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방문 실시!
대망의 가정방문 날. 그러니까 처음으로 그 애의 집에 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 생일이었다.
그 애는 불안해 하면서도, 험한 길 혼자 올까 걱정돼서 전 날부터 2시간동안 전철을 타고 새벽같이 나를 데리러 와 줬다. 물론 차로 가도 괜찮았겠지만 내가 말렸다. 여차하면 차가 아니더라고 가는 길을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네가 아프다던지 하는 그런 긴급 상황을 위해서.
꽤나 시골 구석진 곳에 있는 직장과의 거리를 고려해서 그 주변에 살던 그 애는 교통카드 리더기가 없어 현금으로 표를 사야하는 역 근처에서 살았다. 그 역 역시도 산길을 걸어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가 있었지만 날이 좋은 봄날이어서 같이 걷기로 했다. 손을 잡고 걸었다. 그 애는 설레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우리 누가 보면 그냥 예쁜 커플이다. 그치?"
참고로 아직 썸이었다. 사귄다고 땅땅 선언한게 아니어서 서로 애매하게, 이 거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오래도록 망설였을 때였다. 나는 깍지 손을 끼고 앞뒤로 팔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정말 예쁜 커플일까? 선선하고 따뜻하게 부는 봄바람에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차가 많이 다녔고 길은 비탈졌다. 흙과 돌이 많았지만 가는길에 탁 트인 산 전망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그곳이 참 예뻤다. 20여년 평생 서울에서 살던 내가 처음으로 시골에서 살아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은 아주 깨끗했고, 짐이 많이 남아있다는 말에 비해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그냥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 아주 깨끗하고 번듯한 집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얘는 밥 빼고 다 잘 한다. 정말 깔끔하고 똑부러지게 잘 산다. 손재주도 좋다. 정말 부엌일 빼고는 다 할 줄 아는 애다.
애초에 그 사람의 짐은 쓰지 않는 방에 전부 몰아두었다고 했다. 거실과 미닫이문으로 분리된 방이었는데, 사실 그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평범한 벽인줄 알 정도였다.
"보면 기분이 좋진 않을테니까... 열어보진 말아. 알겠지? 약속."
"응 약속."
미안하다. 네가 화장실 간 틈에(그 애는 화장실이 길다. 유튜브좀 그만 봐라 이양반아.) 슬적 미닫이문을 열어 봤다. 깨끗한 침대와 아이 장난감, 문제집이 몇 권, 그리고 책장이 두어개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모르는 그 애의 추억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싫다는 마음 보다는 이상한 마음이 더 컸다.
그 날 저녁은 처음으로 남의 주방을 썼다. 남의 냉장고를 죄악감 없이 열어보기도 했다.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흰 밥과 냉동 인스턴트,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식자재들이 가득했다. 밥을 제대로 해 먹는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이러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럼 전에 같이 살던 사람이 밥을 해 줬던 걸까.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오늘 맛있는 거 먹자!"
끝내주는 스테이크를 구웠고, 쌀을 불려 빠에야를 했다. 생일 케이크에 꽂은 초코 플레이트를 엎어 흐릿한 이름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헤프닝도 있었다. 너무 즐거웠다. 일주일 정도 먹을 반찬을 몇 개 만들어 냉장고를 채워놨다. 다음주에도 오고 싶다, 그 다음주에도 오고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저녁은 평호로웠고, 아주 행복했다. 평범히 상대방의 집에 놀러가 두근두근 시츄에이션을 맞은 풋풋한 커플이었다.
다음날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