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un Leymet Mar 21. 2021

프랑스 마미, 한국 할머니

그리고 나의 할머니 (글쓴이 사진)

                엄마가 난생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셨다. 겁이 많은 엄마가 국제 미아가 될 것을 각오하고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건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때 난 보름이나 일찍 시작된 첫 출산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시어머니는 이사 갈 집을 보고 다니셨는데, 이 날 본 집을 계약하셨다. 난생처음으로 두 분이 할머니가 되던 날이었다.






            나는 어릴 적에 열성 경기를 스물다섯 번을 했단다. 별에 별 검사를 다 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하루에 연거푸 몇 번을 쓰러져서, 엄마와 아빠가 멀리 대학병원 근처에 여관을 잡아놓고 주무신 적도 있으셨단다. 혹시 또 쓰러지면 바로 병원에 데려가려고. 열성 경기를 하는 아이들은 통계상, 대게 일생에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물다섯 번을 했으니, 엄마가 '제 명에 못살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하시던 게 그냥 나오던 말은 아닌 게 분명하다. 사실, 열성 경기는 만 대여섯 살이 되어 아이의 뇌가 열에 더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만큼 성장하면 멈춘다. 부모님께서 이 사실만 아셨어도 좀 더 일찍 한시름 놓으셨을 텐데, 그때만 해도 경기를 오래 하면 간질이 된다는 둥, 잘못하면 죽기도 한다는 둥,  부모님을 두렵게 하는 추측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내가 다 커서도 수시로 내 코 밑에 손을 대보셨다.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 아직 이유가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유전성일 가능성이 높다고는 한다. 좋은 것만 가져가라고 했더니, 내 큰아이가 나만큼 경기를 했다.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하면 나는 일주일씩 밤을 새웠다. 불가능했지만 가능하도록 온 몸을 쥐어짜며 악을 썼다.


            나의 엄마에게 내 딸 두는 아련하고 짠한 존재이다. 경기를 하는 두를 보면서, 지금 내 나이보다 젊었던 엄마가 약해 빠졌던 어린 나를 키우던 때가 많이 생각나시는 것 같다. 두가 태어나고 산후조리를 해주시겠다고 다녀 가시고 나서 엄마는 두가 보고 싶어서 매일마다 몰래 우셨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보고 싶어서 우셨다고 했지만, 매일마다 맡던 두의 아기 냄새가 코에서 흐려지고, 퉁퉁 부어 짜증만 내던 나의 모습이 간신히 잊혀 질 때까지, 엄마는 과거의 자신과 억지로 마주 대해야만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두가 태어나자마자 열이 조금 있다면서 간호사가 아기 머리 밑에 시원한 아이스팩 같은 걸 베개처럼 넣어줬다. 열성 경기로 그렇게 고생을 했다면서, 그때만 해도 나는 열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열이 내리면 빼주라는 말도 없었고, 열이 나는지 수시로 체크하란 말도 없었다. 간호사는 매우 태연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아무 의심 없이 태연했다. 밤새 두는 그 차가운 팩을 머리에 대고 생에 첫날밤을 보냈다. 한 친구가 그랬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아기도 어른처럼 하루에 세끼만 먹는 줄 알고 우유를 세 번만 먹였단다. 천성이 순했던지 아기가 울지도 않고 잠만 잘 자서 우유를 더 먹여야 하는지 몰랐단다. 이래서 엄마들은 첫 아이에게 미안하고 짠한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서툰 나를 보며 엄마는 멀리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저것들을 어쩌나 싶으셨겠지. 두가 조금만 아프기라도 하면, 내 엄마는 내가 어린 두를 끌어안고 밤을 지새울걸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셨다. 엄마는 나를 통해서 젊은 시절의 엄마를 봤던 것 같다.


