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했던 퇴사 / 회사 밖으로 나와 처음 배운 것들
안정적인 커리어를 내려놓고 처음 마주한 질문.
"앞으로 최소 40년을 더 일해야 한다면,
나는 이 일을 하며 계속 즐거울 수 있을까?"
강남구 취·창업 프로그램의 한 강연에서 들은 질문이었다.
나는 패션을 전공하고 일하기까지 5년,
이후 AI 스타트업 업계로 전향해 또 5년을 보냈다.
시대를 잘 탄 덕분이겠지만,
비전공자임에도 운이 좋게도 빠르게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고,
전공자들을 제치고 최연소 팀장을 달기도 했다.
여느 IT 서비스가 그렇듯
AI 산업은 24시간 돌아간다.
새벽출근과 반복되는 오버워크.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프로덕트 방향성,
명확한 기준 없이 오가는 회의들.
성장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분위기.
나는 일이 곧 삶이고, 커리어가 곧 나 자신이라 생각해 왔다.
'내 것'처럼 일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토록 비효율적인 구조가 당연시되는 걸까.
오버워크가 싫은 게 아니었다.
비효율이 내 코털을 건드렸다.
브랜딩과 제품 전략의 본질을 처음 체감했던 건 유럽에서였다.
겉으로 보기엔 느려 보이는 그들의 과정엔,
분명한 이유와 순서가 있었다.
그 시간들은 하나의 비전으로 수렴되었고,
그 비전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리됐다.
속도는 느릴 수 있어도,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달랐다.
매일 방향이 바뀌었다.
당장의 매출이 더 중요했고,
전략 없는 속도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퇴사했고,
무계획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퇴사 직후 LA행 비행 편을 끊었다.
그간 미뤄두었던 발레 수업을 다시 시작했고,
사두기만 했던 책들을 펼쳤다.
못 만났던 사람들과의 약속도 하나씩 채웠다.
그리고 엄마의 책 출간을 도우며
오랜만에 함께하는 시간도 누릴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따로 해보려 한다.)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 생각했지만,
이 조용한 공백의 시간엔
인스타그램이 꽤나 피로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내 시간을 도둑질하던 SNS 앱들과 과감히 작별했다.
(계정 삭제까진 못 했고, 일단 앱만 지웠다.)
가장 이른 시기에 커리어 안정기를 맞았던 내가,
모두가 안정기에 들어설 즈음
불안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무직의 시간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되묻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프리랜서, 1인 사업가, 디지털노마드,
학원 교사, 강연자, 나노 인플루언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하나의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고,
9to6의 삶에 갇히지도 않았다.
과거의 나는 그런 삶을
'덜 진지하다'고 여겼다.
9to6의 삶만이 숭고하다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재정적인 불안감도 쉬운 건 아니었다.
일찍부터 큰 목표 없이 모아 온 돈.
결혼을 하든, 집을 사든 언젠가는 쓰겠지 싶었던 돈이었다.
그 돈으로
수입 없이 1년간 먹고, 자고,
이후엔 사업 자금으로 투자하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미리 모아둔 돈 덕분이었고,
그 점에 대해선 감사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시간은
그 자체로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 소비습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 월급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얼마나 스트레스성 소비에 익숙해져 있었을까?
얼마나 '버티기 위해' 무언가를 사고 있었던 걸까?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며
그 돈을 '삶'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버티기 위한 소비'가 아니라
'살기 위한 사용'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앞으로 40년을 더
AI 프로덕트 매니저로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물론 AI 산업은 지속 가능할 것이고,
나의 커리어 역시 수요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내 즐거움은 지속 가능할까?
대답은 NO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브랜딩의 가이드라인을 잡고,
내가 진짜 만들고 싶은 것을 구체화했고,
지금은 '창업'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확신한다.
그 공백의 시간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다.
무직의 시간은 공백이 아니었다.
'흘러 떠내려가던' 나의 시간과 행동을 붙잡고
본질을 탐구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을
어느 누군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