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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8. 2022

북토크 빌런 대 허영 빌런

대화의 허영

 신간을 내고 북토크를 몇 번 했다. 내가 쓴 조악한 책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조건 더 잘 썼어야 했는데. 후회해본들 무엇하리. 책은 서점에 깔렸고 대중의 판단은 시작되었다. 근데 생각보다는 비교적 견딜만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고 했는데, 난 무플이 더 견딜만했다. 그래 별거 아니네. 아무도 읽지 않으니 얼마나 편해. 근데 북토크에 가면 피할 수가 없었다. 내 책에 대한 평가를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북토크에 오는 분들은 내 글에 대한 애정을 갖고 오시는 분들이니 다행이었지만, 나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책을 내고 바삐 행사하다가 몇 달 지나자 나는 놓여났다. 책에 대한 반응도 뜸해지고 이제 다른 책을 쓸 수 있었다. 출가한 자식은 이제 관심 밖이고, 새로운 장이 열리려는 참이었다. 눈도 녹고 이제 꽃도 피겠지. 그렇게 놓여나서 휘파람이 절로 나오던 늦겨울 어느 아침, 출판사에서 문자가 왔다. 홍대 땡땡서점에서 아무개 작가의 북토크를 하려다가 취소되었는데, 박민진 작가님이 대타로 북토크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내가 독서 모임 대타, 운전 대타는 다 해봤지만 북토크 대타는 처음이었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출판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책이 안 팔리는데 이 정도도 협조해주지 않는 건 직무유기였다. '네, 제가 대타를 뛰겠습니다.' '와 작가님 감사해요. 이번에 책 많이 팔아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ㅠㅠ' 한 달 후에 북토크가 잡혔다. 카카오맵으로 검색해보니 연남동 부근에 있는 작은 독립서점이었다. 인스타그램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었는데, 별로네 하면서 넘겼던 곳이었다. 난 심각한 얼굴로 책장에서 잊고 지냈던 내 책을 뽑아 들었다. 그래, 다시 읽으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몰라.


 북토크 당일 아침이 되자 걱정이 도지고 긴장이 옮아 붙으면서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을 타고 가서 연남동 철길 주변을 계속 빙빙 돌았다. 근처 노포에서 국수를 마시듯 먹고 시간 맞춰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 문을 열자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눈을 모니터에서 떼지 않고 키오스크처럼 인사를 건넸다.

"책 구경하세요. 음료 주문하실 때 말씀하시고요."

"안녕하세요. 저 오늘 북토크하러 온 아무개라고 합니다”

 “아 네, 예약하셨나요. 성함이.”

 “아, 제가 오늘 책 작가라서요.”

 “아 작가님 이름을 제가 몰랐네요. 죄송해요. 어서 오세요. 음료수는 뭐 드시겠어요.”

 “커피 부탁해요. 아아로다가."


 주인장은 귀찮다는 듯이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려줬다. 내리는 와중에도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뭘 보는지 궁금해서 슬쩍 훔쳐봤지만 엿보기 방지 필름이라도 붙어 있는지 캄캄했다. 그래 난 대타니까. 아무리 대타라도 그렇지 어두컴컴한 실내는 그렇다 쳐도 문밖에 안내 문구 하나 없는 상태는 당황스러웠다. 플래카드라도 붙여달라는 건 아니지만, 왠지 섭섭했다. 열심히 걸어 다닌 탓인지 목이 탔고 속도 탔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목에 들이붓자 타다 못해 완전히 갈라지던 내 목에 청량감이 돌았다. 칼칼한 짬뽕이 뱃속에서 커피를 만나서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책방은 음악 소리도 없고 유난히 동네가 조용해서 적막이 감돌았다. 할 말도 없었다. 사장님도 날 모르고, 나도 이 책방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어떤 영문인지 책방에 내 책이 보이질 않았다. 아직도 모니터에 푹 빠져있는 주인장은 내 책을 보기나 했을까. 그럴 턱이 있나. 혹시 웹툰 보면서 날 꿰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건가. 내가 작가로 성공해서 복수할 거라고 진짜.


 난 우선 짐을 풀고 중앙 테이블 옆에 앉았다. 한 달간 내 책을 들고 다녔는데 읽기 싫어서 겨울 며칠 전부터 읽은 참이었다. 겨우 다 읽어갔다. 나도 이렇게 읽기 싫은데 누구한테 이 책을 사라고 약을 파냐? 민진아. 난 기억이 가물가물한 글을 읽어나갔다. 당시에는 열과 성을 다해서 내 감정을 쏟아냈는데 지금 보니 너무 과했다. 과장했고 치기 어렸다. 보면 볼수록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나. 너무 쪽팔린대. 아직 북토크까지는 이십 분 정도 남아서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안 오면 집에 갈 수 있겠지. 딸랑딸랑. 내 헛된 바람이 싹을 틔우기 무섭게 첫 손님이 왔다. '오늘 여기서 북토크하나요?' 난 환히 웃으며 잘 오셨다고 추운데 오느라고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건넸다. 주인장은 내게 손님 응대를 맡기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내 책을 읽었다. 이렇게 불편할 수가!