            멀리 한국에서 엄마는 첫 손녀에게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신다. 두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한국 면이 좋다며 기저귀부터 이불까지 모든 걸 보송보송한 순면으로 장만해 오셨다. 조기를 잘 먹는 아이들을 위해서, 얼린 조기를 냉동실이 꽉 차도록 들고 오시거나 나에게 들려 보내셨다. 아이들은 조기를 할머니 물고기라고 부른다. 냉장고에는 속 더부룩할 때 먹으라고 보내주시는 매실액과, 두가 좋아하는 오미자 액이 떨어질 날이 없다. 엄마의 매실액이 떨어지는 날이 없는 이유는 이래서이다 : 참 희한한 일이지만, 프랑스의 약국에서는 아이들 용 소화제가 없다. 내가 설명을 잘 못했나 싶어서 몇 번을 가서 아이들용 소화제를 요구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어린아이들은 소화불량이 없어요. 장염과 같이 뭔가 다른 병에 걸려서 배가 아플 수는 있어도 소화가 안돼서 배가 아플 일은 없어요. 만약 있다고 해도 약을 먹이는 건 좋지 않아요. 그냥 두면 돼요. 별 것 아니에요*."


뭐 이런 식의 대답이었는데, 그러면 난,

    '저는 체하면 아파서 난리 칠 거면서 그냥 두라니! 열일 제치고 얼른 소화제부터 찾을 거면서!'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엄마에게 두의 탄생은, 엄마가 나에게 했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엄마는 맞벌이를 하며 나를 키워서 내가 경기를 많이 했다고 믿었는데, 전업주부인 나를 통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두가 경기를 하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 같다. 그러면 마치 과거가 지워질 듯이. 두가 울면 엄마도 가슴으로 우신다. 내가 두에게 엄하게 할 때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서 두통약을 하나 털어 넣으신다. 엄마에게 두는, 건강만 해달라고 기도했던 나이며, 동시에 후회가 많은 젊은 날의 당신이다.






            시어머니는 두가 태어나고 몇 년 동안 직접 뜨개질을 하셔서 뜬 옷을 수시로 보내주셨다. 채우기는 어려웠지만, 항상 모양이 예쁜 단추를 달아주셨고, 어딘가엔 꼭 두의 이름을 수놓아주셨다. 어릴 적 남편의 옷에 모두 이름을 수놓아주셨다고 하더니, 두의 옷과 인형에도 수를 놓기 시작하셨다. 두가 태어날 때부터 시어머니는 자신의 추억을 소환하셨다. 가장 먼저, 남편이 아기 때 입던 옷과 두두**를 물려받았다. 시댁에 갔더니 남편이 아기 때 쓰던 아기 침대가 올라와 있었다. 침대에는 남편이 가지고 놀던 갖가지 동물 인형부터, 두가 딸이라고, 시누이가 쓰던 공주 이불도 덮여 있었다.


            시댁에 갈 때마다 두는 아빠의 어릴 적 장난감을 하나씩 받아가지고 왔다. 두가 이가 빠질 때 즈음엔, 도자기로 된 작은 하트 모양의 함에 보관해 두셨던 남편의 젖니를 보여주시면서 잘 보관하라고 날 주셨다. 두가 학교에 들어가서 필통을 챙겨 오라고 했을 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들고 다니던, 연필 깎기, 연필, 지우개 등이 고스란히 든 필통을 두에게 물려주셨다. 프랑스에는 어버이 날 대신,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는데, 어머니의 날에는 남편이 어렸을 때 엄마에게 꼬물꼬물 썼던 편지나 만들기 한 것들을 주셨다. 두와 덩이는 아빠가 자기들 나이만 할 때 만들었던 낡은 종이 왕관을 쓰고, 아빠가 유치원에 갈 때 매던 곰인형 가방을 맸다. 덩이는 아빠가 난생처음으로 받았던, 이제는 멈춰버린 시계도 물려받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시계를 볼 줄 몰랐기에 더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두는 얼마 전부터 학교에서 곱셈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어릴 적에 곱셈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 함께 하시던 곱셈 보드게임을 수십 년 만에 꺼내서 두와 함께 하셨다.


            난 두에게 편하게 바지만 입히거나, 살에 거칠지 말라고 면 옷만 사서 입혔는데, 시어머니는 예쁜 치마에 블라우스와 스타킹을 사서 보내셨고, 내가 편하게 질끈 묶어준 머리에 헤어밴드를 해 주시거나, 양갈래로 땋아주시거나 하셨다. 부활절, 할로윈, 생일,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어보지도 못한 초콜릿과 알록달록 군것질을 보내 주셨고, 음료라고는 물밖에 모르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셨다. 시어머니 댁에 가면 아이들은 슈퍼에서 사다가 쌓아 놓으신 사과주스를 원 없이 마신다. 난 아이들에게 디저트를 잘 먹이지 않는데, 시어머니는 건강하게 골고루 먹어야 한다며 설탕과 버터가 골고루 들어간, 아이들이 좋아하는 단것들을 열심히 내놓으셨다.


