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스토리보드

그림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

by BAEK Miyoung

스토리보드는 글의 초안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플롯, 인물의 행동과 대화, 분위기 장소 등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을 한데 모아 적절하게 배치하는 단계. 글로 정리해둔 스크립트를 영상과 이미지라는 타언어로 옮겨 적는 과정. 그림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 나는 그것을 스토리보드라 부른다.


애니메이션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참으로 노동집약적인 예술 장르 중 하나다. 때문에 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초 공사를 튼튼하게 해 쓸데없는 곳에 인력이 낭비되는 일을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스토리보드는 이런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명된' 과정 중 하나였다. 장면 장면 러프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넓은 벽이나 보드판에 일렬로 붙여놓고, 이야기 흐름에 불필요한 부분은 빼거나, 더하거나, 순서를 바꿔보기도 하는 여러 테스트 과정을 거친다. 본편을 다 만든 후 편집 과정에서 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에, 이렇게 스토리보드 작업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원들의 동의와 합의를 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규모의 인원이 한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렇게 판을 펼쳐놓고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침으로써 아티스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성과 장점을 애니메이션에 불어넣을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막 태어난 오로라 공주를 위해 여러 요정들이 아름다운 마법 주문을 걸어주었듯, 이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은 이전에 없던 매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

03.21.18_BlogImage_2.jpg 먼 옛날 디즈니 애니메이션 팀의 스토리보드 미팅 모습

내 경우, 거대 자본이 투입되지도, 긴 장편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작업에서 나는 홀로 일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즐긴다. 때로는 이런 작업 스타일로 인해 스토리보드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의문이 제기하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하루에도 시시각각 천변만화하여 각자의 주장을 펼친다. 어제의 내가 확신했던 장면이 오늘의 나를 설득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오늘의 생각과 의견을 최대한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토리보드도 그러한 과정 중 일부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오늘, 당장의 작업을 진행하는 나에게 '최선'이라는 화두를 되묻는다. 그렇게 매일 소소한 타협과 협상을 반복한다. 나에게 애니메이션이란, 매 순간 이 과정을 되풀이해서 얻은 작지만 최선의 결과들이었다.


스토리보드 작업은 양날의 검과 같다. 가장 짜릿한 과정인 동시에 가장 가혹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획-제작-후반 작업이라는 애니메이션의 큰 제작 틀 안에서, 스토리보드는 '기획'의 정점에 있는 작업이다. 이 단계에서 장면이 확정되면, 이후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영상 제작까지 무식하게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면과 장면 그 사이를 이어가는 실력 좋은 목수가 되어야 한다. 씬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다리'를 적절하게 이어 붙여,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을 마지막 장면까지 잘 안착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마치 신이 된 듯한 우월감을 느끼는 동시에 스스로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한 없이 되새김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더듬더듬 장면들 사이를 연결해 나가다가, 꼭 한두 부분에 이르러서는 아득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지점에 다다른다. 여기서 저기까지, 어떻게 하면 매끄러우면서도 앞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느낌의 건널목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닿지 않을 우주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다음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다. 이용할 수 있는 그림과, 대사와, 인물의 갈등과, 이름 없는 소품들 하나하나 그 사이에 올렸다 빼기를 골백번. 어쩔 수 없이 얇은 실오라기 같은 끈을 잇는 것으로 장면과 장면의 연결하고서 그를 떠나보낼 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괴감에 울적해지곤 하는 것이다.

7p.jpg
8p.jpg
9p.jpg

위 스토리보드 장면은 고래와 해파리가 있는 [바다]에서 그림자의 [숲]으로, 공간이 변화하는 구간으로, 씬 구성에 가장 애를 먹은 구간이었다. 바다에서 숲으로 공간이 전환되는 이유, 캐릭터의 동선 연결, 이야기의 흐름, 어떤 부분에서도 자연스럽게 두 공간을 연결해줄 만한 요소를 찾지 못해 한참을 정체해야 했다. [숲] 장면이 끝나면, 영상의 템포가 빠른 호흡으로 전환된다. 때문에 영상의 템포 역시 이전의 [바다] 공간에서 펼쳐진 속도 그대로를 유지해야 했다. [숲] 장면은 내가 그리고, 또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영상에 꼭 필요한 장면으로 그려낼지 고민에 고민이 거듭되었다.

re06.jpg
re05.jpg

결국 주인공 아이의 '그림자'를 투입해, 캐릭터와 관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숲]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숲]이 나무 그림자들이 모여 잠을 자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있었고, 그 맥락에서 선택한 방법이긴 했지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 탓에 아직까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선택 중 하나다.


종종 스토리보드의 결론 부분은 '얼렁뚱땅 야하합!!' 하고 대충 이야기 흐름만 잡고 넘어갈 때가 있는데, 이것은 나름의 사연이 있다.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결론 부분이 수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야기든, 장면이든, 주인공의 심정이든,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꼭 '강력한 의지'가 발생한다. 그리고 감독인 나조차도 그 의지에 못 이겨 이야기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이상하게도 항상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달, 어디 있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아이가 침대로 돌아와 '달'을 찾는다는 과정은 똑같지만, 그‘달’을 상징하는 사물은 '방에 놓인 조명'에서 '침대'로 대폭 수정됐다.

85.jpg 처음에는 아이 방에 있는 조명이 [달]을 상징하는 사물로 그려졌다. 추후에 해당 사물은 [침대]로 바뀌었다.


이제 전반적인 연출 방향과 캐릭터와 배경과 같은 메인 아트워크 작업도 확정이 됐다.

이 모든 요소들을 볼 수 있는 짧은 샘플 영상을 제작하게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