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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과장미의나날 Dec 01. 2023

"배려"라 쓰고 “갑질”이라 읽는다

얼떨결에 빌런이 된 예비 시댁 식구 이야기-2

"언니, 뭔가 잘못된 거 같아.... "

"..... 응? "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둘째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 남매가 묶여있는 단톡방도 며칠째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던 터였다 일주일 전 우리 측 의견에 대한 신부 측 반응을 내심 기다리던 중이어서 남동생과 통화를 했나 싶었다

"철수(남동생)가 영희(예비신부)에게 우리 가족 의견을 전달했는데, 며칠째 답도 없고 연락도 없다가... 어제야 서로 얘기를 좀 했나 봐 "

"뭘 일주일이나 걸려, 드라마처럼 예단목록을 넘긴 것도 아니고 하지 말자는 건데.... 무슨 문제 있다니? "

"그러게, 나도 궁금해서 전화했는데 철수가 영희랑 싸웠다고 하더라고, 큰일은... 상견례 날짜를 미루겠다 하네"  

날짜는 정해졌고 장소만 확정하면 되는 상견례를 미루자고??

어라? 뭔가 잘못됐다. 바깥은 여름인데 혼자 겨울을 맞이한 듯  듯 등줄기가 싸하니 시렸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뭐가 잘못된 건지 생각해 내야 했다 식사 초대한 날 그랬나?  우리가 유별나게 했었던가? 실수한 게 있었나?  몇 초 사이에 그때의 대화와 행동들을 훑었다 크게 잘못한 거 없는 거 같은데?...

혹시나 싶어 물었다

"가족들 만났을 때 뭐가 안 좋았었나? 그렇다니?"

"아니, 그때 다들 기분 좋게 헤어졌잖아. 그런데 철수 말로는.. "

"그럼 뭐? 우리 잘못한 거 없잖아?, 음식은 네가 다하고 나는 그날 설거지에, 부지런히 음식 나르고.... 영희는 철수 옆에 앉아만 있으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어머니, 시누이 노릇을 한 기억이 없다. 게다가 저번주에 쿨한 배려까지 했는데… 내 상식으로 우린 잘못한 게 없다. 아니, 없어야 했다.

여동생의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 집에서 예단을 받지 않고 예물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견례를 미루게 되었다는 거다. 실화냐?... 하지만 진짜였다 ( 아래 화살표는 예비 장모님 되실 분의 의견을 ”간추린 “것이다)

물론 여동생이 그분과 직접 통화한 건 아니다 철수와 영희가 예비 장모님께 들은 얘기를 옮긴 것이다


첫 번째, 혼수와 예물 따윈 관여하지 않는다 결혼할 두 사람이 상의해서 결정한 사항이면.

→ 딸내미 남들에게 보란 듯이 번듯하게 시집보내고 싶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지?

두 번째, 누나들이라고 예단 같은 거 받을 생각 하지 마라, 나(시어머니)부터 아무것도 안 받을 거다.

→ 신랑 측은 생략해도 되실지 모르겠으나, 신부 측 입장은 다르다 친지들이 보는 눈도 있어 곤란하다

세 번째, 상견례도 예비사돈댁이 편한 장소로, 우린 식구가 없으니 결혼식도 예비사돈댁이 편한 곳에서!

→ 그런 배려는 하실 필요 없으실 거 같다. 신부 측 부모님이 사는 곳은 지방이라 번듯한 예식장이 없으니 서울에서 결혼하자 상견례도 마찬가지다.


결론은,  절차에 따라 격식에 맞춰 누가 봐도 좋고 번듯하게 결혼식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물론, 우리도 바라던 바다. 다만 {누가 봐도}가 아니라  {두 사람}이 좋은 결혼식을 하길 바란 것뿐.

번듯함의 시선은 양쪽집안이 이렇게나 달랐다.

선뜻 이해가 안 가니 좋은 말이 입에서 나올 리 없다

"뭐래, 배려를 했는데 저렇게 나온다고? 쉽게 가자는데 그걸 굳이 어렵게 가자고? "

나는 (잘못도 없는) 동생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도 당황스럽기는 한데, 철수가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우리가 먼저 결정해서 통보하듯이 한건 기분이 안 좋으셨데... 물론 우리는 의견을 전달해 달라고 한 거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통보하듯이 “라고 하시니... 이 오해를 어쩌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아들과 달리 딸내미 시집보내는 심정을 미처 생각 못한 건 맞는 거 같아 언니... "

"아이고....... "

안타까움의 탄식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절대 <통보하듯이> 결정내고 전달한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오해였다 그 오해로 상견례 날짜를 미루게 되다니!


우리의 "배려"가 "갑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단 생략하자는 거였는데  갑질이 되고 예물은 당사자 둘이 알아서 하라 했다가 결혼식에 신경 안 쓰는 무심한 예비시댁이 된 것이다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다르다니. 심지어 22년 전 나의 결혼식에 예물과 예단을 안 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한 건 당사자 우리 둘이었다.

여동생과 나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핸드폰이 뜨거울 때까지 통화하고 내린 결론은 네 가지였다.

1. 신부에겐 일생일대의 가장 큰 행산데 아무것도 준비(혼수와 예단등)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시작 전부터 기대치를 너무 낮춘 얘기였을수 있었겠다.

2) 예단 생략하자는 말을  아무것도 안 해주는 걸로 오해했을 수도, 신부 측은 원하는 게 있을 수 있잖아?

3) 그래, 둘의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 라면서 당사자들 합의하고 양가에 얘기할 시간을 주지 못했네 우리가 앞섰던가 봐.

4) 우리 그날, 철수에게 물어봤었잖아, 영희의 생각이 우리와 많이 다를 거 같냐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하길래 안심했는데 섣불렀던 거야.

5) 예비 시누이가 둘이나 되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둘 사이 나빠지면 어째? 우리 정말 잘못한 건가?......

오해라고,

영희에게 직접 설명하고 싶었다, 서운해하지 말라고 배려였다고 간곡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입장 차이가 많이 다름을 알았었다면 좋았을걸,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는 게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당사자 사이에 이미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양가 가족들의 의견차이로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순 없는 일이다 더 큰 균열이 오기 전 남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어야 했다 예비 사돈댁에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부디 오해는 풀고 다시는 서운하지 않게 네가 잘하라고, 앞으로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네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누나 둘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가족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예비신부를 더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다 큰 애들 뭐가 걱정이 냐고 한가하신 말씀을 하셨다 대책 없는 무한 긍정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얼마 후, 결혼이 삐걱거리는 또 다른 결정적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그리고 나의 여동생은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지만 가장 냉소적인 미소를 갖출 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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