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샘플 영상 만들기(1)

나를 프로젝트에 끝까지 묶어두기 위해

by BAEK Miyoung

2017년, 나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현 광화문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실시하는 '피치앤캐치'라는 단편 영화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은 1차-서류 심사, 그리고 2차-영화제 기간 중 피칭(pitching)을 통해 지원작을 선정한다.

IMG_8130.jpg 피칭을 했던 작은 무대

나는 그해 다른 실사 영화들 사이의 유일한 애니메이션 제작자였다. 실사 영화가 주요 심사 대상인 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은 낯선 장르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PT자료와 함께 발표하는 피칭 자리에서, 이미지 자료가 풍부한 애니메이션은 타 작품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최종 피칭에 참여한 감독은 총 6명. 각자 자신의 영화가 왜 만들어져야 하는지, 어째서 영화제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등의 이유들을 나란히 풀어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설명하던 중, 타 감독들은 실제 장소를 대여하고 좋은 배우를 구해야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런 물리적인 활동이 필요 없음을 어필했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나 하나만 케어하면 되니, 내가 배 곪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맥락에서의 어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심사 자리에 앉아있던 한 감독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저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장르는 그렇게 혼자 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나요? 실사 영화는 사람, 공간, 장비 등 다양한 경로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혼자 작업하시잖아요. 저는 그게 더 힘든 과정이라 생각해요.’ 나는 배려 깊은 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차가운 평가대 위에서 들은 뜻밖의 따뜻한 위로는 여태까지 마음속에 뭉클하게 남아있다. 이 말을 건네준 심사위원은 영화 <가족이 탄생>, <만추>를 만든 김태용 감독이었다. 김태용 감독 외에도 자리한 참석한 심사위원들 대부분 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비교적 조심스러운 심사평을 건네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심사위원 중 애니메이션 감독이 없었던 탓인 듯.) 그해 피치앤캐치에서 2등을 차지했고, 나는 500만원이라는 지원금을 얻어 차기작을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영화제 시상식에서 지원작 선정 유무가 발표된다. 수상 축하를 위해 화관을 씌워주는 바람에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혼자 작업한다는 것은 가뿐할 때도 많지만 막막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내 작업을 같이 뛰는 사람 없는 마라톤 같다 말하곤 한다. 어딘가에 있을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는 있지만, 이 길의 방향은 맞는지 내 페이스는 적당한지, 결승점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인지 알 수도, 어디 물어볼 수도 없다. 이곳에는 경쟁 없는 자유로움이 만연하지만 가늠하기 힘든 외로움이 깃든다. 자발적인 의지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즐거운 일이 못된다. 홀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마구잡이로 움직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타협점을 찾지 못해 스스로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이렇든 저렇든 결과에 받아 드는 이는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시종일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혼자 작업을 하는 경우일수록 스스로 단단한 기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 기준 없는 작업은 나에 대한 끝없는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관대함은 작업의 끝까지 달려가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된다. 어쩌면 이런 엄격함은 결과 중심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공부했던 프랑스 학교에서는 애니메이션을 구상하는 과정만으로 그 가치를 운운하곤 했었다. 나는 그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니까.


여러 해 여러 작업, 그리고 여러 작업 동안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나름 일정한 제작 시스템이 자리 잡혀갔다. 시스템은 점점 견고한 길로 다져졌고, 나는 성실하게 그 길을 걸어 걸어 다시 첫 출발점에 다다르곤 했다. 그렇게 어느덧 9번째 길을 돌아 10번째 출발점에 선 요즘이다.

<달, 어디 있니?>는 그중 7번째 지나가게 된 과정이었다.

