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5

-나덕헌장군羅德憲將軍

by 우인

나덕헌장군羅德獻將軍


나덕헌 장군도 이괄을 연구하다 알게 된 무인이다.

생애가 드라마틱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리 긍정적인 인물로 나오지 않지만 어찌 되었던

한번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내가 찾은 기록에는

羅德憲將軍略傳


조선 통어사(統禦使).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엄(莊嚴).

1603년(선조36) 무과에 급제, 2년 후 선전관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의 심양에 다녀왔고, 1628년봉산군수,

1631년 길주목사로 있다가 덕천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 창성부사 의주부윤을 지내고, 다음해 춘신사로 다시 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을 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 있어 황제참칭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들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를 받고

삼도 통어사에 특진, 1639년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나주나씨


나덕헌(羅德憲)

나주나씨 1573(선조 6)˜1640(인조18)

조선의 무신. 시호는 충렬(忠烈),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이성 현감(泥城縣監) 사침(士沈)의 아들. 1603년(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

2년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後金)의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1628년 봉산 군수(鳳山郡守), 1631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있다가

덕천(德川)에 유배(流配)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인조13)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이듬해 춘신사(春信使)로 또 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太宗)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賀禮)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 있어 황제 참칭(皇帝僭稱)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斥和論者)들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겨우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白馬城)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받고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에 특진, 1639년(인조17) 사임하고 나주에 돌아갔다.


나덕헌(羅德憲)에 대하여

1573(선조 6)∼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나주.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사침(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는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하여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에는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였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하자,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때 우리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하였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하여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 하여 논핵하였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상이 나덕헌 장군의 일대기인데, 앞서 이확장군처럼 심양에서

청 태종에 항거하였고 죽을 뻔 하다가 유배된 끝에

삼도통어사로 입신양명 했다가 조용히 은거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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