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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13. 2015

마지막 장. 미친여행 에필로그 (Last & Best)

이래서 모스크바여야만 했다.

2015.1.5 - 17
단 한번의 여행


2015년 1월, 게다가 첫 번째 월요일인 5일. 이 여행은 저의 2015년과 함께 시작되었죠.

게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영하 30도의 러시아, 모스크바로 떠난.

그래서 '미친 여행'으로 이름 붙인 여행입니다.



여행은 아주  오래전에 끝이 났고, 저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

그리고 이제  그동안 적은 모스크바에 대한 정보 중 몇 가지는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 않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가장 큰 건 역시 모스크바에도, 그리고 서울에도 봄이 왔다는 것이겠죠? 이제 제가 걷던 날처럼 춥지 않고, 눈도 쌓이지  않았을뿐더러, 오후 네시에 해가 지지도 않습니다. 그 곳에서의 기억도 제가 쓴 글을 다시 봐야 알 정도로 흐릿해졌고요.



일상으로 돌아와 여행 기간보다 긴 시간 동안 이번 10박 12일의 여행을 정리하면서 줄곧 든 생각은 '왜 모스크바였을까?'였습니다. 여행 하루하루, 각 장소와 감정들을 돌이키면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다행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왜 모스크바에 가게 되었는지', 아니 '무엇이 나를 모스크바로 이끌었는지' 말이죠.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는 아시아, 그리고 동경하는 유럽 그리고 한 번쯤 꿈꾸게 된다는 미주 여행과 러시아 여행은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열거한 많은 대륙과 도시를 모두 가 보지는 못했지만, 모스크바에서 느낀 것은 분명 그 어느 도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문화와 풍경이었고, 그것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 등이 얽혀 완성된 것이라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왜 모스크바였는가'는 물음은 곧 '모스크바에서 무엇을 찾았는가'와 같습니다.

제가 모스크바에서 찾은 것들은 바로 이렇습니다.



1. 볼거리 - 세계 어디에도 없는 러시아만의 문화, 그 위대한 유산


모스크바 붉은 광장

모스크바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제가 아는 모스크바의 '볼거리'는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대성당뿐이었습니다. 어릴 적 '소련'이란 이름으로 각인된 선입견 때문인지 러시아라는 나라의 문화 유산들에 대해서는 접할 기회도, 찾아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요, 지금은 어느 도시보다 볼거리 많은 곳으로 모스크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붉은 광장 외에도 노보데비치 수도원, 아르바트 거리 등 시간으로 멋스러워진 곳들, 그리고 스탈린 시대의 유산인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종종 탄성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인 거대한 면적은 빈 틈 없이 오래된 유적지와 고건물들로 가득하고, 그 시대의 폭이 넓어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죠. 게다가 대다수가 종교 관련 건물이라 그 화려함이 대단합니다. 지금 이 모스크바의 '볼거리'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종일 도시를 걸어 다녀도 곳곳에 위치한 문화 유산들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만큼 이 거대한 도시가 볼거리로 가득합니다.



12일 동안 저는 참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저의 '꿈'이었던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나란히 있었던 굼(GUM) 백화점, 마네쥐 광장 역시 제 맘을 뺏기에 충분했죠. 언젠가 하루는 그냥 길을 따라 걸었는데, 아르바트 거리부터 구주 그리스도 대성당, 모스크바 강 풍경에 승전 공원까지. 상대적으로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멋진 곳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나 네댓 시간을 힘든 줄도 모르고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제가 여행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붉은 광장을 비롯해 도시 곳곳이 조명과 축제로 물들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몹시 추웠지만, 잊을 수 없었기에 모스크바 겨울 여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 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그 때문이죠.


우리가 떠올리는 '여행지'의 볼거리 -흔히 멋진 풍경과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로  대표되는-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는 참 '특별한' 혹은 '특이한' 곳입니다. 유럽과 아시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 있고, 그만의 문화와 예술이 있으며 그것들을 어느 민족보다 소중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수백 년 전의 유산들이 현재의 모스크바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입니다. 마치 수백 년 전 러시아의 귀족들이 걷던 그 거리를 걷는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2. 예술 - 현재도 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정신


