹꾹 눌러 담고자 산책을 떠났습니다.



왜 이별은 정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아오는지



길에 누운 표지판의 '탁시'라는 러시아어가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변 간판들도 이제야 떠듬떠듬 읽히기 시작하는데, 꼭 이별은 이럴 때 찾아온다죠. 매일 숙소에서 전철역으로 걷던 이 길도 역시나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모스크바 같고 좋습니다. 그렇게 이번 여행 제 보금자리였던 키에브스카야부터 스몰렌스카야까지 모스크바 강을 끼고 걷는 '의미 있는' 산책을 했습니다.



유러피안몰 앞은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댑니다. 이 날은 아침 최저 기온도 영상이었던, 모스크바의 겨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아주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 마지막 산책에선 속에 입었던 내복이며 티셔츠를 다 벗어버렸고, 두 벌씩 입었던 코트도 한 장만 걸치고 상쾌한 걸음을 할 수 있었죠.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영하 30도로 꽁꽁 얼어붙은 곳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모스크바의 한강으로 부르며 종종 저에게 멋진 장면을 보여주고 맘에 드는 사진도 안겨준 모스크바 강은 어느새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아 평온한 강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아침의 화창한 하늘은 잠깐의 이벤트였던 것처럼 다시 잔뜩 흐린 하늘 아래 유유히 흐르는 모스크바 강과 그 주변의 건물들이 만드는 풍경이, 정말 모스크바다워서 좋았습니다. 다른 곳보다 높았던 이 곳에서 크게 한 숨을 쉬며 아쉬움을 뱉어냈던 기억이 나네요.


다리 건너로 제 모스크바 여행의 첫 숙소였던 골든 링 호텔과 밤마다 제 외로움을 달래 준 외무성 건물도 보입니다. 스몰렌스카야와 키에브스카야는 이렇게 다리 하나로 이어져 있는 가까운 지역입니다. 처음 숙소를 예약할 당시만 해도 숙소 이동할 생각에 고민이 되었는데, 이제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네요.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오기 전에 걱정했던 많은 것들 -치안, 음식, 물가, 추위까지도- 이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너무 평범했던 거였죠. 언제나 그렇듯 이 다리는 고요하지만 낡은 모양새 때문인지 수많은 모스크바 강 다리 중에 가장 우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조금만 다른 길로 걸으니 두 시간의 짧은 산책에도 전혀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동안 구석구석 참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모스크바를 다 알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거겠죠. 하지만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이 넓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 가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제가 이 도시를 다 알아버렸다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졌을지도 모르겠죠. 마지막 산책은 그래서 묘하게 아쉬움이 크게 남았습니다. '아, 아직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남아  있구나!'라고요.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바꾸고 싶어 졌지만, 이미 많이 늦었죠


이렇게 짧은 산책을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서의 제 마지막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le pain quotidien에서 했던 마지막 식사는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네요.


이 곳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매일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드나드는 이 대도시에서 이런 헤어짐이야 아무 특별함도 없는 거겠죠. 힘들게 28리터 대형 짐가방을 끌며 가는 제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곳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무언가를 향해 기다리고, 달리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마웠어!


열 이틀 만에 다시 찾은 벨라루스카야 역



공항으로 가는 아에로 익스프레스 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 벨라루스카야 역을 찾았습니다. 여행 첫 날 설레는 맘으로 도착했던 그 순간이 어제 같은데 시간 참 빨리 갔어요. 처음 이 곳에 온 날은 한밤 중이라 같은 곳인지 꽤 오래 헷갈렸어요. 역 건너편 지하도를 보니, 첫 날 낑낑대며 눈 밭에 짐가방을 굴리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지어집니다. 시간만 있다면 여행 첫 날 저녁 식사를 했던 근처 카페에서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지금 시각이 세시 반, 비행기가 여섯 시니 서둘러야겠습니다.

사십 분간 달리는 열차 안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여행 마지막의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여권과 e티켓을 챙겼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 그 생생한 여행 기억 중 이 순간만은 기억이 없습니다. 보드카를 마신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옆 좌석 할아버지의 표정이 마치 제 옆모습을 보는 것처럼 어딘가 슬퍼 보입니다.



모스크바 - 인천. 다시 열 시간의 비행



처음 이 곳으로 오던 인천발 비행기와는 달리 돌아가는 비행기는 승객이 적어 운 좋게 옆자리가 비었던 것은, 열 이틀간 고생했던 저를 위한 누군가의 선물이었을까요?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이제 모스크바와는 완전히 단절입니다. 제 얼굴만 한 창문 너머로 어느새 깜깜해진 모스크바 풍경을 보면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살아 돌아가겠니라며 전화를 하고, 그렇게 다시 열 시간의 비행이 시작됩니다.




끝 없는 어둠 속 비행

마침내 아침의 나라를 알리는 일출



돌아가는 비행에서는 한 숨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기내식 기다릴 때가 그래도 좋았지, 먹고 나면 다시 멍하니 잡히지 않는 여러 생각들을 머리에 마구 띄우다가, 맘에도 없는 비행기 좌석 tv의 게임도 해 보고, 휴대폰에 저장된 모스크바에서의 사진도 넘겨보면서 그렇게 아홉 시간을 꼬박 보냈습니다. 여덟  시간쯤 지나서였을까요? 내내 칠흑 속으로 달리던 비행기에 옅지만 새빨간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여니 이제 막 해가 뜨고 있었습니다. 밤의 도시에서 아침의 나라로, 그렇게 제가 '와야 할 곳'에 왔음을 알려 주는 일출이었죠.



구름 위에서 보는 일출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기에 너무나 특별했습니다. 해가 뜨는 그 풍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란 정말- 양떼 같은 새벽녘 구름이 그 아름다움을 더해 잊을 수 없던 장면이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어느새 모스크바에 대한 아쉬움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담엔 더 긴 비행 코스를 골라서 하늘 위 풍경을 더 감상하고 싶다는 기대감에 젖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출 풍경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여행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여행을 시작하는 글에서 제가 했던 말씀 기억하세요? 제 여행의 시작은 '시계 맞추기'라고.

마무리 역시 똑같습니다. 비행 8시간  30분째, 모스크바 시각으로 두시 반인 시계를 한국 시각에 맞춰 8시 반으로 몇 바퀴 돌려 맞추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확인하게 되죠. 사실 이 시계만큼은 끝까지 맞추고 싶지 않은 마음에 비행기가 착륙해서 입국 수속을 맞출 때까지 미루고 또 미뤘습니다.


인천 공항, 너 낯설다.


이렇게 저는 며칠 만에 너무 낯설어져 버린 고국 땅에 도착했고, 반가운 한글 간판들의 글씨를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으며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합니다. 믿을 수 없지만 이제 여행은 모두 끝났고,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친 여행이 남긴 흔적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 모습을 천천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열 이틀 만에 마치 십 년은 신은 것처럼 낡고 상한 신발에 눈이 멈춥니다.  정신없이 다닌 이번 여행이 얼마나 바쁘고 고되었는지 짧지만 다시 상기하면서, 그래도 떠나길 잘 했다며 웃게 됐죠. 아마 저 망쳐버린 신발은 쉽게 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언어도 준비, 시간까지 많은 것들이 부족하기만 했던  서른세 살의 모스크바 미친 여행이 막을 내렸습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었던 이 여행에서 단 하나 넘치게 넉넉한 것이 있었다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제 안의 호기심이겠죠. 더불어 낯선 길을 걸으며 깨우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과 7천여 장의 사진 들도요.


до свидания, Москва! (안녕,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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