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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4. 2022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여름으로

 최근 출장을 갔다가 몇 해 전 헬스장을 같이 다녔던 회사 동료와 마주쳤다. 이름이 뭐더라. 아주 반갑게 손을 붙잡고 인사를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거리끼는 게 있었다. 십 년이 넘은 터라 생각이 잘 안 나서 되도록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 안주를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 일하던 누구였지. 헬스장에서만 친했던 사람은 운동복을 벗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얼굴을 유심히 보니 코 주변에 뾰족하게 부어오른 작은 부스럼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전날 술을 잔뜩 마신 모양이었다. 그래 저 붉은 얼굴.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밤만 되면 술을 마시러 간다고 했지. 자기는 술 마시려고 운동한다고. 음주가 삶의 유일한 보람이라는 듯이 과장하는 그런 타입. 그래서 넉살 좋고 목소리가 걸걸했던 이 자 이름이 뭐더라.


 출장차 온 세미나에는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공복에 뷔페로 제공되는 점심시간만 기다리다 보니 회의실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전날부터 와서 진탕 술을 먹고 출근한 이도 적지 않았다. 아침부터 열차를 탄 나도 다르지 않아서 몰래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나온 참이었다. 뾰루지를 열심히 긁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굴에 다 티가 났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아닌데 얼굴 전체가 부어 있었다. 칙칙하고 부스스한 머리도 한몫 거들었다. 전체로 보면 옷도 멀끔하고 운동으로 가꾼 몸매도 날씬했는데 그 붓기 때문에 사람이 천박해 보였다. 그는 내게 물었다. '요즘도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난 일이 바빠서 잘 못 간다.' 저도 '바빠서 깨작거려요.' '난 요새도 애들이랑 열심히 먹고 마시려고 러닝머신만 기웃거려. ' 그의 너스레에 몸에서 닭살이 돋듯 형 이름이 떠올랐다. 태주 형 그래 태주 형이다. 연이어 형 친구들 얼굴까지 떠올랐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오는 용의자처럼 생긴 우락부락한 그 얼굴들.


 태주 형과 난 체격도 비슷하고 운동 강도나 헬스장을 가는 시간까지 비슷해서 서로 합을 맞춰 운동했다. 환상의 짝꿍처럼 잡아주고 끌어주고 격려도 하고 빨가벗고 샤워까지 같이했지만, 서로 잘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운동만 열심히 하고 헤어지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운동을 하고 기분 좋게 밖을 나섰는데 형이 자기가 친구들이랑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삼각지 거리는 오르막에 있어서 야경이 아름다운 가게가 많았다. 평소에 술집과는 인연이 없어서 가보지 못하던 차에 태주 형의 제안은 솔깃했다. 왠지 그날 밤은 그냥 집에 가기 싫었다. '가자니까, 민진아. 지금 들어가면 모해. 이 날씨에 집구석이 웬 말이냐.' 축축하게 젖은 그의 머리가 흉측했지만, 이 날씨면 따라가 볼 만했다.


 3층 야외 테라스 술집에 앉아 경치를 보면서 멍을 때리던 내게 형은 묻지도 않고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오분 단위로 속속 태주 형 친구들이 도착했는데 죄다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생겨서 재밌었다. 가다마이에 큼지막한 시계, 명품으로 보이는 지갑까지. 내가 사회에서 한몫 거들고 산다는 티를 내려고 열심이었다. 어쩌면 옆자리에 추파라도 보내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지. 그들은 매주 보는 사이라고 했는데 마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이십 년 만에 상봉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인사를 나눴다. 내게도 반갑다고 악수와 함께 포옹했는데 위압감이 들어서 그냥 바닥에 메칠 뻔했다. '어 반갑네. 얘기 많이 들었어. 그렇게 운동을 잘한다고. 반갑다. 반가워.' 그들은 토크쇼 진행자처럼 우리가 하는 대화를 엿듣고는 바로 토론의 본진으로 끼어들었다. 곧 마흔에 접어드는 양반들이 큰 맥주잔을 기울이고 어린애처럼 발랄하게 음담패설을 뱉고 떠드는 게 우스웠다. 운동과 술로 이루어진 동호회 같은 거였는데, 매사 모든 게 긍정할 것투성이라는 투였다. 처음에 홀짝이던 나는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덩달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에일이랑 라거를 오가면서 예상외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그렇게 동호회 안에서 막내가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일행 중에 성대 형이 나와 태주 형을 자기 집에 초대했다. 성대 형은 태주 형보다는 술은 멀리하고 운동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타입이라서 나와 잘 맞았다. 성대 형 집이 당산 쪽에 있었는데, 다가구 오피스텔이었다. 건물은 더없이 깨끗했지만, 녹색 매트가 깔린 복도는 낡고 허름해 보였다. 문자에 적힌 대로 난 901호 앞에서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집 안에서 정체불명인 음악 소리가 쿵쾅거렸다. 저녁 7시인데 벌써 술을 마시면서 노는 모양이었다. 난 셔츠 주름을 펴고 머리를 위로 넘기면서 약간 긴장을 했다. 이런 자리에 익숙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사실 내가 왜 그런 불편한 자리에 참석했는지 잘 모르겠다. 퇴근했으니 속 편히 커피나 마시면서 책을 읽으면 짱땡인데 왜 따라갔을까. 가입 신청도 안 했는데 벌써 정회원인가.


