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치아(베니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베네치아가 보고 싶어 선상으로 올라갔다. 멀리서 보이는 인공도시 베네치아는 마치 수중궁처럼 신비해 목의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리듯 내 가슴도 펄럭거렸다. 배에서 내려 먼저 도착한 꽃의 성모 대 마리아 성당에 성호경을 긋고 단테의 생가가 있다는 곳으로 갔다. 바닥의 돌에 새겨진 단테의 얼굴은 물을 받아 반짝였다. 바닥에 물을 뿌리지 않으면 단테의 얼굴이 잘 안 보여 관광객이 지나가다 그의 얼굴을 밟을 수 있어 살짝 염려도 됐다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로 유명하며 도심 내부에는 자동차 도로가 없다. 이동수단은 수상택시나 수상 버스뿐이다. 그중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사람만 노를 젓는다는 곤돌라를 탔다. 동승한 가수의 노래를 듣는 건 꽤 낭만적이다. 건물 사이사이를 돌면서 오 솔레미오( O sole mio, 나의 태양)를 부르는 가수의 노래에 관광객 모두 따라 불렀다. 내가 좋아했던 지금은 고인이 된 파파로티가 이 노래를 부르는 착각에 따라 부르는 목소리가 잠시 잠겼다. 가수의 목소리가 나에겐 파파로티의 음성처럼 들려 곤돌라를 타는 이런 호사에 같이 못 온 가족에게 조금 미안했다. 빡빡한 일정으로 건축물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마르코 광장 한복판에서 사방에 있는 건축물을 감상했다. 광장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꼭 그 시절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옛것을 눈에 익히느라 그 맛있다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 것과 르네상스에 큰 기여를 한 메디치 가문의 궁이었던, 지금은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하는 곳에 들어가지 못한 건 조금 후회가 되었다. 낮의 베네치아보다 밤의 베네치아는 더 낭만적일 것 같아 이곳의 밤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다시 고대해본다.
교황님이 계시는 바티칸으로 가는 아침엔 비가 내렸다. 좋아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선생님 앞에 가는 것처럼 입장하는 내내 긴장됐다. 죄에 대한 꾸중도 들어야 하는 두려움과 나의 서글픔에 위로도 받고 싶었다.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높은 벽을 올려다보며 나는 무엇을 용서받을까 생각했다.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정교함과 웅장함을 보자 그것을 누워서 그렸을 그의 피나는 예술혼에 경외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곳을 더 보고 싶었지만 계속 들어오는 관광객에게 양보하듯 나와야 했다.
성인 베드로가 묻힌 베드로 성당이 보이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중간중간 설치된 고백소는 바라만 보는데도 고백성사를 받은 것처럼 후련했다. 나는 사람이 덜 모인 기도대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대엔 기도하고픈 내용, 즉 기도의 목적을 작성 후 넣는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구멍을 쳐다보며 “주님 이렇게 좋은데 더 무엇을 바랍니까”라고 말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이 구멍 속으로 떨어지자 순간 먼저 간 남편 베드로가 생각났다. 마지막 가는 그에게 인사도 못 했는데 그 기도대가 나에겐 남편의 관 같았고 구멍으로 흘러간 내 눈물을 받은 그가 웃고 있다는 착각에, 안도감과 기쁨의 눈물이 났다. 15년 만에 나는 그를 완전히 묻었다.
베드로 성당을 나와 여행자의 모임 장소로 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보였다. 각 처소에 목례를 하며 십자가의 길을 끝내려 했는데 마지막 처소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모임 시간이 촉박해 그 마지막 처소 찾는 걸 포기하고 약속 장소로 달려가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은 십여 분 동안 바티칸 궁전 옆에서 길을 읽은, 일행인 할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내 옷자락을 잡고 다니셨던 할머니가 안 보여 걱정이 되었지만 십자가의 길을 끝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책하고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그때의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그 하늘을 보자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마지막 처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이 또한 부활하신 장소이듯 그걸 믿는 내 마음이 마지막 처소라는 걸 10분의 침묵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남편 베드로는 묻혔고, 오늘 그를 기도대에서 만나 마음의 부활을 했으니 나의 믿음이, 깨달음이 나에게 마지막 처소인 것이다. 한참 만에 나타난 그 할머니는 울먹이며 나에게로 오셨다. 나는 그녀를 꽉 안아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