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미친 여행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그거 알아? 오직 널 만나기 위해 나는 이 곳에 왔어.
다시 겨울, 계절이 두 번씩 지나 꼭 그 날처럼 매서워졌습니다.
그 사이 저는 나이를 두 살 먹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습니다. 배도 좀 나왔고요.
하지만 사실 그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떠나기 전날 제게 내복을 건넨 친구와 오늘도 대화를 나누고 있고,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그 날 입었던 코트를 꺼내 입었습니다. 매달 말 통장 잔고 걱정을 하고 종종 결혼 잔소리를 피해 혼자 술을 마시는 신세 역시 그때와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그 도시 그리고 여행 이야기를 마치 지난주 있었던 일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됐습니다만.
어디서 생긴 것이었는지 모를 '무모함'으로 무작정 겨울 도시로 떠난, 그 용기를 비웃으며 이름 붙인 '미친 여행 in 모스크바'라는 이야기가 끝난 지 벌써 일 년이 됐습니다. 지나 보니 설익은 글과 사진들이지만 미지의 도시에서 제가 느낀 수많은 감정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공감해주시는 분들의 짧은 말들을 보며 여행 못지않은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장면과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행운을 얻게 됐습니다.
출판사 담당자의 이야기에 알겠다고 대답을 하기까지 길어야 이삼 초의 시간이 어쩜 그리 길던지요. 카페에 앉아 있던 제 머리 위로 10박 12일의 시간이 차례로 펼쳐졌고, 저는 남은 시간과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윽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묘한 흥분 같은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해 볼게요."
그렇게 제 앞에 두툼한 종이뭉치 하나가 놓였습니다. 글은 물론 제목도 없는 완전한 백지로. 모스크바 여행 이야기는 그렇게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됐습니다. 돌아보면 꼭 그 여행처럼 무모했던 것 같아요.
출간 기획안이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은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이것은 꽤 낭만적인 이야기였습니다만, 이후 준비 과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쓰는 이야기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것들로 채우고 어떻게 맺어야 할지 고민하다 해가 저무는 날도 있었고 한 문장에 매여 종일 고치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저는 영상 삼십 도의 무더위 아래서 영하 삼십 도의 모스크바를 매일 떠올리고 꺼내 보았습니다. 그 몇 달간 제 노트북 컴퓨터 배경 화면은 언제나 모스크바에서 찍은 첫 번째 사진이었고요.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낯선 도시 모스크바에서 처음 걷는 길의 행복을 알게 된 후 저는 종종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되었고, 책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운 좋게 많은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미친 여행의 원래 목적지가 될 뻔했던 체코 프라하는 물론 평생 가볼 일 없을 거라며 기대하지 않았던 지구 남반구의 도시까지. 각 도시가 품은 그만의 보석을 하나씩 발견하는 동안 저는 종종 그 매서웠던 겨울과 도시를 그리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분명 그 미친 여행, 정신 나간 결정이 있었겠지, 라며.
어느 해보다 길었던 지난여름의 끝자락,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야 조금 시원해졌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백지에서 처음부터 다시 쓴 이야기는 전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습니다. 일 년 만의 시간만큼 조금은 멀어졌지만, 그만큼 솔직해졌습니다. 처음 쓴 여행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낯선 겨울 도시와 사람들이었지만, 새로 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어느새 그 무모한 순간들에 있었던 제가 되었더군요.
두 팔을 번쩍 들고 침묵의 환호를 지르던 그 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그것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여전히 서툰 글 곳곳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다 읽은 후 씨익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 더 남은 것 없이 그 여행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는 후련함 때문입니다.
새로 시작한 미친 여행 이야기에는 이전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 본문 중
그 도시에서처럼 차갑지는 않더라도 겨울 찬바람이 불어올 때에 맞춰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더 급해집니다. 제목이 정해졌고, 사진을 골랐습니다. 독촉 전화를 받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정말 책이 나오긴 할까?'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 본문 중
어쩌면 새로 쓴 모스크바 여행기가 붉은 광장에서, 성 바실리 대성당과 노보데비치 수도원 앞 그리고 이름 모를 모스크바 골목을 걸으며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별 것 아닌 그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수 있는 행운보다 다시 그 겨울을, 순간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모스크바 여행기는 새로운 제목으로 11월 중 출간될 예정입니다.
책이 서점에서 여러분과 마주했을 때, '아, 이게 그거구나'라고 알아봐 주시면 무척 기쁜 일이 될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