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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11. 2015

#7 Less is better, 흑백의 다채로움

현혹에서 벗어나면  진실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속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럴듯한 '색'의 거짓말에



저는 어떤 색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색과 형태로 인식하고 기억하려 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확률로 형태 이전에 색을 통해 대상을 이미 정의하곤 하죠. 오렌지색, 옥색, 개나리색이란 이름처럼 요. 눈으로 직접 보고 감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색'이 오히려 우리를 속이고 생각을 가두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색'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 하늘의 색을 다 설명할 수 없고, 사과는 빨간색이 되기까지 과수원에 숨어있을 뿐입니다. 바다는 파랑과 에메랄드, 투명까지 모두가 서로 다른 색으로 기억하고 있죠.


물론 색의 유혹을 거부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여행을 추억해볼까요? 눈 앞에 펼쳐진 멋진 실루엣보다 형형색색 화려한 빛깔에 먼저 매료된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감각을 관통해 우리에게 가장 빠르게 닿는 색의 힘은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지만 종종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장면이 건네는 말이 마치 셀로판 필름을 통과하듯 왜곡되고 굴절될 때가 있죠. 특히 정지된 장면을 담는 사진에선 그 둘의 간극이 훨씬 큽니다.

 

모스크바, 2015


빛을 담을 능력이 없던 시절의 구닥다리 기술이 벽면을 가득 채울 크기의 고화질 동영상을 찍는 현재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흑백사진의 인기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히려 더욱 상승하는 것 같아요. 수천만화소 디지털 카메라로 굳이 흑백사진만을 찍는 작가가 있고, 그 사진들에 열광하는 관객이 21세기에도 있습니다. 흑과 백. 두 가지 색상뿐인 답답한 이 사진에 대체 어땐 매력이 있는 것일까요?


가끔 유명 작가의 전시에서 마주친 흑백 사진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거예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흑백사진의 묘한 매력,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신사의 화법을 따라 연습하듯 저도 두 가지 색으로 여행을 그려보곤 했죠. 재미있게도 그러다 보니 제법 제 말투 같아졌습니다.




단도직입(單刀直入)

진심으로 건네는 대화


양수, 2014

굽이굽이 난 하얀 길 -실제로는 흰색이 아닙니다만- 을 따라 시선이 흐르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에게 닿습니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대답을 아직 듣지 못했지만 곧지 않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의 관계가 꽤나 견고하다고 결론 내 버립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사진을 보는 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백사진의 매력으로 '솔직함'을 꼽습니다. 흑과 백, 있음과 없음. 이 극단적인 논리의 화법은 뜸을 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죠. 때로 너무 직설이라 가슴을 따끔 찌를 때도 있고요.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생각을 강요하는 수많은 '색'을 이런 방법으로나마 벗겨내고 알몸과 마주하니 무언가 조금 다른 것들이 보이는 것 같거든요. 그 순간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분들이 이 솔직함에 매료되어 흑백사진을 동경하고,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요?


부산, 2013


그래서 흑백사진을 지름길에 비유합니다. 제가 찍는 순간에 보았던 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필요 없이 집중시킬 수 있고 장면 곳곳에 깔렸던 소음들도 손쉽게 제거할 수 있죠. 걷고 찍고 추억하며, 흑백사진은 사진을 통해 이야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옷을 벗어 알몸을 보면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순간의 대화는 눈빛마저 더욱 진실하게 만듭니다.

제게 흑백사진을 설명하라 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알록달록한 재킷과 셔츠, 스웨터와 스커트를 떨쳐내고 나니, 그가 진실로 하려 했던 이야기가 들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 대화가 언제나 최선이 되지는 못합니다. 색으로 칠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장면이 있죠. 사실 우리의 눈은 다른 기관에 비해 경박해서 이 색에 금방 현혹되어 버립니다. 



