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메이커> 리뷰
한국은 해방 이후 남북 갈등이 빈번했다. 그때에는 영호남 지역 갈등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무슨 삼국시대도 아니고 세로로 선을 긋는단 말인가. 영화 <킹메이커>는 대한민국 정치사를 뒤바꾼 한 장면을 통해 지역감정을 정치에 끌어들인 인물을 등장시킨다.
뜻은 컸으나 당에 기반이 없어서 번번이 낙선 중이었던 김운범에게 서창대라는 무명의 전략가가 찾아온다. 때는 1961년,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두 사람의 만남은 어색하고 낯설었다. 깨끗한 와이셔츠를 입고 입바른 말을 하는 김운범은 고약한 수를 써서라도 세상을 바꿔보자는 서창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그리스 살던 아리스토텔레스란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소이다. ‘정의가 바로 사회의 질서다’” 허름하고 어두운 옷에 뿔테 안경을 낀 서창대는 이에 응수하듯 말한다. “플라톤은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었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입니다” 이처럼 <킹메이커>는 사회를 향한 문제의식은 같지만, 방법론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을 운명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면서 영화를 시작한다. 이 절묘한 장면은 양지에서 활약해야만 하는 김운범에게는 빛을 쬐고, 음지에서 일하며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서창대에게는 비운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면서 관객에게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올바르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선 올바르지 않은 수단도 정당한가, 정당할 수 있다면 그 선은 어디까지인가. 이는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보통의 삶에 녹아있는 질문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이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 관한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킹메이커>는 정치인 김운범의 영화가 아니라 제도권에 오르지 못했지만, 소문만 무성했던 전략가 서창대에 시선을 둔 영화다. 학벌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데다 외모까지 볼품없었던 서창대는 어떻게 옳고 곧았으나 선거에서는 젬병이었던 정치인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냈을까. 영화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조작, 협잡, 이간질에 폭력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서창대의 재기 넘치는 선거 전략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관객으로서는 기상천외한 수법에 보는 맛이 나지만, 상대의 악행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고개가 갸웃한다. 영화가 슬슬 전략에 도취하여 우려가 생길 즈음, 서창대의 방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김운범의 속내를 보여주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서창대는 김운범을 1961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시키고, 당내 기반이 없던 그를 재선에 성공시키며 당내 주류에 진입하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이 1969년 삼선 개헌을 밀어붙이는데, 이 과정에서도 서창대는 김운범의 몸값을 더 올려낸다. 잠룡이 되어가는 김운범을 누르고자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초강수를 두는 대통령의 라이벌로 부각하면서 전국구 스타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관권선거가 일반적이었고, 돈 봉투와 고무신이 오가는 더러운 선거전이 한창이었다. 여기에서 서창대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을 짠다. 그만큼 정치적인 구호는 제쳐두고 오직 김운범을 당선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서창대의 모험담이 시종 흥미진진하다. 이는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현재 20대 대선과 묘한 기시감을 이뤄 더욱더 재미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야당 라이벌 김영호와 대권 후보를 놓고 겨루는 지점이다. 신민당은 활기찬 이미지를 위해 두 스타 정치인을 앞세워서 선거전을 주도했다. 이때 현직 총재와 제3의 후보 사이에 단일화와 권력 분배 이슈가 터지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전략이 난무한다. 결국에는 서창대의 속임수로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김영호를 대신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명에 불과했던 김운범이 야당 대선 후보가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라이벌 의식이 강해진 두 사람이 미래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화에 실패하는 장면이 숨어있다고 해석하면 나만의 생각일까? 서창대가 만든 극적인 승리가 비극의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결국 3선 개헌을 강행했던 대통령을 누르고 민주 정권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장면이다. 이처럼 <킹메이커>는 김운범과 김영호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번갈아 비추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되짚는다.
영화는 1960년대를 다루고 있음에서 세련되고 스피디하다. 컷 수를 최소화하여 몰입도를 놓치지 않고, 8mm 필름으로 촬영한 장면들은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양장을 입었던 시기라서 그런지 기럭지가 남다른 배우들의 슈트 핏은 한국형 정치 영화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머리는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기고 옥스퍼드 구두를 신은 배우들은 마치 영국 의회에서 온 듯한 모습으로 해장국을 떠먹는다. 무엇보다 배역진이 화려한데 설경구와 이선균의 대립 구도가 자아내는 긴장감이 돋보이며, 여기에 유재명 조우진과 같은 실력파 배우들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몰입도를 높여낸다. 또한, 지난 작품들을 모두 웰메이드 영화로 만든 변성현 감독은 장르적인 형식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미장센을 통해 다소 지루해지기 쉬운 정치 드라마를 세련되게 연출해냈다.
그렇게 잘 풀려만 가던 선거전쟁은 더는 같이 갈 수 없었던 김운범과 서창대가 갈라지면서 고꾸라진다. 개인이 아닌 당의 대표로 대선에 나선 김윤범은 서창대를 오른팔로 키우려고 하지만, 음지에서 속임수와 조작으로 정치를 배워왔던 서창대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도외시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놓아버린다. 두 사람이 독대하는 장면에서 쇼가 필요하다는 서창대에게 김운범은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이기는지가 아니고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한 법이요” 김운범의 한결같은 고집에 답답했던 서창대는 자신의 업적을 강조한다. “선생님을 그 자리에 올린 게 바로 접니다.” 목적은 같으나 방향성이 달랐던 두 사람이 겪는 신념의 충돌은 객석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후 돌연 여당의 전략가가 된 서창대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선거 전략으로 선거판을 호남과 영남의 대결로 재편한다. 이때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우를 범한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킹메이커>는 미시적으로 두 인간의 신념이 마찰하면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고 떠나가지 못함을 쓸쓸히 되새기게끔 한다.
1960-70년대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시작한 이야기인 <킹메이커>는 요제프 괴벨스, 마오쩌둥의 심리 전술에 버금가는 전략을 뛰어난 솜씨'로 연출한 오락 영화다. 20세기의 한명회가 조선을 뒤흔들었다면, 한국의 현대사에는 그림자로만 활동했던 엄창록이 세상을 뒤바꿨다. <킹메이커>는 물론 영화적 재미와 상상력에 기초해서 창작된 픽션이지만,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재창작하여 아직도 유효한 한국 정치의 근본을 되짚어냈다는 점에서 그간 지반이 약했던 한국 정치 영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 해당 포스팅은 시사회 초대 및 소정의 비용을 지원받아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