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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플러 Miyoung Nov 05. 2024

[100-2]  셀프 코칭 1. 나는 왜 그랬을까

스파티힐룸

[100-2] 셀프 코칭 1. 나는 왜 그랬을까


눈앞에 있는 스파티힐룸을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마치 피아노 건반 위를 마찰할 첫 음을 고르느라 망설이는 손과 함께 한참을 응시했습니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손가락이 제 갈 길을 정확히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쉬이 노트북의 철자를 고르지 못합니다. 한참을 눈앞에 있는 스파티힐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침내 손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볍게, 중력이 느껴지지 않게 공중에서 잠시 머무르는 듯하더니 반사적으로 ㄴ을 누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했습니다.


사건은 하나의 블럭으로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단단할 것만 같고, 한 순간에 일어난 벽돌처럼 무겁도 두터운 사건은 사실 한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쉴 수 없는 얊은 막으로 되어있는 그것을 여름철 얇디얇은 비단의 홑겹을 걷어내듯 그렇게 매우 부드럽게 조심스레 그러나 깊은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조금 더딜 수도, 매우 추상적일 수도 때로는 아주 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는 스스로 그 내부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화창했습니다. 나는 아팠습니다. 감기에 걸렸거나 구토를 했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겁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둘 중 하나임을 장담할 수 있는 건, 그 당시 나는 아픈 이유가 딱 그렇게 두 가지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자주 그렇게 아팠습니다. 두통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는 나를 위해 너는 당연히 간호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라졌습니다. 나보다 동생이 중요했던 건지, 나보다 친구가 중요했던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운했던 내가 화를 내자, 너는 다음날 일찌감치 회사에서 퇴근하고는 가슴 한가득 스파티힐룸을 안고 문 앞에 섰습니다. 나는 태어나 그렇게 아름답고 청명한 식물은 처음 봤습니다. 식물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자신의 영롱한 초록됨과 풍성하고 통통한 손들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숱 많은 초록 사이로 하얀 꽃도 솟아나 있었습니다. 하나, 둘. 네 맞습니다. 두 개의 하얀 꽃이 어찌나 우아하게 피어있던지.


나는 아직 화해할 마음이 없어 문을 열자마자 너의 면전에서 쾅하고 닫아버렸지요. 나는 화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돌아서 침대로 오는 길에도 씩씩거리며 숨을 내키고 있었지요.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러면서도 나는 너가 날 위해 안고 온, 풍성하고 싱그러운 초록이 계속 생각나지 뭡니까. 너는 그 식물을 로리에 메트로 근처에 있는 그 꽃집에서 샀겠지요. 정성껏 포장해 달라며 맘씨 좋은 플로리스트에게 주문했겠지요. 포장하는 내내 내가 기뻐서 환한 미소로 너에게 답할 것을 상상했겠지요. 은빛 화분의 영롱한 초록과 바스락거리는 투명 포장지의 싱그러운 마찰음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들떠었겠지요. 식물을 안은 너의 가슴이 참 따듯했겠지요. 너는 그랬었군요. 로리에 길을 지나 파브르 거리의 끄트머리에 있는 집을 향해오며 콧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겠군요. 잎이 풍성한 가로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겠지요. 그녀의 마음이 풀어지길 바래요 라며 말이죠. 바람이 노래하는 잎사귀들 사이로 태양이 눈부시게 들이치고 반짝거렸겠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문을 쾅하고 닫았지 뭐예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습을 보여주며 너의 잘못이라고 소리쳤었죠. 투명한 포장지와 함께 스테이플러로 찍혀있던 잎사귀의 한켠처럼 너의 가슴 한켠도 그렇게 찍혔었겠죠. 날카로운 나의 표정에 어쩔 줄 몰라했었죠. 미안합니다. 나는 외로웠었나 봐요. 머나먼 타국에서 온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나는 버거웠었나 봐요. 그 문을 쾅하고 닫는 게 아닌데.... 문을 뒤로하고 돌아섰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던 회색 후회를 나는 아직 기억합니다. 애써 외면했던 나의 어리석음이 기억납니다. 너가 아닙니다. 나의 문제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줘서. 너는 모르겠지요. 스파티힐룸은 그날 이후 나의 가장 사랑하는 식물입니다. 어딜 가나 내 눈앞에 함께 하는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큰 블럭처럼 단단했던 기억 한 겹을 조금씩, 미세한 손짓으로 들춰봅니다. 미숙했던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질문해 보기로 합니다.


2024.11.5. 화. 다이아 벨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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