이 사진들이 색 없는 흑백 사진이었다면 눈을 끌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형태 이전에 색으로 감흥을 주는 그런 장면들을 많이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쾌락은 너무 강해서 그 색만을 쫓아 지구 곳곳으로 많게는 십 수시간을 날게 만들죠. 위 장면들과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색만으로도 적지 않은 감동을 줍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같은 장면이지만 서로 다른 느낌입니다. 새하얗다 못해 파리한 왼쪽 풍경에선 매서운 모스크바 한겨울 날씨가 가장 피부에 와 닿습니다만 오른쪽 흑백사진에선 꽤나 따뜻한 코트를 두른 듯 눈보라보단 두 사람의 관계나 그 너머 보이는 풍경의 농담 등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한 꺼풀 색을 벗겨내니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흑백의 색(色), 그 다채로움


경기도, 2014


흑(黑)과 백(百)


세상을 흑과 백 단 두 가지 색만으로 감상한다는 '흑백사진'이란 말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위 장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은 검정과 흰색 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처럼 흑백사진에도 수많은 색이 있습니다. 흰색이 검정으로 어두워지고 어둠이 밝음으로 떠오르며 표현되는 수많은 색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건네죠.


사진 속의 여인은 분명히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진함에서 흐림으로 걷고 있습니다. 그 걸음을 따라가니 풍경이 점점 아득히 흐려집니다.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다른 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을 단순히 '백'으로 정의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흑백사진으로 대화를 하고자 할 때 꼭 익혀두어야 할 이 키워드는 종종 한 장의 사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흑과 백, 빛의 있음과 없음의 간극을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는 곧 그가 얼마나 세련된 화법을 사용하는가 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말솜씨는 곧 설득력으로 이어지죠. 사진 속의 수많은 산등성이는 서로 다른 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농담(濃淡)을 통해 산등성이의 거리와 이 날의 희부연 하늘을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색'을 벗겨내 오직 '빛'으로 표현하는 흑백사진은 그만큼 섬세한 시선을 요구합니다. 흑백사진이 오히려 컬러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저 역시 오래지 않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명(明)과 암(暗), 그 사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색보다 더 많은 '겹'이 있더라고요. 그것들을 최대한 많이 혹은 단 두서너 개로 압축해서 표현하며 흑백만의 화법을 배우게 됩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흑백사진 속에는 분명 '색'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지난 여행들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색을 벗겨내고 말이죠.


프라하, 2015


잔뜩 쏟아진 비와 우중충한 날씨에 만물이 색을 잃어 무채색이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때도 그랬지만 다녀와서 다시 보아도 역시나 우중충한 이 사진을 흑백사진으로 다시 보니 이전보다 꽤 그럴듯해졌습니다.


사실 제 흑백여행은 아직 이런 걸음마 수준입니다. 색으로 감흥을 주지 못하는 장면에 벗기기보단 오히려 흑백이라는 껍데기를 한 겹 더 씌워 소위 '그럴듯하게' 만드는 정도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한번 보면 아주아주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경망스러운 오사카의 가로등 불은 이 길을 걸으며 느꼈던 고요와 여유를 가볍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고민 끝에 흑백으로 극약처방(?)을 하고 나니 그나마 그 밤의 감정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좋아하는 흑백사진의 '솔직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렇게 흑백사진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흑백은 '지름길'이니까요. 그리고 그 길이 즐거움을 준다면 그 역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흑백만을 위한 사진


모스크바, 2015


두 가지 색으로 몇 번의 여행을 해보니 조금씩 이 대화에 익숙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가끔이지만 흑백으로 감추는 사진이 아닌 흑백만을 위한 사진을 찍게 되죠. 하루에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대여섯 시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흐린 날씨와 폭설 뒤에 숨은 날이 많았던 모스크바에서 종종 그런 장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흑백으로 여행하기에는 최고의 도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진에선 저의 미숙함만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분명 의미 있던 여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흑백을 염두 해두고 찍은 사진과 흑백으로 변환한 사진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거든요.  그동안 익숙했던 색이 아닌 명암만으로 표현하는 흑백사진은 빛을 캐치하는 다른 관점을 요구합니다. 우열의 개념이 아니라 다른 접근 방식이죠. 



