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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Dec 26. 2020

그렇지만 '좋아요'는 도저히 못 누르겠다

인별그램에 그녀의 피드가 올라왔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잔잔했던 내 마음에 돌이 날라와 하루종일 울렁울렁 처량한 물결이 인다. 몇 년전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울렁거렸고, 종강했다며 올린 별그램 사진을 본 어제도 울렁거렸다.


나와 대학 동문인 그녀. 대학 때도 늘 생글생글 웃던 귀엽고 예쁜 그 친구는 우연치 않게 나와 한 필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편곡가가 되었고 나는 음반 제작사의 A&R(Artists and repertoire의 약자로 음반기획, 가수/프로듀서/작곡가/작사가를 섭외하고 제작 실무를 담당)이 되어 다시 만났다. 둘다 가요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하는 일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작곡가가 되는 것.


이제는 마흔이 넘은 그녀도 나도 명함을 내놓을 만한 작곡가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그녀는 한 분야의 공식적인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대학 강사가 된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집에서 전문적으로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아줌마가 되었으니 그 친구 소식에 머리가 하얘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건 명백한 질투심이리라. 하지만 단순히 질투란 이름을 붙이기엔 그녀와 나 사이에 내 쪽이 억울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워낙 곡 잘 쓰고 유명한 여자 작곡가가 많지만 내가 A&R로 일할 당시에는 수면 위로 떠오른 여자 작곡가가 거의 없었기에 우리 둘은 의기투합하자고 약속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능한 사람이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남자들이 판을 치는 이 가요계에서 여자 작곡가로 살아 남아 보자 라고.


그 당시 당장 끌어주고 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둘 중 나였다. 편곡가였던 그녀는 의뢰가 들어와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고 제작사에서 일하던 나는 기획만 잘 하면 제작비도 끌어올 수 있고 제작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밥과 커피까지. 그렇게 나는 그녀의 솔로 앨범을 내주었다. 아껴왔던 나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유명 연예인 얼굴까지 그녀의 앨범 자켓에 넣어주었다. 이 때까지는 내가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다음 번엔 자기가 날 꼭 도와주겠다고 했다. 기대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고 만나며 함께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 작곡가들과 프로듀서들을 서로서로 소개시켜주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작곡가로 완전히 전향하겠다고 선언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명백했다. 내가 더 이상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주기엔 각자의 생활이 바빴던 것이다. 이번엔 네가 나를 도와줄 차례가 아닌가 싶었지만 일이라는게 그렇게 계산적으로, 너 한번 나 한번 순서가 정해져서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했다. 그렇게 나는 결국 작곡가라는 결승점에 도착하지 못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우연히 그 친구와 한 동네에 살게 되어 다시 만났고, 함께 작곡팀을 꾸리기로 했다. 나는 출산과 육아로 음악은 꿈도 못꾸던 시기였고, 그 친구도 결혼과 동시에 모든 일이 끊겨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그제서야 비로소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재기할 수 타이밍이라 여겼다. 하지만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틀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대표를 맡을 것이며 건강상의 이유로 음악 작업은 자신이 없으니 자잘한 음악 잔업은 내가 모두 도맡고 저작권은 공동으로 갖자는 이야기였다. 예전 A&R로 일하던 당시 많은 작곡가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어떤 시스템인지 잘 안다. 대표 프로듀서 밑에 보조 작곡가들이 열심히 곡을 만들면 자신의 회사 이름으로 곡을 내는 것이다. 난 그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팀 이야기는 없던 것이 되었다. 그 이후 연락은 또 끊겼고 가끔 그녀의 인별그램으로 소식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강사 생활을 몇년 잘 하고 나면 겸임교수가 되고 그러다가 잘 되면 정교수가 되겠지. 나는 이렇게 밥차리다가 애들이 다 크면 공허한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우울증으로 폭식하며 사회와 담을 쌓거나 갱년기로 신경질을 바락바락 내면서 가족들에게는 피해야할 대상 1호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부들부들 떨었던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속이 울렁거렸던 걸거다.


우리는 친구였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같은 목적지로 가자고 같은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너는 북극, 나는 남극으로 가는 중이다. 애초에 우리는 2인3각으로 출발하지 못했고 각자의 발로 너는 십일자, 나는 팔자 걸음으로 걷다가 서로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을 때쯤 두리번거리며 sns를 뒤져볼 것이다. 그녀가 내가 잘 모르는 먼 곳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난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는데!!'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자괴감에 드러누워 울렁이네 어쩌네 하다가 나는 다시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남는 시간에 곡 작업을 조금 하며 느린 속도로 속터지게 남극 향해 기어나갈 것이다. 넌 처음부터 북극곰을 만나러 가려던 거였고 나는 펭귄을 찾으러 가려던 것이다. 우리는 그냥 이런 사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우린 원래부터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된다.


다만 그녀의 인별그램에 '좋아요'만큼은 못 누르겠다. 좋지가 않으니까. 내 이 작은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싶다.

SBS드라마 <질투의 화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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