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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Nov 01. 2016

다시 겨울, 한번 더 시작

모스크바 미친 여행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그거 알아? 오직 널 만나기 위해 나는 이 곳에 왔어.


2015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


다시 겨울, 계절이 두 번씩 지나 꼭 그 날처럼 매서워졌습니다.

그 사이 저는 나이를 두 살 먹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습니다. 배도 좀 나왔고요.


하지만 사실 그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떠나기 전날 제게 내복을 건넨 친구와 오늘도 대화를 나누고 있고,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그 날 입었던 코트를 꺼내 입었습니다. 매달 말 통장 잔고 걱정을 하고 종종 결혼 잔소리를 피해 혼자 술을 마시는 신세 역시 그때와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그 도시 그리고 여행 이야기를 마치 지난주 있었던 일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됐습니다만.


어디서 생긴 것이었는지 모를 '무모함'으로 무작정 겨울 도시로 떠난, 그 용기를 비웃으며 이름 붙인 '미친 여행 in 모스크바'라는 이야기가 끝난 지 벌써 일 년이 됐습니다. 지나 보니 설익은 글과 사진들이지만 미지의 도시에서 제가 느낀 수많은 감정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공감해주시는 분들의 짧은 말들을 보며 여행 못지않은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장면과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행운을 얻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쓴다고 생각하세요"

2016년 봄, 출판사 담당자를 만나던 날

출판사 담당자의 이야기에 알겠다고 대답을 하기까지 길어야 이삼 초의 시간이 어쩜 그리 길던지요. 카페에 앉아 있던 제 머리 위로 10박 12일의 시간이 차례로 펼쳐졌고, 저는 남은 시간과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윽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묘한 흥분 같은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해 볼게요."


그렇게 제 앞에 두툼한 종이뭉치 하나가 놓였습니다. 글은 물론 제목도 없는 완전한 백지로. 모스크바 여행 이야기는 그렇게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됐습니다. 돌아보면 꼭 그 여행처럼 무모했던 것 같아요.


 지난 여름은 지독하게 더웠습니다.

출간 기획안이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은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이것은 꽤 낭만적인 이야기였습니다만, 이후 준비 과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쓰는 이야기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것들로 채우고 어떻게 맺어야 할지 고민하다 해가 저무는 날도 있었고 한 문장에 매여 종일 고치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저는 영상 삼십 도의 무더위 아래서 영하 삼십 도의 모스크바를 매일 떠올리고 꺼내 보았습니다. 그 몇 달간 제 노트북 컴퓨터 배경 화면은 언제나 모스크바에서 찍은 첫 번째 사진이었고요.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2015년 1월, 모스크바에서 찍은 첫번째 사진


그 여행은 첫 번째 여행은 아니지만,

제 모든 여행의 시작입니다.

낯선 도시 모스크바에서 처음 걷는 길의 행복을 알게 된 후 저는 종종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되었고, 책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운 좋게 많은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미친 여행의 원래 목적지가 될 뻔했던 체코 프라하는 물론 평생 가볼 일 없을 거라며 기대하지 않았던 지구 남반구의 도시까지. 각 도시가 품은 그만의 보석을 하나씩 발견하는 동안 저는 종종 그 매서웠던 겨울과 도시를 그리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분명 그 미친 여행, 정신 나간 결정이 있었겠지, 라며.


잠시도 이 순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2016년 여름, 1차 원고를 완성한 날.

어느 해보다 길었던 지난여름의 끝자락,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야 조금 시원해졌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백지에서 처음부터 다시 쓴 이야기는 전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습니다. 일 년 만의 시간만큼 조금은 멀어졌지만, 그만큼 솔직해졌습니다. 처음 쓴 여행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낯선 겨울 도시와 사람들이었지만, 새로 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어느새 그 무모한 순간들에 있었던 제가 되었더군요.


두 팔을 번쩍 들고 침묵의 환호를 지르던 그 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그것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여전히 서툰 글 곳곳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다 읽은 후 씨익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 더 남은 것 없이 그 여행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는 후련함 때문입니다.


새로 시작한 미친 여행 이야기에는 이전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낯선 도시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요.


‘혹시 내일이라도 그곳에 날아가면, 다시 그런 밤이 있을까.’

- 본문 중


그 도시에서처럼 차갑지는 않더라도 겨울 찬바람이 불어올 때에 맞춰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더 급해집니다. 제목이 정해졌고, 사진을 골랐습니다. 독촉 전화를 받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정말 책이 나오긴 할까?'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 출간됩니다.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


언젠가 그 날의 붉은 광장을 사진으로 다시 마주하며 나는 어쩌면 이 여행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준비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했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 본문 중


어쩌면 새로 쓴 모스크바 여행기가 붉은 광장에서, 성 바실리 대성당과 노보데비치 수도원 앞 그리고 이름 모를 모스크바 골목을 걸으며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별 것 아닌 그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수 있는 행운보다 다시 그 겨울을, 순간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모스크바 여행기는 새로운 제목으로 11월 중 출간될 예정입니다.

책이 서점에서 여러분과 마주했을 때, '아, 이게 그거구나'라고 알아봐 주시면 무척 기쁜 일이 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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