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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Jan 02. 2016

한 장 더, 내게 듣는 무용담

미친 여행 일 년 후,  그때의 나와 마주 앉아


이것은 아주오랜 기록들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여전히 의미있는 정서들이다




감사합니다!



다녀온 지 벌써 일 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고 이 이야기를 족히 수백번을 했습니다. 제대로 된 준비 하나 없이 무모하게 떠난, 그래서 '미친 여행'이라 이름 붙인 제 모스크바 여행 이야기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서 수상을 하게 됐고, 올해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제게는 큰 전환점이었던 모스크바 여행 그래서인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 년 후, 미친 여행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이어보려고 합니다.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몰려드는 아쉬움 속 유일하게 남은 즐거움이라면 그동안의 기록들을 보며 여행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한바탕 여행 후에 남은 사진은 마치 기념품이나 전리품 같아 휴대폰에 저장해 두고 매일같이 보기도 하고 PC 배경 화면으로  장식되기도 합니다.


다녀오면 수많은 사진과 감정들이 남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 적게는 수십 배, 많게는 수백, 수천 배. 제게도 그런 장면들이 수만 장 있습니다. 그들 역시 그 순간의 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럴듯한 사진 속 장면보다 더 극적이고 절실한 것이기도 합니다. 담아낸 제 능력이 부족해 혹은 부끄러워 덮어둔 것이죠.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 혹은 의도적 이더라도 그 사진을 다시 꺼내보면 마치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설렙니다. '다시 설렌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습니다. 그렇게 내게 다시 듣는 무용담들은 지난 여행,  다시없을 그 순간들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다시 새기기도 합니다.


일 년, 그 여행 속에 있는 제가 지금의 제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영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덜컥' 혹은 '철렁' - 여행의 첫걸음에서


'덜컥'하고 내려앉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모르는 글자는 그림처럼 보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연주곡과 다름이 없어요. 많은 여행자들은 공항의 설렘만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제게 공항은 그리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공항이 보이기 시작하면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지루한 비행을 잘 견뎠다는 성취감 비슷한 감정에 맘이 들뜨지만 그것도 잠시, 비행기가 저를 뱉어내고 나면 늘 한없이 막막한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승무원의 손짓은 일 초라도 빨리 사람들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스크바 셰러미티예보 공항의 첫인상은 작고 낡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게이트를 나서 둘러보는데 할아버지 장례 때문에 급하게 갔던 진주 고속버스터미널이 떠올랐을 정도. 이윽고 아에로 익스프레스 터미널로 걷다 보니 이 도시만큼이나 큰 규모의 공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역시나 첫인상이 중요한 것이라 지금도 제 기억 속 모스크바 공항은 이 작은 복도 하나만 남아있습니다.

난생 처음 밟은 이 공항을 능숙하게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 28인치 대형 캐리어를 끌다 이 풍경 앞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며 흘겨본 이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정말로 공항에 걸려 나를 더 막막하게 하려는 것이 놀라웠거든요. 아마 저는 여행을 준비하고 이 곳까지  날아오면서도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나 봅니다. 그나마 떠듬떠듬 읽을 줄 아는 영어가 덧붙여져 다행이었지만 이때 제 눈에는 그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보다 제가 이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이 묘하게  흥분됐습니다. 여행의 준비는 이 장면 앞에서 시작과 동시에 완성됐습니다. '재미있겠는걸' 이 한마디로.


모스크바 셰러미티예보  국제공항, 혹 제가 언젠가 다시 이 공항에서 같은 위치에 설 수는 있겠지만 이 장면을, 감정을 다시 마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만난 반가움이나 편안함 같은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몇 번이고 느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 날 느낀 감정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오직 한 번만 마주할 수 있는 이 순간의 감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때의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예상보다 힘차게 이 무모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종종 이날의 막막한 감격이 몹시 그립습니다. 다시 이렇게 설렐 수 있을까, 하는 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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