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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Feb 15. 2023

초핀은 덕녀다


초핀 알밤양



입꼬리가 올라간 반쯤 벌어진 헤벌레한 입,  초점 없이 멍한 눈.  몸은 내 앞에 있지만 정신은 별나라에서 놀고 있는 상태, 초핀이 상상놀이를 할 때 보이는 모습이다.  

초핀은 꼬꼬마 때부터 상상놀이를 즐겼다. 아침에 느지막이 깨어서도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가 많았다. 뭐 하냐고 물으면 상상놀이 중이란다. 그러다 소근육이 발달하면서부터 그림으로 상상놀이를 이어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그림 한 장을 정성스레 완성하는데 초핀은 상상 속 장면을 재빨리 그것도 많이 그렸다. 애니메이션처럼 떠오른 이야기의 장면들을 그리면서 입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상상놀이가 끝난 자리에는 날리듯 그린 그림 수십 장이 쌓였다. 처음엔 남편 화실의 이면지를 갖다주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A4 종이를 박스채 사서 책상 옆에 놔주었다.  


그냥, 단지 귀여워서 닉네임을 수시로 바꾸는 초핀의 첫 닉네임은 비예뚜였다. 다음에는 역시 뜻 없는 예싹, 나싹에 이어 지금은 초핀이다. 이뻐서 딱 떠오른 이름이란다. 13살 초핀은 덕질에 일가견 있는 덕녀다. 상상놀이에 빠져 뒹굴거리던 꼬꼬마 때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크면서 덕질이 점점 레벨업 되고 있다.


초핀이 처음 빠진 덕질은 슬라임이다. 초등 저학년 때 한 번씩 거치며 가는 슬라임이 초핀에게도 왔다.  슬라임 하는 장면을 촬영해 유튜브에 편집을 해서 올리고 커뮤니티 모임에 들어가 또래 문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무리까지 잘하는 깔끔한 성격을 가졌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녀가 슬라임에 빠진 동안 집 곳곳은 물컹하고 끈적이는 액체와 자잘한 용기가 굴러다녀 엄마의 스트레스를 팍팍 올려주었다.  


두 번째 덕질은 일본 애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지인 딸과 파자마 파티를 시켜줬는데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일본 애니 <원포맨>를 새벽까지 본 후 일본애니에 퐁당 빠졌다. <건어물 소녀 우마루짱> <일하는 세포> <암살교실> <귀멸의 칼날> <지박소년 하나코 군> <종말의 세라프> <오늘부터 신령님> <바니타스의 수기> 등등... 텔레비전이 허락된 주말마다 방문을 닫고 애니에 빠졌다. 그중 <귀멸의 칼날>에 대한 초핀의 사랑은 오래갔다. 귀칼 애니 영화를 4번 보고 만화책을 완결까지 다 사 모으더니 급기야 시노부 코스프레로 넘어갔다.


초핀의 비싼 취미가 시작됐다. <귀멸의 칼날>의 시노부, 카나오, <종말의 세라프> 쿠루루 체페시, <지박소년 하나코 군>의 야시로 네네 등 코스프레를 끊임없이 했다. 스페셜 데이에는 무조건 코스프레 옷을 선물로 받고 카페에 가입해 중고로 거래하고 대여나 맞교환을 하기도 했다. 치렁치렁 가발을 부드럽게 샴푸질하는 것을 '힐링'한다고 하는데 괜히 대여한 가발을 힐링한다고 물에 빨았다가 엉키고 퍼석해져서 힐링비를 추가로 물기도 했다. 코스프레 정모에 간다고 해서 남편과 서울 모임 장소에 데려다주고 근처 카페에서 기다린 날도 있다.  

세 번째는 게임이다. 게임업계 용어도 초핀 덕분에 알게 됐다. 신규로 해맑게 들어온 뉴비는 청정수다. 고인 물은 성적 등급으로 치면 2등급, 썩은 물은  만점 받은 우등생이다. 게임에 돈이나 시간을 갈아 넣은 아이들이 썩은 물이다. 초핀은 현재 어디쯤이야? 물었더니 본인은 '고인 물'이란다.

초핀의 최애 게임은 <원신>이고  남자 캐릭터 최애는 코드네임이 스카라 뮤슈인 '방랑자'이다. 초핀은 방랑자 이름을  '내 남친 사랑해'로 지었단다.

내 딸이 벌써 좋아 죽는 남친이라니,

"걔가 어디가 좋은데?" 하고 물었더니 성격과 특징을 잘잘잘 읊는다.

"츤데레끼가 있고 성격 드럽고 엄마 닮아 이뻐. 남캐 차애는 '타이나 리'야. 귀가 귀여워.  삼애는 두 명인데 알베도와, 소야.  소는 잘 생겼어.  슬프고 짠하고 성향이 고양이 같아. 목소리도 좋고 힘도 세.  알베도는 인조인간인데 500살 정도 되고 연금술사야. 인간 중 가장 세. 아직 숨긴 이야기가 많아. 떡밥이 많다는 얘기지.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불러주는 데로 적기만 해도 정신이 없다.

"여자 캐릭터는?"
"여캐 최애는  호두야. 아니, 여캐는 다 좋아.  피슬은 중2병 걸린 앤 데 음청  귀엽다. 야에미코, 라이덴 쇼군, 감우, 귀여운 나히다, 예쁜 닐루 다 이뻐."


일본애니, 게임 덕질은 그림으로 모아져 캐릭터를 따라 그리기도 하고 오너캐(자기 캐릭터)를 그리기도 한다. 초핀이 가장 좋아하는 요일은 금요일, 토요일이다. 다음날 학교에 가지 않으니 마음껏 새벽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다. 초핀이 불금을 즐긴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11시면 불을 끄고 꿈속에 빠지는 우리 집에서 금요일이 되면 유일하게 새벽까지 거실에서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시간을 즐긴다. 초핀의 덕질 히스토리를 적고 보니 정말 그녀는 찐덕, 그들 업계 용어로 씹덕 수준이다.


그런 초핀이 며칠 전 선언을 했다.


"엄마, 나 웹툰 작가가 될 거야."



 


#글로성장연구소 #별별챌린지 #덕질 #웹툰작가 #원신 #일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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