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도 나름 쓸 데가 있나 보다.

막상 닥치니 별 것 아니더라.

by 정여사

지난번에 불안에 대하여 글을 썼는데, 어제 결국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집을 여는 순간 은신처에 똥오줌을 싸기에 녀석을 남편에게 맡긴 뒤, 은신처를 씻으러 갔다. 나오는 길에 녀석이 남편 손에서 벗어나 방바닥을 맹렬하게 기어가는 것을 본 내가 잽싸게 달려가 일단 앞을 막아섰지만, 내 손을 가볍게 뛰어넘고 번개 같은 속도로 소파 밑으로 사라졌다.


잽싸게 엎드려 소파 아래를 보니 마음만 잽싸고 몸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인지, 이미 종적을 감춘 상태. 소파 뒤에는 큰 책장이 늘어서 있어서 아주 제대로 망한 상황이었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간 두려움에 온갖 탈출 시나리오를 짜왔고, 이 상황도 내 시나리오안에 포함된 내용이었으며, 유튜브에서 탈출한 도마뱀을 찾는 방법에 대해 충분히 숙지한 상태라 생각보다 충격과 좌절이 크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본 탈주범 검거 사례 중에는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발견된 녀석도 있더라.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다. 쇼크사하지 않는 이상에야 물만 여기저기 놔두면 한 달간은 어떻게든 살아 있으리라. 그 안에 잡으면 된다.


...라고 머리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남편과 나는 시체가 된 녀석을 보는 것이 두려워(아까 괜찮다며?)그 많은 책장의 책을 다 빼고 책장 뒤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결론은? 없었다.


이왕 책 꺼낸 김에 책장 정리를 하기로 했다. 이 도마뱀이 2년간 벼르기만 한 일을 하도록 만들었네. 효자잖아?


바퀴 달린 커다란 박스형 장바구니로 4번을 왔다 갔다 하며 책을 버렸다. 정리가 끝내고 피곤에 찌든 몸을 씻은 뒤 온 집의 불을 껐다.


"한 달 까진 어떻게든 살아있을 거고 3일 정도면 목이 말라서 물 찾으러 기어 나올 테니 천천히 기다리자."


나에게, 남편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나와 주방으로 향한 남편이 녀석을 발견하고 나를 불렀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주방 발 매트 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어라? 이렇게 빨리? 녀석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도 가만히 있었고, 의외로 순순히 잡혀 주었다. 녀석을 집 안에 넣고 나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고?


정말 사서 걱정했구나 나는.


나는 허허 웃으며 녀석에게 밥을 준 후 그간 장바구니에 담아만 뒀던 아이템을 구매했다. 그것은 바로 1인용 모기장 텐트. 도망치는 것이 겁나면 모기장 안에 들어가서 둘다 갇힌채로 만지면 되는데.이 해결 방법도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이제 녀석은 날 두렵게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두려운 상황을 겪었고, 해결했으며, 더 나은 해결책을 마련했다. (라고 자신에게 세뇌하는 중이다. 사실 아직도 좀 무섭다.)


한 줌도 안 되는 도마뱀을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결국 그것도 나름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안 아파도 다가올 계절에 창궐할 독감을 대비하여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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