기초적인 재료(이야기, 배경, 캐릭터)가 꾸려지고 나면, 이것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보일지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것을 '샘플 영상 작업', 혹은 '테스트 영상 작업'이라 부른다. 정해진 이름은 없고, 그저 내가 명명한 작업 과정이다.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기 전 이 모든 재료들이 서로 적절한 역할을 하여 화면에 좋은 그림으로 펼쳐질지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단계다. 나는 품이 꽤 드는 이 과정을 고집스럽게 하는 편인데, 단순 이미지만으로는 프로젝트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일지 확신이 잘 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 결과물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이므로, 나는 영상의 '결'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이 과정은 '나'라는 클라이언트이자, 작업자이자, 감독자를 최종 작업 단계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보통 샘플 작업은 장면 중 미리 구현해보고 싶은 부분을 제작하는 것, 혹은 본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 부분을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고리타분하고 겁 많은 작업자다. 그에 걸맞게 그냥 영상의 첫 프롤로그 부분으로 샘플 영상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쩐지 영상 중간에 등장할 장면을 미리 구현해보는 건 덜컥 겁이 나기 때문이다.(물론 쓴 실패의 경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 어디 있니?>의 프롤로그 파트에는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는 배경 파트와, 메인이 되는 두 캐릭터를 소개하는 파트가 주를 이룬다.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괜한 욕심으로 잔뜩 힘을 들인 장면이 군데군데 눈에 띄는데, 그중 하나가 기린 애니메이팅 장면이다.


요 장면

기린은 묘한 동물이다. 공룡만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채 풀을 뜯어먹고 초식 동물. 몸에는 어느 하나 동일하지 않은 아름다운 점무늬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평화롭게 새겨져 있다. 크기에서 오는 느리지만 우아한 몸집, 누구로부터 위협받지도, 누군가를 위협하지도 않는 평화로움. 나는 자주는 아니자만 종종 이 동물을 애니메이션에 뜬금없이 등장시켜왔다. 솔직히 화면 속 기린이 반드시 '기린'이어야 했던 경우는 없다. 단지 기린이라는 동물이 가지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화면에 장식하고자 등장시켰다. 그리고 화면 속 기린들은 의도보다 명확한 임팩트를 주곤 했다. 그런 맥락으로 달 속에 머무는 갖가지 동식물 중 가장 먼저 등장시킨 동물이 기린이었다. 화면의 첫 장면은 잠을 깨우는 물고기(불면증)가 각자의 달 속에서 잠자는 동물들을 깨우선 장면이다. 자다가 일어나는 동작에서 기린의 기다란 목의 실루엣은 화면에 이목을 끌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기린이 목을 빼어 드는 장면을 그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생각만으로도 아름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린은 아주 바닥에 눕혀뒀던 목을 천천히, 길게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렇게 기린 움직임의 큰 틀을 그린 후,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내가 한 가지 큰 사실을 간과했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건 다름 아닌 기린 목 위의 무늬였다. 원통형 모양의 기린 목을 둘러싼 검은 점. 그 점들을 투시와 움직이에 맞게 그려내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까다로운 일이었다. 3D 모델링이었다면 조금은 간단했을까. 손그림으로 이를 하나하나 그려내는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기린2_a.jpg 간략한 작업 과정

그렇게 목을 위, 중간, 아래 세 부분으로 분할하는 선을 그려 넣고, 목의 앞, 뒤, 양 옆을 구분하는 세로선도 추가했다. 3D 입체감을 살리면서 점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후, 각 분할된 영역에 점무늬를 그려 넣었다. 길고 지난하고, 어쩌다가 초장부터 힘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완성작을 보니 일면 보람이 느껴졌다.

기린3.jpg 겨우 그려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기린의 앞다리는 해부학적으로 저런 형태를 취할 수 없다. ㅠㅠ... 수정하기엔 너무 늦었고, 실루엣으로 보기에 저 다리 형태가 보기 좋아 그대로 그려 넣었다. 시에는 언어적 시적 허용이라는 것이 있듯이, 누가 따져 묻거든 애니메이션적 허용이라 주장해야겠다 마음먹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이를 따져 물은 사람은 없다. 다행이다.

영상에 삽입된 해당 장면

이야기가 길어져, 샘플 영상에 대한 이야기는 (1) 편과 (2) 편으로 나눠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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