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李家煥
이가환李家煥
이가환은 역사교과서에 짧게 몇 줄 나올 거라고 생각돼.
신유박해에 처형당한 천주교도 정도로.
하지만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지.
자신을 천재라고 여겼던 茶山이 "자찬묘지명"에서도 이가환을 천재라고 썼어.
자신을 대단한 학자로 여겼던 正祖도 이가환을 "貞學士"라고 불렀지.
왜 정학사냐 하면 이가환선생의 號가 貞軒이거든.
또는 錦帶라는 호도 썼어.
이가환선생은 수학의 천재였다고 하더군,
내가 찾은 기록을 보면
李家煥 略傳*1>
[문과] 정조(正祖) 1년 (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7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47년 (177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위
1742년(영조 18)∼1801년(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익(瀷)의 종손으로 용휴(用休)의 아들이며,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았다.
1771년(영조 47)에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0년에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에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
을 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서학입문서와 《성년광익 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교리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그뒤 대사성·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입국사건에 연루,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여 1801년(순조 1)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으며,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그 자신이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가 있다.
그의 부친은 在野文衡으로 불렸던 혜환 李用休선생이다.
천재집안으로 이름 높았던 여주 이씨 문중으로
星湖 이익의 종손이며,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일가이다.
이삼환, 이목환등이 육촌, 팔촌이다.
특히 이가환의 일가들이 정릉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릉 이씨라고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 목민심서"라는 사극을 하면서
이가환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재능을 우리나라에서는 쓰지 못하고 처형한 것이
무척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인 집안으로서 정치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재능이 있었지만 벼슬살이를 단념하고
진사로서 전업작가의 길을 택했고
아들은 대과 급제 후 채제공을 이을 남인의 영수이었으나
공조판서에서 충주목사로 좌천되고 정조 사후 순조 1년
기유박해때 순교한다.
그의 산문은 단아하면서 절묘하다.
담백하고 깊이 있는 산문이다.
시대가 그의 재능을 질투한 느낌이다.
만약 노론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가 생각나는 밤이다.
주*1>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