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혹시 사진 보여드리면 그려주실 수 있나요?"
부스 앞에 서 있던 여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깨에 늘어진 웨이브 머리, 약간 수줍은 미소. 나는 반갑게 대답했다.
"그럼요, 앉으세요."
여기는 K-일러스트레이션 페어 행사 중인 코엑스 D홀, 내 부스는 A-31. 옆에서는 따님이 관람객을 응대하고, 나는 케리커처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으로 보여준 사진 속 인물은 의외였다.
"제 사진이 아니고요, 뮤지컬 배우 '주민진' 님이에요. 팬이라서 기념하고 싶어서요."
연예인을 그려달라는 요청은 처음이었다. 사진 속 그는 강렬한 눈빛과 선 굵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우와, 너무 멋있어요!"
내가 감탄하자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민진 님이 출연했던 뮤지컬과 그가 맡았던 역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턱에 난 상처라며, 그 부분을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팬심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미소 지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감정이 그림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완성된 그림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멋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지만, 그 따뜻한 에너지는 오랫동안 내게 남았다. 좋아하면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그 사람이 생각난다고 한다. 일러스트 페어에서도 그를 떠올리며 그림을 의뢰한 그녀를 보며,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그림 속에 남겨지는 인연
작년부터 일러스트 페어에서 케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엔 걱정도 많았다. 현장에서 직접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테니까. 생각만큼 잘 나올까? 중간에 망치면 어쩌지?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순간들이었다.
"저는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주세요!"
"저는 쌍칼 들고 머리에는 상어 지느러미가 있어야 해요!"
초등학생 형제가 눈을 반짝이며 무조건을 외치며 그림 스타일을 주문했다. 나는 속으로 '이거 어려운 고객일세…' 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옆에서 아빠가 "얘들아, 갑옷은 좀 어렵지 않겠냐?" 하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믿는 눈빛으로 사인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믿음을 져버릴 수 없지! 나는 최선을 다해 그렸다. 다행히 꼬마손님들이 만족하며 돌아갔다.
또 다른 날, 두 명의 여성이 부스에 앉았다.
"친구 분이신가요?" 하고 물었더니 둘 다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요, 선생님과 제자예요!"
알고 보니 한 분은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은 고3 수험을 마친 제자였다. 함께 페어를 보러 오고, 기념으로 케리커처를 그리다니! 얼마나 멋진 순간인가.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가 이렇게 깊어질 수도 있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작년에 왔던 남매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저희 기억하세요?" 라며 반갑게 인사하는 어머니.
작년에는 딸이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며 만화를 잘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고 나는 "책을 많이 읽고 많이 그려보라"고 조언해줬다. 옆에 있던 우리 딸이 "역시 엄마다, 또 책 얘기야" 하고 혀를 찼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답을 해줬다. 매년 페어에 딸아이랑 구경 온다는 시윤이 엄마는 "작년에 작가님이 그려주신 케리커쳐, 지금도 딸아이 방에 있어요!"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작년에는 분명 귀여운 꼬마였는데 1년 만에 숙녀가 되었다. 내년에는 또 얼마나 클까 기특하고 궁금하다.
그냥 굿즈만 사고 가는 관람객들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데 이렇게 그림으로 스토리가 생기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
이제 나는 매년 한 번은 일러스트 페어에 꼭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굿즈를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자리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인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며 주고받는 이야기, 팬의 마음이 담긴 케리커처, 선생님과 제자의 우정,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의 성장. 그 모든 순간이 모여, 그림이 단순한 그림이 아닌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이 된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다.
그림을 통해 소통하고, 벅찬 따뜻함을 느끼고, 감사함을 나누며, 또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인연은 우연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 선물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그림을 그리고, 다음 만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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