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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두파타를 쓴 소녀

파키스탄 편

by 미야

어느 날, 오래전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 갓 지난 시절, 저는 대학생일 때 파키스탄을 한 달 넘게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저 미숙했던 젊음이 데려간 낯선 곳이었습니다. 같이 간 친구의 인연으로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의 어느 부유한 한 신혼부부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파키스탄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종교 갈등 끝에 인도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입니다. 인종과 언어도 굉장히 다양합니다만,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는 이슬람의 질서가 깊숙이 스며 있었죠. 그 집주인 부부는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었어요. 그들의 눈빛에는 낯선 이방인을 향한 경계보다 따스한 환대가 더 먼저 묻어났습니다. 새댁은 갓난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저를 볼 때마다 항상 따뜻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부부는 우리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그 문화의 독특하면서도 융숭한 접대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신경 써 주었고, 감사하게도 어디 한 군데 불편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 집은 상당히 부유하다고 느껴지는 화려한 2층집이었습니다. 바닥에는 아름다운 중동 문양의 카펫이 군데군데 깔려 있었고, 이국적인 찻잔과 식기들이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전통의복 문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살와르 카미즈라고 부르는 아름답고 형형색색의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습니다. 특히 두파타라는 긴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곤 하는데, 반투명한 쉬폰이나 실크느낌의 재질이 많습니다. 살와르 카미즈는 기성품보다는 한복처럼 체형별 맞춤 제작을 해서 주로 입는데, 저는 당시 그 스타일에 홀려 몇 벌을 맞추어서 입고 다녔습니다. 화려한 색감과 비즈, 은사, 금사로 장식된 패턴의 두타파는 머리에 살짝 걸치거나, 한쪽 어깨에 흘러내리듯 걸치지요. 저는 화려한 금사보다는 단아한 자수가 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동아시아인인 제가 그들의 전통복장을 입고 다닐 때마다 이색적이었는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곤 했답니다.

집안에서는 두파타라는 스카프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에는 머리와 목 전체를 가리는 검은 천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 집에서 그 아이만 엄격한 이슬람 문화를 지키는 듯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나이는 열 살쯤 되어 보였습니다. 피부는 검고, 눈빛은 수줍었습니다. 제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그 여자아이가 늘 손에 놓지않고 들고 다니던 싸리빗자루. 그걸로 카펫 위로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본인도 아직 어린데 갓난아이를 안아서 돌보고, 잡다한 일을 쉬지 않고 이어갔죠.


외국인인 제가 신기했는지 호기심 어린 곁눈질로 훔쳐보며, 수줍은 미소를 짓다가도 제가 쳐다보면 숨어버렸습니다.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곁을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느새 제 시선에 다시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집 안주인의 갓난아이보다 저는 이 큰 아이가 애틋해서 더욱 애정이 갔습니다.


제가 다정히 다가려고 할 때, 그 아이가 수줍어하고 있으면 아기 엄마는 저와 갓난아기에게 보여줬던 미소와는 전혀 다르게도 무서운 표정을 짓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습니다. 소녀는 애 엄마의 표독한 목소리에 곧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을 마저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 아이가 단순히 집안의 첫째 딸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참 철이 일찍 들었구나. 나이에 비해 많은 일을 하네.’ 그 정도의 감상뿐이었지요. 어린 나이에 묵묵히 일하는 그 아이에게 가능한 한 따뜻한 미소를 주고 싶었습니다. 다가가 말을 걸면, 아이는 말 대신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아이의 목소리를 거의 들은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단지 그것이 낯선 외국인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 여겼습니다.