아르바트 거리의 화가


예술에 대한 러시아인의 자부심과 애정은 각별합니다. 예술에 대한 인식으로 치자면 이 곳과 정반대격인 한국에서 온 저는 번화가에 자연스레 자리 잡은 그림 시장과 거리 화가들의 모습들, 곳곳에 만들어진 유명인들의 조각들이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죠. 그들의 이런 존경심은 예술가들을 기리는 박물관의 숫자와 규모를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러시아 대문호인 푸쉬킨 박물관은 러시아 전역은 물론, 모스크바 내에만 여러 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예술이 과거의 찬란한 빛만을  그리워하느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현재도 세계 최고의 공연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된 '볼쇼이' 극장과 일 년 내내 열리는 공연, 편의점만큼이나 많은 거리의 공연 티켓 판매소,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진과 현대 예술 전시까지. 어찌 보면 예술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나라답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돌이켜보면 이들의 예술에 대한 경외심은 뭔가 특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같은 여행자는 그 위대한 유산들을 그저 '즐겁게 감상하면' 되는 거죠. 동네 박물관에 칸딘스키와 샤갈의 그림이, 길 건너에 푸쉬킨이 실제로 살던 집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스크바는 골목마다 크고 작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을 정도로 예술의 양과 질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관람하는 문화도 잘 정립되어 있죠. 입장권 외에 '사진 촬영권'을 구입해 맘껏 예술 작품을 추억으로 담을 수 있는 정책 역시 그렇습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유명 예술과 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에게 모스크바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며, 저처럼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이 거리는 예술을 즐기는 기쁨을 친절하게 일깨워 줍니다.


언젠가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미술관에 들어가 가만히 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때의 낯선 제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흐뭇한 경험이었어요. :)




3. 겨울 - 혹한과 혹설 속에서 피어난 풍경



제가 모스크바를 여행한 1월 첫 주, 공교롭게도 이 일주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한 주였습니다. 아침 최저 기온은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졌고, 낮 최고기온도 영하 15도에 머물렀으니까요. 난생 처음 경험한 이 추위에 옷을 네댓 겹 껴입고도 손과 발이 얼어붙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지만 이것이 이 도시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 추위, 사실 모스크바에 오기 전부터 은근히 이 상상 밖의 날씨에 호기심을 가졌었거든요.


가장 추운 날에 다녀온 여행이니만큼, 다른 여행자들이 겪지 못한 특별한 혹한 체험이 많았죠. 말로만 듣던 영하 30도의 추위는 물론 앞이 보이지 않는 폭설에 무릎까지 쌓인 공원의 눈 밭, 물이 있는 곳이면 꽁꽁 얼어 스케이트 장이 된 이 도시 특유의 풍경까지. '추운 도시'라는 상상을 하며 제  머릿속에 그려 보았던 모습들과 실제 모스크바의 장면들을 맞춰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추위를 많이 타시는 분께 겨울 모스크바 여행은 결코 추천할 수 없는, 아니 말려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추위를 무릅쓰고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추운 1월 첫 주에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가 있고, 연말부터 축제 분위기가  계속되어 볼거리가 정말 많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 겨울의 날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스크바'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다른 여행자들의 사진처럼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담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모스크바의 '끝'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겨울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겨울의 모스크바는 혹한을 이기기 위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먹거리, 놀거리들이 여행자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갑니다. '이 추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제 질문의 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 그래서 여행 내내 너무너무 너무 추웠지만 후회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돌아온 후 한국에서 만난 꽃샘 추위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거든요, '나 모스크바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야'.



4. 거리 - 모든 걸음에서 느껴지는 도시의 생명력


붉은 광장을 즐기는 모스크바 시민들


사실 저의 여행은 대부분이 '거리'에서 채워집니다. 가장 멋진 모습을 '선별'한 풍경인 유적지와 관광지가 한껏 치장한 모습이라면, 제가 직접 걷고 파고드는 거리의 모습들은 그 도시의 민낯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참 많이 걸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해가 뜰 때부터 완전히 밤이 될 때까지 7-8시간을 전철 한 번 타지 않고 내내 걸었던 날도 있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거대한 도시는 그만큼 서로 다른 개성의 건물들과 사람들이 만드는 장면들로 가득했습니다. 흔히 보던 아시아의 건축물들, 그리고 사진에서 보고 감탄했던 유럽의 건축 양식과도 다른 이 곳만의 독특한 건축물들은 그 아름다움과 규모가 특별했으며, 무표정한 이 곳 사람들과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추위 때문인지 더더욱 표정을 잃은 사람들, 무심하게 지나가는 그들의 걸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날씨까지. 차가운 날씨와 차가운 표정들, 건물들까지 모든 것들이 차가웠지만 그것들이 모여 만드는 풍경들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몇 개 도시는 돌아본 듯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배경을 만들어 주는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한 몫 톡톡히 했죠. 그래서 제 사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들은 대부분 이 '거리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나왔습니다.


모스크바의 거리 풍경은 이 곳을 찾지 않고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아와 유럽, 미주까지, 이제 세계의 모습을 다 돌아본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아직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있는 이 곳에 관심을 가져 보셔도 좋지 않을까요?



