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세 모녀의 유럽여행

좋은 딸이 될 결심

by 김김이


“난 좋은 딸은 아니었어.”


서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에 살면서 학창 시절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보냈다. 그건 엄마의 뜻이라기보다는 서울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의 뜻이고 결정이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배고프지 않은 집 딸이었다. 점심을 제공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급여를 받으면 각자의 집에 돈을 보내는 여공들과는 달리, 할머니는 본인이 받은 급여는 온전히 본인을 위해 썼다. 그런 모습에 매료된 동료가 자신의 오빠를 소개해줬고, 그렇게 할머니는 그 시절 평균보다는 조금 늦게 시집을 갔다.


할머니는 항상 당당하고, 무엇이든 혼자 거뜬히 해내시는 그런 분이셨다. 자식들을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서울 사대문 안으로 학교를 보냈으며, 원한다면 대학도 보냈다.

할머니의 집은 봄에는 마당의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먹고, 여름에는 영글지 않은 포도를 가지고 놀고, 가을에는 호두를 깨고, 겨울에는 연탄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깨끗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나의 귀가가 늦으면 할머니는 그 늦은 밤 골목에서 서성이며 날 기다리셨고, 수북한 고봉밥과 감자볶음을 해주셨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꼭 손에 쥐어주시는 용돈이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좋았고, 그런 할머니집이 좋았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 서울에 직장을 잡기로 결심한 후에 당연스럽게 할머니집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상도 사투리로 애칭처럼 내 이름을 불러주던 할머니가 가끔은 그립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할머니와 엄마의 어린 시절 할머니는 조금 다르다.

할머니의 당당함은 엄마에게는 억척스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존경했던 할머니의 교육열은 체구가 작았던 엄마에게는 너무나 버거웠고, 나의 애칭을 만들어 준 할머니의 사투리는 엄마에게는 너무 거칠었다.

엄마는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사회로 뛰어들었고,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은 나와 달리 꼬박꼬박 생활비를 드렸다.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혹은 주말부부로 삼 남매를 키웠다. 엄마는 다른 집 엄마들처럼 공부를 못한다고 매를 들지 않았고 밤에도 공부보다는 잠을 자게 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학원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시절 평균처럼 친정에는 일 년에 두 세 번가는, 친정보다 시댁을 더 많이 가는 그런 엄마였다.



나는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엄마 품을 떠나본 적이 없다. 초중고를 넘어 대학교까지 집에서 통학하였고, 그나마 길게 떠나본 것은 한 학기 다녀온 교환학생 정도이다. 그런 내가 서울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게 되며 엄마의 품을 떠나게 되었다. 짐을 싸서 집을 떠난 봄의 어느 날, 엄마는 내가 펑펑 울고 있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실 엄마의 품을 떠난 나는 할머니와 이모 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태어났던 방에서 살며, 이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주말에는 할머니와 군밤을 까먹으며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봤다. 회사생활도 괜찮았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회사에서 통틀어 가장 어렸던 나를 다들 잘 대해주었고, 동료들과 점심때마다 주변 맛집 탐방도 했다.

그즈음에 엄마는 할머니 집에 자주 찾아왔다.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혼자 세 시간을 운전해서 오기도 했다. 가끔 이모와 이모부가 출근한 토요일에는 할머니랑 엄마, 나, 우리 셋이 좋아하는 초밥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런 평화로운 시간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암투병을 하고 계시던 할머니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에 돌아가셨다. 그때 경조사 휴가를 처음 써봤다.


누구나 살면서 주변인을 잃는 경험을 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내 인생 첫 장례식도 아니었다. 하지만 같이 생활한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장례식장은 슬퍼만 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조문을 와 준 회사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기도 해야 하고, 음식량을 체크하고, 누가 참석했는지, 화환은 누가 보냈는지 확인도 하고, 밤을 지키기도 해야 하고, 어찌나 할 일이 많던지!

부의금을 받지 않겠다는 유언대로 할머니가 모아둔 돈만으로 장례를 치렀다. 할머니는 가실 때도 본인처럼 가셨다며 다 같이 재미있던 기억이 떠올라 킥킥 웃다가도,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다는 성가를 부르다 울기도 하고, 조문을 와서 기도를 해주는 성당 교인분들을 보며 한 번쯤은 일요일에 같이 성당에 가자는 할머니를 따라가 볼 걸 후회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것을, 더 자주 찾아오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러고 나서 평화로웠던 내 인생에 제동이 걸렸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보게 된 채용 면접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회사 계약기간은 끝나가니, 어디 안정적인 곳에 다시 소속되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나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도 제법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갱년기를 호되게 겪고 있던 엄마는, 이직한 회사에서 갑질에, 권고 아닌 권고사직까지 당했다. 그리고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정말 회사 계약기간 2주도 안 남았을 즈음, 불안함이 극에 달한 나는 취업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좋은 딸’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은 취업보다 짧은 기간 안에 달성하기 더 쉬워 보여서 선택했으면서도, 나는 엄마 핑계를 대며 결정했다.


유럽여행에 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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