그 소녀는 밥 시간이 되면 어른이 음식 차리는 것을 도왔습니다. 고사리 손으로 들고 온 음식들이 바닥에 차려졌습니다. 그들의 전통식사는 바닥에 식기를 깔아놓고 손으로 '난'이라고 하는 빵이나 쌀밥을 먹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그들의 문명 수준이 낮아 수저 포크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다'라며 그들의 문화를 폄하하는 이도 일부 있었지만, 저는 남의 것을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내리는 선입견은 무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남의 문화와 생각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해 왔지요. 다 알고나서 판단해도 늦지않으니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음식문화의 진실은 제가 한국에서 듣던 것과는 좀 달랐습니다. 집에서 수저나 포크를 이용하지 않고 바닥에서 음식을 먹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손끝과 손바닥으로 신성한 음식의 온기와 질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음식을 손으로 직접 느끼면서 그 음식이 가진 에너지와 연결되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식탁이나, 상을 쓰지 않고 바닥에 앉아 식사하는 것은 땅, 대자연에 최대한 가깝게 닿아 음식의 근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아리콩을 갈아 만든 걸쭉한 소스인 '차나 마살라'나, 고기에 곁들인 커리를 흩어지는 쌀밥에 잘 치대서 손으로 먹으니 처음엔 참 어색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소중한 음식의 에너지를 내가 취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며 간질간질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무슬림들은 신성한 오른손만을 사용하여 밥을 먹습니다. 저는 그들을 따라 오른손에 묻은 소스를 입으로 쪽쪽 빨아먹기도 했고요. '난'을 아주 작게 뜯어서 소스를 묻혀 먹는 것도 맛있었습니다. 수저를 사용하는 저에게 있어 그들의 음식문화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음식에 대한 그들만의 고유한 정신과 철학은 제 맘 속에 담아 온 것 같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밥 먹는 자리에 두파타 소녀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가족들과 음식을 함께 먹지 않고 멀찍이 바닥에서 단출하게 난을 뜯어먹었습니다. 따로 눈치를 보며 먹는 그 모습을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왜 애 엄마는 첫째에게 저리도 냉정할까. 왜 아이의 자리는 늘 가장 낮은 곳일까. 그 의문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집의 첫째가 아니었습니다. 그 집의 딸도 아니었습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들어와 주인을 거들며 갖은 집안일을 하고 밥을 얻어먹는 아이. 심지어 식사마저 함께 하지 못한 채, 먼지를 털어낸 손 그대로 빵 조각을 뜯어먹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인도에서 분리된 나라지만, 여전히 '카스트'라는 깊게 남아 있는 신분계급의 인습이 살아 있었던 것이죠. 단순한 가난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질서가 그 아이를 남의 집 마당으로 내몰았던 것이 아닐까 싶어 그 장면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그것이 한국의 기억들과 겹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전쟁 직후의 한국,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도시로 올라가 남의 가사를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빨래와 밥을 하고 아이 돌봄을 떠맡던 아이들. 낯선 도시의 부엌 곁, 하루 종일 눅눅한 방에 몸을 구겨 넣던 소녀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밥상은 따로하여 결코 식구가 될 수 없던 존재. 그제야 떠오른 ‘식모’라는 이름입니다.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한창 경제부흥이 되던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던 제 세대는 '식모'가 단순히 가사도우미인 줄만 알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 아이가 식모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박완서작가의 글에 남겨진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작가는 그 기억을 적나라하게 적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잣집에 들어가,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식모살이의 서러움. 밥 짓기와 아이 돌보기에 지쳐도 책 읽고 싶은 갈망을 버리지 못했던 소녀의 심정을요. 『엄마의 말뚝』이라는 책에서는 그 세대, 딸들을 도시에 ‘말뚝’처럼 박아 넣고 어찌 되든 살아남기를 바랐던 어머니들을 그렸습니다.


그러니 20여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갑자기 떠오른 파키스탄의 그 아이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건너도, 시대가 달라도, 가난과 전쟁은 언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몸에 씌워진 어른의 검은 그림자, 웃음을 배우기 전에 노동을 배워야 했던 존재.


이제야 제가 소녀에게 지었던 그때의 미소를 되돌아봅니다. 저는 그저 다정한 손짓을 건넨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가 필요로 했던 것은 다정이 아니라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존재를 사람으로 불러주는 것. 누군가의 딸이나 누군가의 식모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으로서 불려보는 순간.


세상 곳곳에는 여전히 그런 아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인습, 종교에 대해 저는 옳고 그름을 단편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양반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과 몸을 가리기 위해 덧씌워 입던 쓰개치마의 문화가 있듯이 그 아이가 걸치고 있던 검은색 두타파를 단순히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억합니다. 그 집안의 바닥에서 검은 천으로 머리카락과 목을 가린 채 빵을 뜯어먹던 소녀를.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우리 어머니 세대가 겪어야 했던 검고 어두운 식모살이의 풍경을.


이 이야기는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것이 지금의 저를 흔듭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일은, 그렇게 잊히지 않는 얼굴을 불러내어, 다시 사람의 이름으로 되돌려주는 일인지도요. 그 소녀도 이제 삼십 대 중후반이 되었겠네요.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같은 나이일지도 모릅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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