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후기? 아닙니다.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천만영화(누적관객수가 1500만이 넘었네요)에 등극한 영화라고 소문이 자자해서요.
한때는 주말마다 극장을 가는 것이 소소한 일상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을 가는 것이 점점 줄어들게 되더라고요. 굳이 옷을 차려입고 극장이 있는 곳까지 나가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원하는 시간에 OTT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 같아요.
굳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꼭 극장에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썼던 글처럼 고향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은 이미 두 분 모두 80대입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로 80대가 되시면 어른들은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희 아빠가 그랬어요. 강철 같은 체력은 물론이고 운동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운동이 일상이었던 분이었는데 80대가 되시고나서 급격히 몸이 쇠약해지셨고 어느 순간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간도 있었죠.
어르신들이 자꾸 꾸벅꾸벅 졸고 계시는 것이 혈당스파이크 때문이거나 혹은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셔서 수면부족증상인가 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냥 낮에 깨어있을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이 부족해서 자꾸만 잠이 드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우리 아빠가 그냥 조는 게 아니라 깨어있을 수가 없을 만큼 쇠약해지신거란게 슬프고 화가 나고 그랬죠.
그런 아빠가 지난가을 이사를 한 이후부터 아주 조금씩 건강이 좋아지시고 있어요. 이제는 혼자서 식당에 가서 원하는 음식을 드시고 오시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머리도 깎고 오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 근처에 있는 극장에 가자고 졸랐습니다. 지난해 이사한 부모님 집에서는 걸어서 10분이면 멀티플렉스 극장에 갈 수 있거든요. 원래 영화는 액션밖에는 안 보셨던 아빠의 취향을 알지만 일단 천만영화라는 걸 강조했죠. 아침 10시쯤 시작하는 영화를 예매해 두고 아침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다음 천천히 다시 걸어서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소머리국밥을 점심으로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뚜벅이 코스 일정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인생 영화가 있으신가요?"
아빠는 아쉽게도 영화는 별로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80대가 되신 엄마는 소녀 같은 눈빛으로 말씀하십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엄마의 최애 배우는 비비안리라는 것을 온 가족이 알고 있어요. ㅎㅎ
"그럼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보신게 언제예요?"
아빠는 역시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엄마는 엄마의 작은아버지가 어릴 때 무성영화 같은 걸 보여줬다는 얘기, 그리고 그다음에 본 영화는 제목이 "벼락감투"라고 제목까지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언제 극장에 처음 가서 영화를 봤었는지요. 아마도 초등학교를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였던 것 같은데 엄마와 남동생 셋이서 본 제 인생의 첫 영화는 "우뢰매"였습니다. 엄마는 저랑 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본 게 기억나지 않으신다는데 40년쯤 지났어도 희한하게 저는 우뢰매의 심형래, 그리고 그 이후에 영구와 땡칠이의 심형래를 극장에서 엄마손 잡고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가장 최근에 보셨던 영화가 뭐였는지 여쭤보니 "아마 너네랑 봤겠지"하십니다. 엄마 아빠를 모시고 극장에 갔던 마지막이 언제였을까 되짚어 봤더니 10년도 더 전이었더라고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혹시나 아빠가 힘들어하실까 봐 중간중간 아빠를 살폈지만 초반에 약간 조시는 듯하시더니 그래도 영화를 끝까지 함께 봐주셨습니다. 엄마는 뭐... 웃고 울고 함께했지요.
영화가 다 끝난 후에 여쭤보니 엄마는 영화도 괜찮았고 오랜만의 극장나들이가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액션은 아니었지만 그다음으로 흥미가 있을만한 역사극이다 보니 그래도 아빠는 지겹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온 날 부모님 집으로 막내고모가 놀러 오셨는데 아직 그 천만영화를 못 본 고모의 부러운 눈빛을 보았답니다. (고모는 딸이 없어 아쉬운 분인데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오는 딸이, 수다를 떨어주는 딸이 그렇게 부럽다 하십니다 ㅎㅎ)
약 2시간 정도 앉아서 영화를 함께 보실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아진 아빠, 문화생활을 좋아하시는 엄마와 함께 앞으로는 조금씩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것들을 해보시자고 졸라볼까 합니다.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많이 남은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그렇게까지 두렵거나 슬프지만은 않아요. 지나온 시간이 있어 지금이 있는 것처럼 지금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서 내 인생도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제 영화취향은 속도감이 있고 구성이 잘 짜여진 장르물이지만 그 안에 메시지를 담고 있고 결말이 행복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인생영화를 말하는 게 어렵더라구요. 대신에, 제 인생영화는 제 인생이 되도록 살아보려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처럼 빠르게 변화해가는 복잡한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면 그게 제 인생이면서 영화한편이 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