5. 교통 - 시대를 관통해 사람과 역사를 잇는 경로


모스크바 전철 미뜨로 역사 내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중의 하나가 '관광지'가 아니라 '교통 수단'이었다는 것이 좀 서글픈 일일 수도 있지만, 이 곳이 다름 아닌 모스크바였기 때문에 그 시간이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지하 속의 또 다른 예술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름다운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과 저렴하고 빠른데다 도시 곳곳 닿지 않는 곳이 없는 편리한 지하철 덕분에 제 여행은 처음의 걱정과 달리 매우 편안했고 즐거웠습니다.


모스크바 여행을 가시는 분들께 굳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필요 없이 이 지하철을 이용하시라 추천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행자가 모스크바에서 가게 되는 모든 곳에 이미 닿아있는 촘촘한 노선 때문에 여행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고. 단돈 50 루블이면 옛 러시아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에서 국민을 구할 용도로 어느 도시의 지하철보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지어진 이 역사의 흔적들을 마음껏 관람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여행에서 너무 지쳤던 날, 전철역 안 벤치에 앉아 쉴 새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며, 언젠가 다시 이 곳에 찾게 된다면 하루 종일 이 곳에 앉아 이 아름다운 역과 사람들의 시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그저 이동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지금도 모스크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 가지 모습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6. 밤 - 짧아서 더욱 소중한 것들의 발견


끝나지 않는 어둠의 도시 모스크바


제 여행기의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 모스크바의 '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의 3/4이 밤이었으니까요.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는 곳이지만 대신 겨울이 되면 해를 보기 힘들 정도로 짧은  낮과 흐린 날씨 때문에 모스크바의 기억은 대부분 이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곳의 사람들이야 매년 찾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하다 보면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더군요. 연말부터 1월 7일 크리스마스까지 꽤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는 화려한 조명의 겨울 축제와 동네마다 딸린 작은 공원에서의 겨울 풍경들을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이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노력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고, 그 것을 보는 먼 나라 여행자들까지 잠시 추위를 잊게 해 주었습니다.



하루의 3/4, 밤이 긴 만큼 오히려 그 짧은 낮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그리고  그동안 '빨리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했던 여행자의 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호텔방 창문으로 늦은 해가 뜨며 맑은 하루를 알리는 날이면 소중한 해에게 감사하며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게 되고, 어제 보았던 모습과 다를 이 회색 도시의 풍경에 발걸음은 신나고 경쾌해지죠.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밝음'의 소중함을 이 곳에서 많이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이 날씨가 원망스러웠냐면 그건 또 아니었죠. 오후 다섯 시부터 시작된 밤을 여행자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밤을 찾아 '헤매게' 되고, 그 끝에는 해가 진 후 시작되는 모스크바의 또 다른 하루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끌벅적한 축제로, 어느 도시보다 화려한 조명의 야경과 하루의 절반을 고요한 산책으로 채울 수 있는 공원의 적막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여행의 '밤'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그저 아쉬운 하루의 마무리를 알리는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이 곳 모스크바의 겨울은 밤에 다시 한 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7. 생활 - 생소한 땅, 낯선 이들과의 소통


쭘 백화점 앞의 사람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것은 '관광'이 아니라 '생활'이었습니다. 굳이 많은 관광지들로 리스트를 채우지 않았던 것도 이 곳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래서 현지 아파트 숙소에서 지내면서 매일 장을 보고, 유명 글로벌 레스토랑이 아닌 현지의 식당과 카페를 찾아다녔습니다. 덕분에 모스크바의 생활을 얕게나마 느낄 수 있었고, 관광지 사이로 이동하는 여행보다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모스크바의 지하철 싸게 타는 법, 싸게 장 볼 수 있는 마트 등을 박물관 위치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사실 모스크바는 쇼핑을 하거나 기념품을 사기에 좋은 도시는 아닙니다. 전통 음식도 그 종류가 적고 찾아 먹기도 힘들어서 여러모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관광'에는 적합하지 않은 도시지요. 철저하게 그들의 삶만을 위해 돌아가는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던 이 곳 모스크바, 하지만 그래서 흔한 '관광지'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여행자에겐 매우 흥미로운 도시이기도 합니다. 유럽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음식과 문화에서 유럽의 것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으면서도, 러시아만의 중심이 확실히 잡혀 있는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땅과 도시를 가진 그들의 자부심 때문이기도 하겠죠?-


어느 도시 못지 않게 다양한 문화가 있고, 외국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들의 '고자세' 때문에 현지에서의 '생활 혹은 생존'의 맛은 더욱 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행지에서 '관광객'보다는 '여행자'로 남고 싶으시다면 모스크바는 이 특유의 뻣뻣함으로 적응할  수밖에 없도록 해 줄 것입니다. 굼백화점의 가격에 혀를 내두르고 쇼핑 센터의 세일 매장을 돌아보는 일상, 쌓여 있는 토마토 더미에서 이건 왜 20 루블이 더 비쌀까 곰곰이 살펴보는 모습과 어느새 지하철과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더 이상 줄을 서지 않는 나를 상상해 보세요. 새로운 방법의 '힐링'이 아닐까요?



