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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Sep 16. 2015

#8 다시, 내게, 가을.

가을만이 줄 수 있는 감흥(感興)에 대해

올해도 어김없이 잘 찾아오셨네요
 길 잃을까 걱정했어요



어느새 부쩍 길어진 출근하는 이들의 소매와 이제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냉장고 속 얼음, 그리고 비현실처럼 붉은 퇴근길 노을을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중얼거립니다. 돌아오셨군요 라고. 매년 하는 말이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실은 끝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여름이 드디어 지났습니다.


느껴지시나요?

다시, 가을이 왔습니다.



여러분의 지난 여름은 얼마나 뜨거웠나요? 혹자는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적 있었냐'며 타박하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찬바람의 청량감에 돈이라도 주운 듯 괜스레 신이 나는 걸 보면 뜨거운 것만이 진리는 아닌가 봅니다. 무엇보다 어제까지의 여름은 너무 무덥고 무거웠어요.



이번 가을을 참 기다리고 그리워했습니다. 매해 그랬지만 올해는 유독 더 그랬어요. 멋진 해외여행 스케줄이나 만기 되는 적금도 없는데 무엇을 그렇게 기다린 걸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이 계절은 유난히 무엇이든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엔 코웃음 치던 기적 같은 일도 '가을이라면' 한 번쯤 기대하게 되지 않던가요?


제가 떠올리는 가을엔 꼭 '다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새로운 계절이지만 잘 돌아왔다며 반가워하거든요. 처음 만나는 풍경인데도 저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참 많이 그리웠다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노력하지 않아도 만나게 될 것을 아는데 자꾸 까치발을 들어 어디쯤 왔나 찾아보는, 가을이 유독 그런 계절입니다.


요즘 저는 매 아침, 다시 만난 것들에 반가운 인사를 건넵니다.

가을은 과연 재회(再會)의 계절인가 봅니다.



그리워한 그 색이 들었다, 다시.



가을을 떠올리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들이 어떤 사물을 떠올리기 전 이미 생각 위로 흐르며 단숨에 물들이는 가을의 '색'을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색은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분홍빛 코스모스, 색지처럼 파란 하늘, 머리 위를 가득 채운 은행잎의 노랑처럼 모두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퇴근길 지친 몸을 일으켜 나도 모르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게 한 환상적인 노을이나 그녀와의 첫 데이트 길에 난생 처음 산 꽃다발의 색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을은 다른 어떤 계절도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쾌락을 주는 계절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푸르기만 한 여름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가을의 원숙미를 결코 이길 수 없죠. 이제야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색과 그 아름다움을 맘껏 과시하며 살랑이는 가을의 산물들은 보는 것만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당장 떠나고 싶게 만들죠.



주위를 둘러보세요, 어느새 세상이 참 알록달록해졌죠?



다시, 그 곳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은 현대인들을 '여름잠'에 빠지게 만듭니다. 감상과 의욕의 수면이죠. 더위를 핑계로 떠날 기회를 놓고 땀이 두려워 달리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이 곳이 아니면 정신이 들 것 같아서 이곳저곳 휴가지에 서보지만 결국 여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만 깨닫고 멍하니 앉아 졸음에 의식을 맡기기 일쑤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느낄 수 있는 초가을 찬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졸음이 사라지고 활력이 생깁니다. 지난 여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나 포기했던 것들이 후회돼 함께 떠날 이를 수소문하고 카페보다는 공원 산책을 즐기게 되죠. 이것만으로도 큰 변화지만 가을이 주는 선물이라 하면 바로 이 그리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한 번 스쳤던,  그땐 별 추억도 없이 빨리 집에나 가고 싶던 그 곳 그리고 그 날이 문득 견딜 수 없이 그리워지며 어디였는지 떠올려봅니다. 



어딘지 떠오른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한 건 장소가 아니라 그 풍경으로 가던 걸음과 바라보던 시선, 감탄사를 내뱉던 입일지도 모르니까요.



그와, 그때 그 장소에서 다시.



봄이야 그 이름 그리고 발음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봄'이라고 소리 내어 불러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꽤 좋아집니다. 반면에 가을은 쉽게 부르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하게 되는 이상한 감정이 있습니다. 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설렘이라면 가을은 안도감이 비유해야 할까요? 


아주 많이 그리워한다면 분명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대상은 꼭 다시 오고 싶었던 지구 어딘가이기도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차분한지 우울한지 모를 이상한 감정으로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 번호를 적어두고 한두 시간을 그냥 보내기도 하죠. 잘못이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삽니다. 가을 탄다는 말로 굳이 변명하려 할 필요가 있을까요? 햇살과 공기, 이 계절의 모든 것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걸요. 그렇게 다시 재회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특별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면요? 그래도 다시 그 사람의 손을 잡아보는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올 가을은 이미 충분히 즐긴 겁니다.



어쩌면 떨어진 이에 대한 그리움은 지난 여행을 추억하는 일과 비슷한 것도 같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참 쉽지 않은.