            나에게, 아이들이 건강한지 물어보실 줄은 잘 모르시지만, 아이들에게 직접, 행복한지를 물어보신다.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으라고는 하시지 않는 대신, 엄마, 아빠가 너희들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신다. 책을 좋아하는 두가 읽는 어린이 용 탐정 소설책을, 두가 잠든 동안 밤새 읽으시면서 그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외우시고, 두와 함께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신다. 두가 글씨를 배워서 읽고 쓸 줄 알게 되자, 편지지와 편지 봉투, 그리고 우표를 한 묶음 사주셨다. 두는 마미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루는 덩이가 아침부터 일어나서 마미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하니까, 글을 모르는 덩이가 부르는 대로 두가 받아 적어서 둘이 함께 편지를 완성했다.

    '마미, 난 마미를 너무 사랑해. 글씨를 쓰는 사람은 두야. 이 편지는 마미를 위한 편지이고, 나는 마미를 사랑해. 이 편지는 덩이의 편지야. 덩이로부터.'

라는 짧은 편지가 편지지 한 바닥 가득 쓰여 있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방법은 제각각 다르다. 목숨을 내어 줄 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그만큼이나 존엄한 이를 대하는 것이니만큼 그 방식에도, 통일된 성스러운 방법이 있어야 맞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참 흥미롭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자신의 개인의 역사를 아울러 상대에게 사랑을 준다. 시어머니가 내 아이들에게 당신 아들의 물건을 물려주듯이, 나의 엄마가 두를 보면서 짠한 마음을 떨칠 수 없듯이, 우리는 제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삶을 오롯이 껴안고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역사가 통째로 들어있는 이들의 사랑에는 깊이가 있다.


            하루는 나의 외할머니께서 그러셨다.

    "미선아, 할머니는 자식이 아홉이지먼, 자식이 많다고 혀서 누구 하나 소홀하게 키우지 않었어. 아홉 남매 누구 하나라도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키웠지. 손가락 하나하나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읎잖여. 그니께, 엄마가 명절 때 오기 싫다고 혀두,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한다고 네가 꼭 데리고 와. 알었지?"


            충청도 토박이 외할머니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지만 항상 느긋하셨고 얼굴은 항상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농사 지으신다고 굵게 자리 잡은 주름도 할머니의 미소를 덥지는 못했다. 내가 대학생 때 하루는 갑자기 할머니께서 집에 오셨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 댁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 댁과 우리 집을 서로 오가며 나를 많이 돌봐 주셨었다. 그러나 도시를 바꿔 이사를 가면서, 할머니가 집에 오셨던 적은 기억에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문이 더욱이 갑작스럽고 놀랍게 느껴졌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생전에 일 년에 한 번씩 당신의 아들, 딸의 집을 돌아가며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사는 게 전쟁이라고, 삶에 치어 사는 아홉 자식들을 보면서 해 주실 말씀이 많을 법도 한데, 할머니는 길게 설명하시지 않으셨고, 엄마, 아빠에게 이렇다 하게 당부하시는 말씀도 없으셨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소리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있는 듯 없는 듯 하루를 주무시고 가셨다.









*스파스 퐁이라는 약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약은 소화제라기보다는, 위장장애를 동반하고 열이 나는 경우에 복통을 해소하고 해열을 하는데 쓰이는 약이다. 진통, 해열제라고 보면 된다.

** 애착 인형. 두두( le doudou)는 프랑스어로 두 가지를 뜻한다. 천이나 털로 만들어진 인형을 총칭하여 지칭하기도 하고, 애착 인형을 뜻하기도 한다. 애착 인형의 경우, 천이나 부모의 티셔츠 같은 것들이 애착 인형을 대체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대부분 출생과 동시에 애착 인형을 갖는데,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서 평생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