 침묵이 이어지자 나는 곧 어색함을 느꼈다. 잠시 책방을 부유하며 꽂혀있는 책을 다 둘러봤는데 책방 콘셉트가 부재했다. 내가 아는 동네 책방은 죄다 어떤 콘셉트가 있었다. 여행책이라든가 독립출판물만 취급한다던가, 디자인 서적, 영화 서적, 미술 사적 등등. 근데 이 책방은 콘셉트가 아리송했다. 독립출판물도 있고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도 있는데 오래된 고전도 잔뜩 있었다. 주인장을 향한 이상한 불신이 피어올랐다. 주인장에게 몇몇 책에 관해 물어보려다가 어떤 식으로 물어야 할지 몰라 그만뒀다. 절대 나를 환대해주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난 삐지지 않았다.


 북토크는 순조로웠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쓴 책이 도시에서 혼자서 문화생활을 한다는 콘셉트이어서 다들 자기 경험을 공유하기 좋았고, 나도 나대로 늘 고민하는 바였기에 말이 술술 나왔다. 나 스스로 신기할 정도로 말이 트인 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신이 나서 농담까지 섞어 뱉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요즘 벌어지는 사회 재난 상황과 전국에서 벌어지는 집회, 정부 비리와 노동단체의 분열 등 사회 문제로 이야기가 번졌다. 아마 내가 뉴스 얘기를 꺼내서 그랬을 텐데, 심각한 표정을 한 대학생들이 이를 거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가장 일찍 도착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키가 큰 남자분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자기가 인근 청년 단체 소속이며 우리 시대는 작가들이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에 관해 얘기했다. 적극성과는 태도와는 거리가 가장 멀고 사회를 향해 뭔가를 발언할 생각 따윈 일절 없는 나로서는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엥 이 사람 왜 이러지. 난 말랑말랑한 얘기만 하고 싶은데.' 너무 분위기가 가볍나 싶어서, 좀 있어 보이게 말을 해보려고 심각한 주제를 꺼낸 내 불찰이 뼈아팠다. 매가리 없는 말투로 사회를 보던 서점 주인장이 나서 주길 바랐다. 대화 방향을 다시 내 책으로 조정해주기를 바랐다. 근데 그는 내가 책방에 들어설 때처럼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주인장은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말이 도는 게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래서 결국 키가 큰 남자가 날카롭게 꺼낸 질문에 대해 내가 대답할 차례가 왔다. 다들 똘똘한 눈으로 내 입만 보고 있었으니까. 난 현 정부 노동 정책도 요즘 노동자 근로 환경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얘기할만한 지식이 없었다. 난 어떤 사안이든 발언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중시하는데,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건건이 내 생각을 답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적당히 소신껏 할 수 있는 만큼만 얘기했다.


 내 얘기를 끝나자 키가 큰 남자는 마치 진중권처럼 안경을 고쳐 쓰고 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은 붉은 패딩 조끼가 마치 노조 위원회 유니폼처럼 보였다. 머리띠만 매지 않았지, 말투와 다부진 입매는 거의 맬컴 엑스에 빙의한 상태였다. 난 덫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했다. 말로만 듣던 북토크 빌런인가. 그는 국제 금리 상승과 세계 금융위기가 초래한 부담을 청년들이 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현재 부동산 정책이 청년들에게 끼친 악영향에 관해 일갈했다. 북토크가 점점 더 산으로 가는 게 느껴졌다. 산도 거의 히말라야 고봉이라서 다시 내려오려면 산소통이 두 개는 더 필요해 보였다. 쭉 둘러보니 다들 집에 가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왜냐하면 그 누구 못지않게 내가 가장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울이 없는데도 내 난처하고 멍청이 같은 표정이 다 느껴졌다. '내가 다시는 북토크는 하나 봐라. 김겨울 작가가 사회를 봐준대도 안 한다.' 오늘 북토크 대타를 맡기고는 얼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편집자도 원망스러웠다. 내가 교정 교열 대충 해줄 때 알아봤지. 저 망할 사회자는 대체 뭐한 거야.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키 큰 남자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제가 좀 흥분했습니다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말을 할 때 문 앞에 있던 여자분이 기회를 놓칠세라 가방을 챙겨서 떠났다. 그 뜨거운 커피를 벌써 다 마시고 토끼처럼 소리도 없이 토낀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정리해야 했다.