대체 왜, 아직도 내 맘을 콕콕 찌르는 그와 그녀들은 다들 가을에 태어난 걸까요?



다시 떠날 수 없을 것 같던 여행



이 가을에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한 번 다녀왔던 곳이라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곳은 이미 익숙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 덧씌워져 있을 테니까요. 멋진 날씨, 선선한 기온, 성수기가 지나 저렴한 티켓과 어디로든 데려가 달라는 새 가을 스웨터까지 우리가 가을에 반드시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는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미 여름 휴가로 멋진 휴양지를 다녀오셨다고요? 새 계절은  그때와 전혀 다른 세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저도 해외여행 정말 좋아하지만 가을만큼은 한국에서 만끽하려 합니다. 가을 날씨만큼은 프라하의 봄이나 모스크바의 겨울 부럽지 않을 정도로 멋지거든요. 마치 신이 이 즈음엔 이 땅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날씨가 환상적이니 굳이 멋진 곳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곳이라도 이미 가을의 색 그리고 움직임이 눈을 가득 채워줄 것이니까요. 그 곳에서 '2015년 가을' 그 자체로 남을 한 장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 가을의 '베스트 씬'은 무엇으로 남을까요?



힘들게 다시 찾은 여유



발목을 붙잡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결국 떠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회색 도시에도 곳곳에 공평하게 스며드는 이 계절만의 여유가 있으니까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동네 공원과 이제 온전히 옛것 같진 않아도 그런대로 운치 있는 성곽길, 그게 아니라면 스마트폰만 보며 걷느라 몰랐던 출근길 가로수를 유심히 보니 원래 이렇게 좋았나 싶을 정도로 낭만적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함께 걷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새깁니다. 매일 걷던 지루하디 지루한 이 길에서 멈춰 서게 하고, 사진기를 꺼내게 하는 매력, 그것이 이 가을이 갖는 매력이 아닐까요? 


혼자 집에 남겨진 주말, 책 한 권과 생수 한 병을 들고 한강 공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갔습니다. 잔디밭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 눈 앞을 가득 채운 초록과 파랑에 취해 독서는 결국 포기했지만 그래도 책을 들고 온 것이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던 빈 풍경에 애완견의 아장걸음과 그녀의 미소가 퍼지니 이제 다 채워졌다 싶어 사진을 찍습니다. 고민하다 끝내 카메라를 챙겨온 것이 참 다행입니다.



올 가을은 아직 찡그린 적도, 찡그린 이를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까요?



응, 이따 다시 또 만나



형형색색의 풍경도 그 위에서의 산책도 좋지만 역시 가을의 백미는 가을밤의 낭만이 아닐까요? 휴일이면 녹색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듯 빈 틈 없이 인파가 모이고 공기는 웃음소리로 채워집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밤이 늦도록 떠나지 않는 이들에게 가을밤은 풍경은 물론 코 끝에 닿는 특유의 향까지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어제까지 머뭇거렸던 그도 과감하게 사랑한다 고백을 해보고 항상 걱정에 잔소리만 하시는 부모님께도 오늘만큼은 가볍게  '생각이나서'라고 전화를 걸어봅니다. 가을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쉴 새 없이 깔깔거리는 친구들, 조금만 움직이면 혹 맞닿은 어깨가 떨어질까 벌써 한참을 저 자세로 있는 연인, 저처럼 혼자 나와 가끔 셔터나 누르며 감상에 빠져있는 듯한 그의 뒷모습까지. 그렇게 각자의 방법대로 있다 보니 금방 밤입니다. 이대로 아침까지 있고 싶지만 바람이 꽤 차갑습니다. 금방 겨울이 될 것 같아 벌써 서운하네요. 함께여서 좋고, 혼자여도 즐거운 이 가을밤의 낭만이 참 좋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개쯤 챙겨두고 필요할 때 꺼내고 싶을 정도로요.



같은 풍경을 마주 보며 한,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그 고백. 하지만 이 계절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나를 매료시킨 가을, 벌써 헤어질 걱정에 서운해 :(



아침 기온 10도 내외, 낮기온 20도 안팎.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사랑스러운 날씨를 우리는 봄과 가을, 일 년 중 절반의 시간이나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기온에도 봄과 가을의 느낌은 분명히 다릅니다. 한겨울 강추위를 견딘 후 만난 봄에게 우리는 따뜻하고 포근해서 좋다고 하고, 긴긴 여름의 무더위 끝에 만나는 선선한 가을을 선물처럼 반가워하죠. 여유에서 그리움까지, 가을만이 줄 수 있는 감흥들은 그 기다림의 차이가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을이 오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제가 여름내 미뤄놓은 것들을 시작해야 하고 꼭 한 번은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이나 인연이 시작되곤 했거든요. 하지만 어느 계절보다 바쁜 이 날들이 겪어보면 단연 가장 여유롭습니다. 같은 24시간씩을 받아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을은 빠르고 또 느린 계절입니다. 시원하며 따뜻한 날들입니다.


오늘도 틈 나는 대로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 쌓인 가을들을 줍습니다.

역시나 저는 이 계절이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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