그렇게 쉬지 않고 다가가다 보니 종종 눈 앞의 장면을 빛과 형태만으로 인식하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고, 그 결과물은 화려한 색의 풍경사진보다 더 큰 감흥을 안겨주었습니다. 저처럼 흑백사진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제가 감히 드릴 수 있는 팁은 이것 하나입니다. 오직 흑백만을 위한 사진을 찍어보시라고. 그런 여행을 한 번 떠나 보시라고.



흑백사진이 더 이상 솔직하지 않을 때


모스크바, 2015


색을 지우고 장면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니 마치 속살처럼 감정이 보입니다.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 상당히 날카롭고 감각적입니다. 촬영자가 굳이 과한 감정을 싣지 않아도 관객과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과한 감정이 실린 사진을 볼 때면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노년의 주름을 더 깊이 부각하고 달동네의 허름한 풍경을 '삶의 무게'니 '인생의 깊이'같은 그럴듯한-그들 생각에는- 제목을 붙여 없는 감정을 부여하고 연민을 강요합니다. 그런 사진들은 솔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신 생각처럼 힘들고 불행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보기 위해 색의 거짓을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연민이란 불투명한 막을 한 겹 씌우는 행위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잠시 동안은 강하게 마음을 때릴지 몰라도 결국 잔향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흑백사진의 가장 큰 장점인 솔직함을 포기한 사진들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장면, 그리고 사진 속 그와 그녀가 하게 두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그것이 생각보다 꽤 어려운 것이지만 말이에요.



나만의 시선은 곧 나를 기억하게 하는 버릇


부산, 2014


말투와 억양, 이따금 눈에 띄는 제스처까지, 이야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누군가에게 나를 각인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합니다. 컬러사진보다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의 흑백사진에선 이 작은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겠죠. 그래서 조금 더 다양한 시선을 시도하며 나만의 흑백사진을 시도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행히 색을 저만치 비껴놓았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조금 더 수월해집니다.


이제 막 흑백의 솔직함에 매료된 저는 되도록 적은 색상으로 장면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다소 '촌스러운' 방법을 좋아합니다. 깊은 밤 해운대 백사장을 걷다 찍은 이 사진은 단 두 가지 색상뿐인 극단적인 장면이지만, 저는 이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별 이야기가 없는데도 자꾸 보았던 기억입니다.



위 사진이 컬러 사진이었다면, 그래서 나무며 풀, 낙엽의 색상들이 눈을 현혹했다면 그의 존재를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복해서 이런 느낌의 장면을 포착하고 기록해가며 이것을 저만의 말투 혹은 억양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완전히 제 것이 될 때까지요.


물론 많은 분들이 이미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계시겠지만요.



여러분이 갖고 싶은 버릇은 어떤 것인가요?




흑백사진과 여행은 닮은 점이 많아요


프라하, 2015


짐이 가벼워지면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더 많은 곳을 걷고 뛰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감동들을 남김없이 주워담을 수 있습니다. 제게는 흑백사진이 그런 느낌입니다. 색 하나만 버렸는데 감정과 교감,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얻었고 그것은 컬러사진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지난 프라하 여행, 같은 장면을 찍은 컬러와 흑백사진 두 장 중 대부분 화려한 컬러 사진을 선택하지만 몇 장만은 굳이 흑백사진을 간직하게 되었던  이유, 그것이 제가 느낀 흑백의 매력입니다.


앞으로 제 걷는 여행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이 흑과 백, 명과 암 사이에서 이뤄질 것 같습니다.

가끔 이렇게 색을 지우고 바라봐도 세상은 충분히, 때로는 더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정말 제 눈이 두 가지 색만을 보게 되길 원하진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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