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스스로만 알아준다면.
지금 이 글은 설날의 연휴가 끝난 주, 목요일. 홀로 제주도에 밤바다가 보이고 따뜻한 색의 실링 라이트가 야외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어느 카페에서 쓰고 있다. 올해 내 나이는 29살이 되었고, 직장인으로 7년차가 되었다. 마음 따뜻해지는 고민을 시작한지 햇수로 세 해째 맞고 있으며, 최근 새로운 공부 및 재테크로 삶의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많은 것이 20대 초반과 중반과 달라졌다. 고민하고 있는 수준과 내용은 많이 성숙했으며, 여러모로 다른 형태를 갖게 되었다. 나이를 헛먹고 있지 않다는 말에 위안을 얻을 정도가 된 걸 보면, 차곡차곡 세월을 쌓아가고 있긴 한가보다.
성인이 된 후로부터 10년이다. 수 많은 삶의 파도가 옆에서 바위에 부서지는 물결처럼 내 삶을 스쳐 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수 많은 성향과 색깔은 드넓은 바다를 맞아 쓸려 사라지기도,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기도 했다. 해양 폐기물이 더럽힌 장소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청정한 에메랄드 색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많은 지인과 사람들이 관광객처럼 나의 작은 풍경을 바라보러 와주었고, 추억으로 소중하게 남긴 사람도,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발전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기도 하고, 혹자는 변해버린 모습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 그렇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한 묶음이 끝나간다.
내게 지난 10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그 많은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방향성을 모르겠는 걸까. 각자만의 색깔을 가지고, 차곡차곡 나아가는 주변을 보면 기가 죽는다. 나로써는 상상도 하지 못할 퍼포먼스들을 일상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같은 나이인데, 비슷한 또래인데, 내 삶이 가끔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떠나지도 남지도 못하는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새로운 터전을 잡은 사람들도, 이 곳에서 성과를 일으킨 친구들도 보인다. 가려도 숨겨지지 않는 삶의 궤적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좀 더 잘 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런 아쉬움들.
그래도 스스로는 안다. 어떤 한 해도 허투루 산 적은 없다. 남들이 모르는 가장 부끄럽고 별로인 내 모습도 알지 언정, 어이없을 만큼 바보 같은 순수함도 외면할 수는 없다. 결과물로는 표현되지 못했지만, 과정에서 진심을 다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계획적이지 못했고, 능력이 부족했다. 용기가 아쉬웠으며, 결정력이 떨어져서 멋지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까지 탓하려면, 글쎄. 나중에 신을 대면할 기회가 주어질 때, 하소연 하는 것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 어차피 결과는 모두가 본다. 타인이 보듯이 삶을 평가하는 건 타인으로 족하다. 주어진 제약들 속에서도 무던히 애쓴 내 모습 정도는 스스로 알아주는 마음을 가져주면 좋겠다.
학교의 많은 기대를 받던 한 고등학생으로 살다가, 심한 사춘기로 기말고사 직전 기간에 제주도로 도망 왔던 11년 전 노트에 적어 둔 글이 있다. 아마 오늘처럼 햇살은 따스했지만, 바닷바람은 차가웠던. 인적 드문 겨울의 제주도였을 거다.
“나중에 남들이 보듯, 너무 쉽게 지금을 후회하지 말자.”
당장 성적이 떨어지고,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조차도 이 시기를 후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시간이 지났다고 배신하는 건 꽤나 치사하다고 느꼈다. 유치하지만, 진심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11년째, 그 당시 제주도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10년동안에도 많은 일이 일어날 거다. 게 중에는 돌이켰을 때 이해가 도저히 되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을 거다. 심지어 결과도 썩 성에 차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남들이 보듯, 너무 쉽게 지금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 갑자기 큰 사고로 신체 불구가 되거나, 엄청난 천재지변을 겪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그래왔듯 열심히 소중히 신중히 산 걸 테니 말이다.
잊지 말자.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볼품없어도 나는 나다. 내 삶이 끝마쳐지지 않는 이상, 이 꿀밤 한 대 쥐어 박고 싶은 철부지는 어쨌든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주인공 시점을 내려놓을 방법이 없다. 기왕 주인공일 거, 기승전결/희로애락 가득한 서사를 마음껏 즐기자. 모두가 피하는 소문난 바보 온달이더라도, 본인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온달이 나중에 공부와 무예를 단련해 고구려를 구한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 쓰일지 누가 알쏘냐. 물론, 안되면 말고다!
이렇게 29살, 아홉수 병에 걸려서 고민하는 것만 봐도 딱 각이 나온다. 올해도 피곤하게 살 팔자가 틀림없다. 생긴대로 살자. 너무 후회하지 말고. 올해 역시 마음껏 고민하고, 노력하고, 웃고, 울고, 행복하고, 기쁘고, 기도하는 또 다른 10년이 되면 좋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예배에서 인용된 구절을 듣고, 부모님이 단번에 '민지가 좋아하겠군'이라고 떠올리셨다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색깔, 나만의 풍경이 있음을 잊지 말고. 그렇게 살아가자. 누군가에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어주기를. 지칠 때 찾아올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주기를.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스스로를 알아주게끔, 그렇게 또 살아가봐야겠다.
그나저나, 겨울 제주도 참 예쁘다.
또 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