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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서재 May 04. 2023

초코 우유의 지나친 하루

비교적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그녀와 헤어진 지 단 하루.



MILK 컴퍼니에서 태어나 서울 한복판으로 오기까지 큰 버팀목이 되어 준 그녀였습니다.

그녀의 담백함이 좋았습니다. 수식어도 필요 없고 순백의 얼굴로 미소만을 지어주었죠. 저는 애초부터 그녀에게 소속된 생명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기본을 중시하고 우아함과 절제를 아는 그녀는 여신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편의점에 진열된 후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편의점은 언제나 열려있었고 알바 누나는 바코드를 연신 찍다가도 손님이 뜸해지면 책 한 권을 꺼내 읽었어요.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그녀의 피로를 어쩌지는 못했는지 잠깐 엎드려 있기도 하더군요. 5월이 오면서 따뜻한 베지밀은 거의 찾지 않았습니다. 항상 온장고 안에서 사우나를 하고 있는 셈인데, 늘 차가운 진열대에 뻣뻣하게 서 있어야 하는 저로서는 무척 부러울 뿐이었죠.



우린 태생부터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존재인가 봐요. 

김밥, 도시락 같은 친구들은 유통기한이 1초만 지나도 바코드가 안 찍혀서 팔 수가 없대요. 아무도 찾지 않아 페기처분이라니 비참한 신세가 따로 없지요. 저희 우유도 다를 바 없는 신세긴 합니다만, 기한에 여유가 좀 있어요. 사실 희망고문이 연장된 것뿐이지만요.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아몬드우유 각자 매력 있는 우유 사이에서 유독 빛이 나는 그녀 흰 우유.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고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고소함에서 공통점을 찾았고, 단맛에서 차이를 느꼈습니다.


우리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어요. DNA에 새겨진 초원의 기억을 더듬었어요. 저희 초코 우유는 17세기부터라니 흰 우유에 비해선 역사가 짧긴 짧지요.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카카오가 들어가서 건강에 좋을 것 같다고 다정하게 말해줬어요. 그도 그럴 것이 1931년,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날 신문기사에 제가 소개됐는데요. 초코레트와 코코아에 우유를 넣으면 자양 음료가 된다는 기사였어요.


제법 능력 있는 초코 우유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는 서로가 초코 우유와 흰 우유로 만나, 이런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꽤나 드라마틱하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어떤 일제강점기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더군요.



그녀와 함께 있던 사흘 간은 제 우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죠. 저와 그녀는 맨 뒤 쪽에 진열됐어요. 덕분에 다른 친구들이 팔려 나가도 한동안은 무사할 수 있었죠.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가혹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흰 우유를 별로 찾지 않나 봐요. 결국 제가 먼저 한 여고생의 손에 잡혀 진열대를 떠나게 됐어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별의 말도 변변하게 못 한채 "아,,악! 안녕! 우리! 언제!", 이따위 말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이별은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녀와 나, 애초부터 알고 있었죠.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애써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고 했던 건, 우리가 '이별'이란 단어를 말하는 순간, 현실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겠죠. 저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말이죠. 우리의 하루는 인간의 몇 년일까요? 덧없이 남의 집 차디찬 냉장고 안에서 그녀만을 생각합니다. 그때의 온기, 다정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는군요.



흰 우유 그녀는 아직 진열장에 있을까요? 누가 사 갔을까요? 아님 폐기됐을까요?

이미 끝난 관계를 놓지 못하는 저란 우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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