8. 사람 - 차갑지만 순수한, 겨울 눈을 닮은 사람들


모스크바 크리스마스 풍경


무뚝뚝한 표정에 차가운 말투, 하지만 유심히 지켜보면 도와주고 싶은데 바보처럼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고, 상대방이 미안해할까 봐 걱정하는 표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갑지만 순수한 것이 꼭 여기 잔뜩 쌓인 눈 같았던 모스크바 사람들. 때로는 너무나도 달라서 흥미로운, 때로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며 미소 지어보는 경험을 하게 해 줘서 얼굴도 모르는 모든 스친 인연들이 다 고마웠습니다. 제가 이 곳을 찾았던 크리스마스 시즌엔 아마 평소보다 이 추운 땅에 웃음이 더 많이 피었던 거겠죠. 여행 전엔  걱정뿐이었던 이 곳 사람들과의 대화와 소통은, 많은 기회는 아니었지만 러시아어를 모르는 제게 매우 너그러웠으며 다가가는 순간 빗장이 풀어지듯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는 경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는 모스크바,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낯선 러시아어 억양이 다소 투박하고 거칠긴 해도 그 뒤에는 분명 우리와 같은 마음이 있거든요. 공원에서 눈에 미끄러져 넘어진 저를 일으켜 세워주고 옷을 털어주던 노부부와 매일 같은 빵을 손가락질로 사 가는 저를 웃음으로 대해주던 빵집 누나(?), 그리고 길에 수 없이 마주친 '사람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들'이 있어 이 여행이 더 즐거웠습니다. 여행 기간 동안 찍은 제 사진의 대부분에는 꼭 모스크비치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있는 도시 중 하나인 모스크바, 이 곳에서는 '사람 여행'도 빠질 수 없습니다.



9. 여행 - 떠남 그 자체로 얻게 되는 것들


모스크바에서 찍은 첫 사진, 벨로루스카야 역


무엇보다 이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여기 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툴고 미흡했지만 처음 이 낯선 땅의 이름을 여행지로 올리고, 마침내 10시간을 날아 도착하던 그 순간의 묘한 기분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낯선 땅에 내린 걸음이 어색하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왠지 TV나 사진 속 같아 앞으로 해야 할 것들도 잊고 혼자 웃었던 시간을 말이죠. 잠 잘 숙소 외에는 하나도 계획된 것 없는 여행이었지만, 도착하고 나니 그냥 제가 이 곳에 서 있다는 것 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렘은 여행하는 내내 점점 더 커졌습니다. 매일 난생 처음 보는 길을 걷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조금씩 '언어 없는 대화'를 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로 짜릿했거든요. 그래서 이 곳에서의 시간이 가지 않기를 날이 갈수록 간절히 바랬고, 서울에 돌아가기 전부터 다음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지만요-



여행 기간 동안 저는 제 기대보다도 많은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지를 가 보았고, 이 도시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등을 다른 이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러시아의 엄격한 입국 심사에 첫 날부터 당황도 했고, 난생 처음 겪는 강추위와 폭설을  온몸으로 맞기도 했으며 혼자 음식을 해 먹고 익숙한 걸음으로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들 모두가 다 기억에 남지만, 정작 여행을 다녀와서 저에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역시나 '내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이죠. 아마 12일 동안 길을 잃고 모스크바 골목길만 헤맸어도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돌아오는 길, 십 년은 지난 것 같은 구두를 보며 제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길을 걷는 행복'


이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제 인생에 큰 자국으로 남을 것 같아요.



마무리-

보고싶을거야, 모스크바.

무엇엔가 이끌리듯 떠난 여행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안고 끝이 났습니다.

'왜 모스크바였을까'라는 질문은 '그 곳이 어디였더라도, 그리고 모스크바여서'라는 대답으로  마무리되었네요.


이제 남은 것은 처음 이 여행기를 쓰기 시작할 때의 다짐처럼 2015년 제 첫 페이지를 채워 준 모스크바는 잊고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 다음 여행도 분명 지난 겨울 여행처럼, 그렇게 준비 없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계획된 여행에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안고 오지만

계획하지 않은 여행에선 뜻밖의, 그래서 놀라운 것들을 주워 온다는

'미친 여행'의 묘미를 알았거든요.



안녕, 모스크바

언젠가 꼭 다시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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