 최근에 억지로 읽은 책 내용에 몇몇 쪼가리 기사 내용을 더듬어서 개인 복지와 국가 발전이 균형을 찾는 법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기본소득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지 발언을 했다.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기려고 했다. 이를 알아챈 남자는 지난주 광화문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한 사건을 봤냐면서 다시 논지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경찰 수뇌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의경들을 이용해서 청년들과 싸움을 붙이고 있어요.' 난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었다.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근데 이번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 주제 같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하지만 그는 지지 않고 이 얘기는 내 책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되지도 않는 개아리를 틀었다. 이 책을 쓴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는 한창때 에미넴처럼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끝까지 정중했던 내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말리면 안 돼. 말리면 끝장이야. 다들 나만 보고 있잖아. 저 빌런을 내가 정리해야 해. 결국 잠시 옥신각신하다가 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을 읽어보셨나요. 위험사회론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요?” 울리히 벡의 이름을 꺼낸 건 나조차도 놀란 우연이었다. 아침에 긴장을 털어내려고 듣던 팟캐스트 신간 소개 코너에서 들은 이름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나는 최대한 기억을 더듬고 내용을 꾸며내서 서구 중심의 산업화와 근대화가 위험사회를 낳았다고 분석한 그의 저서 내용을 언급하면서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하면서 난 내가 아는 바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수법에 능통했다. '나중에 작가로 성공 못하면 약이라도 팔고 다녀야지.' 난 유시민 못지않게 부드럽고 절묘한 말로 그의 난동을 진압했다. 키 큰 남자는 갑자기 급격하게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눈알이 흔들리고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투였으나, 사실 그는 울리히 벡을 모른다는 지점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역시 내가 정확하게 읽었다. 그는 모름에 취약한 타입이었고, 앎을 말하는 것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울리히 벡을 모른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안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가 자신이 유식하다는 사실과 박식함을 강박처럼 표현해야만 하는 게 약점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건 나와 비슷한 약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와 동종의 빌런이었다. 이 아는 척 대잔치의 피해를 본 건 내 책을 읽은 북토크 참가자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죄송할 뿐이다.


 독서 모임을 자주 하면서 느끼는 건데, 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 힘을 얻었고 할 말이 없을 때 기운을 잃었다. 고치고 싶은 고질병인데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지적 허영이 내가 독서를 하게끔 압박했다. 이름난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들고 나오면서 나는 안도했다. '이걸 읽고 또 어디 가서 아는 척해야지!' 나는 내가 모르는 얘기를 뱉는 빌런 앞에서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고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다시 허영으로 되갚은 것이다. 허영 곱하기 허영은 매우 큰 허영일뿐인데.


 그는 내 공격을 가뿐히 넘어서서 대화 주제를 지방 일자리 문제로 국한했다. 그는 지방의 중요성을 인정받는 게 시급하다면서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주의, 지역 경제를 바탕으로 한 계획 경제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하나같이 이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었다. 난 어쩔 줄 몰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주제와 관련된 내용과 인물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런 주제를 다루는 법을 훈련받지도 않았고 익숙하지도 않았다. 단지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제야 보다 못한 책방 주인은 짜증이 난듯한 목소리로 책 얘기나 하자고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책방에서 누군가가 '울리히 벡은 제가 대학원 논문으로 써서 잘 아는데, 그는 위험사회론을 마구잡이로 가져다 쓰라고 얘기한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면 난 아마 바로 고개를 숙이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만큼 아는 척은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다시 내 페이스를 찾고 몇몇 분에게 질문까지 받으면서 북토크를 무사히 매조졌다. 너무 감사하게도 북토크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열 명 남짓한 분들이 내 책을 모두 사주셨다. 나와 사진도 찍어가고 오늘 시간이 좋았다면서 격려도 해주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빌런으로 보였던 키 큰 남자분의 사과도 받았다. 아까는 자기가 조금 흥분해서 죄송했다며, 울리히 벡의 어떤 책을 보는 게 좋을지 물었다. 난 울리히 벡의 책은 다 좋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낯이 뜨거워서 더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고개를 숙였더니 그의 허름한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거리 곳곳을 오가며 행동하는 사람일 테지.


 집에 가는 길에 울리히 벡을 위키백과로 찾아봤다. 훌륭한 업적을 지닌 분이었다. 뭔 소린지 통 알아먹기가 어려웠다. 아 씨발 개쪽팔리네 진짜. 2호선을 타고 문 앞에 기대서자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마포대교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왜 나는 모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할까. 잘 모르니 죄송하다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나는 대체 왜 항상 이 모양일까. 너무나 간절하게 타인의 칭찬을 갈망하는 본심이 두려워서 오히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내쳐지는 느낌이 들까 봐 두려운 걸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한 걸음 다가가다가도 즉시 물러설 태세를 갖추는 것일까. 힘든 일이 생겼을 때도 언제나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한 척 웃는 걸까. 이러니 내게 모질게 구는 이들을 위한 합리적인 이유를 내가 먼저 나서서 깔아주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전하고, 지적 허영은 함정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울리히 벡님.



사진 출처 : 영화 노팅힐 스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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