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말

어떻게 그런, 말을

by miya

“시끄러워!”

저녁 열 시를 넘어 십 분이 더 지났다. 그때 올려다본 시계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은 11시를 넘어간다. 12시가 넘지 않은 건 마찬가지고 한두 시간 차이로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는 건 아닐 텐데 그렇게 시계를 계속 보고 있었다.

영화가 1시간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분명 반만 보기로 했었다.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잠깐 멈춰봐. 시끄러워?”

눈이 커지고 어두운 곳에서 TV 불빛은 그의 얼굴을 쏘아댔으나 더 칙칙해졌다.

“엄마가 말 거니까 그렇지!”

평소에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몰입해 소리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서로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는 오가도 어느 정도 지나면 집중할 수 없다며 입에다 일자 검지를 댄다. 조용히 하자고.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시간도 열 시를 넘어가니 훈계할 기운도 없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불러 새우듯 말을 끊었다.

“티브이 멈춰.”

그는 TV를 향해 일시 정지를 누르고 나를 바라봤다.

“말투가 그게 뭐야? 영화반만 보고 나머지는 내일 보기로 했지? 지금 시간 지났어! 안 지났어?”

“이제 끄려고 했어.”

“그럼 멈추고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시끄럽다고 말하는 게 뭐야! 친구에게도 그런 말은 기분이 나쁘지.”

아이는 숨도 쉬지 않는 듯 날 바라보며 멈춰져 있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보란 듯이 못을 박았다.

“왜 이렇게 매너가 없니! 영화 기분 좋게 보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한마디에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양치하는 소리가 들린다. ‘짓’, 이 단어 때문인가. 나도 조금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지 않은 척했지만 그제야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1시간 전만 해도 <연의 편지>를 보며 모처럼 볼만한 게 나왔다고 좋아했다. 다이어트한다고 샐러드에 달걀까지 다 삶아놨는데 그것은 뒷전이고 어제 먹다 남은 닭볶음탕을 꺼냈다. 닭볶음탕의 퍽퍽한 살을 양념에 잘 적셔 흰밥과 함께 입안을 데우니 직장에서 얼었던 다리가 녹기 시작한다. 다 먹고 충분히 배가 부른데 항상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어제 사둔 감자깡 봉지가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 둘은 주파수를 맞추듯 DNA를 꺼내 보였다.

“그래서 감자 깡은 언제 뜯을 건데?”

민이가 먼저 말했다. 생각은 내가 먼저 했을지도 모른다. TV를 틀자는 말이다. 보면서 과자를 먹자는 말이다. 오늘은 미디어를 쉬어갈까 했지만, 목요일은 반 금요일이라며 소파가 둘을 끌어당겼다.

영화의 시작은 푸른 녹음이 짙은 여름, 소녀는 아버지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진다. 소녀를 태운 버스는 익숙한 한국의 시골길로 들어선다. 비포장 길을 지나가는 트럭에 수박이 한가득이다.

“아 보기만 해도 힐링 돼.”

정말 피로를 녹여주듯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나무들이 햇살을 머금고 눈부신 인사를 한다. 소녀는 학폭의 상처를 안고 시골로 전학을 왔지만 와서도 마음이 위축되어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한 편지를 시작으로 다음 편지를 이어 찾다 낯선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가는데 그 과정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아픔을 치유해 나간다.

민의 어깨는 반쯤 앞으로 향해있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가는 아들은 몰입한 것이 분명하다. 애니메이션은 일본이 최고라고만 생각했는데 고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성우의 이름까지 맞춰 늘어놓는데 오늘 반을 보기란 틀린 것도 같다. 이미 약속한 시각이 넘어간다. 영화 시간이 1시간 30분 남짓, 반이니 50분 정도만 보기로 했었다. 시간도 늦었고 그걸 다 보면 사실 내가 괜찮지가 않다. 퇴근하고 보는 영화에 끝까지 몰입하기란 힘들다.

감자 깡은 영화가 시작하는 초반에 동이 났고 한 캔 남아있는 사이다를 가지러 일어나니 그는 자연스럽게 일시 정지를 눌렀다. 닭볶음탕, 감자 깡, 사이다 이런 도미노가 세워지더니 마지막으로 커피 맛 비스킷이 도미노를 무너뜨렸다. 피아노 위에 올려둔 작은 한 봉지 비스킷. 딱 두 개만 들어있는 커피 맛. 나는 민이 보란 듯이 혼자 먹었다. 세상에 이런 기억력은 왜 이렇게 배가 부른 순간이 꽤 지났는데도 발동이 될까. 못내 아쉽다. 미각은 이미 과식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부스럭부스럭 배 위로 과자 잔부스러기들이 떨어진다.

‘아 괜히 먹었어.’

차이는 분명하다. 아이는 재미있는 한편을 보고 싶은 것이고 나는 아이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달고 단 과자에 정신이 팔렸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기준은 달랐던 것이다. 퇴근 후 허기를 채우고 한숨 돌리려 했더니 이런 막말이 덤으로 올 줄이야.

“시끄러워!”

배가 너무 불러서 기분도 개운치가 않다. 싱크대 앞에 섰다. 고무장갑을 끼며 눈을 뜨고만 있다. 처음에 좋았는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물이 흐르는 소리에 기억을 더듬어 간다. 분명 힐링된다는 말까지 했는데…. 혹시 내가 너무 과했나. 그 한마디만 없었다면 평화롭게 영화를 봤다면 오늘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고 잤을 것이다. 그렇게 많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싱크대 앞에 섰다. 마음도 개운하지 않아서 그릇이라도 깨끗하게 씻으면 나아질 것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늘 생각한다. 청소가 제격인데 밤도 늦었고, 오늘은 설거지가 남아주었다. 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고 반질반질하게 씻는데 닭볶음탕 고추장 기름이 내 입술에 튀었다. 아- 어깨로 입술을 닦았다. 싱크대 음식물 찌꺼기가 보기 싫다.

“빨래 널어?”

가습기에 물을 받아서 가는 그가 말을 건다.

“알아서 해.”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가 널 기로 한 빨래는 내 몫이 되었다. 그 대신 마른빨래는 잘 개어서 바닥에 두었다. 혹시 모른다. 내일 그가 정리할지도. 그럼 자연스레 화해가 되는 거다.

아무튼 이제 좀 조용하다. 아직도 소화가 덜 됐다. 하지만 전보다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