 소리가 묻히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초인종을 길게 눌렀다. 안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집 안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 생기 있는 얼굴을 지닌 여자였다. 성대 형이 평소에 얘기했던 자기 여자친구로 보였다. 언뜻 볼 때 성대 형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 집 안에서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 형이었다. "민진이 왔냐." 여자가 바로 표정을 풀더니 말했다. "어서 오세요. 지금 배달한 거 다 와서 막 먹으려던 참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색함을 숨기며 주섬주섬 들어가는데 처음 남의 집에 가는데 뭐라도 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놀러 가 본 적이 없다 보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뻘쭘하게 들어가서 소파에 앉으려는데 성대 형이 불쑥 내게 말을 꺼냈다. “너 올 때까지 계속 네 얘기했다. 네가 블로그에 쓴 글이 좋다고 다들 난리네. 너 책 내도 되겠다. 운동을 그렇게 하면서 언제 그런 글까지 썼다냐.” 평소에 나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던 태주 형도 내 글이 좋다고 아우성치었다. '쟤는 운동하면 바로 책 싸 들고 집에 가. 지가 무슨 선비인 줄 알아.' 성대 형 여친도 칭찬을 거들기 시작했다.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의례적인 칭찬에 힘을 얻었다. 다들 날 둘러싼 채 호감을 품은 채 대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쪽 다리에 양손을 올리고 소파 뒤로 기대선 채 맥주를 홀짝이던 성대 형은 내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도 처음으로 환대받을 수 있음을 경험시켜준 사람이었다. 사람들 마음에 들기 위해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내가 왜 먹지도 않는 술 모임에 이렇게 참석하고 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내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상황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대접받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날 예상치 못한 대접에 나는 기운이 났다.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근심이 사라지고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정중하면서 친근한 태도로 행동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는 나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 대화에 거리낌 없이 끼어들어서 직장에서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 유머를 던졌다. 요즘도 난 가끔 이때 자리를 떠올리며 힘을 받곤 한다. 자신감을 찾아야 할 때 떠올리는 시간이다.


 술자리가 점차 무르익어 갔다. 성대 형은 우리를 위해 계속 배달 음식을 시켰다. 오피스텔 벽에는 형이 등산할 때 쓰는 등산 기구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우린 보드게임도 하고 DVD도 보면서 놀았다. 성대 형에게는 영국 배낭여행에 관해서 물었고 성대 형 여자친구에게는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다른 형들도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태주 형은 바쁜 일이 있는지 베란다로 나가서 한참 동안 담배를 피우며 폰을 보고 있었다. 신경이 쓰였는지 성대 형이 태주 형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던졌는데 어쩐지 시큰둥했다. 얼마 못가 태주 형은 담배 산다고 편의점에 가서는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난 입이 아플 정도로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열 시 가까이 먹고 마시다가 2차로 근처 술집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태주 형 생각이 났다. 성대 형이 말했다.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뭐 또 삐진 거 있나.' 나도 뭔가 이상해서 짐을 챙기고 카톡을 했다. “태주 형한테 전화 좀 해볼게요.” 성대 형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되뇌었다. "걱정하지 마. 가끔 이래." 나는 상기된 얼굴로 급히 1층 세븐일레븐을 찾았다. 편의점 앞에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태주 형이 보였다. 편의점 앞 테라스에 앉아 한 발을 의자에 올리고 몸을 뒤로 잔뜩 젖히고 있었다. "형, 모해요. 지금 다들 2차 가는데, 어서 가요. 무슨 일 있어요?" 그는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늘어지며 말했다. "난 집에 가게."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니야. 오늘 컨디션이 별로네." 딱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유쾌한 형이 이렇게 시무룩해지다니. 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여자친구랑 싸웠나. 아니면 성대 형이랑 싸웠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던가.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아서 그런가. 처음에는 날 재미로 데리고 갔는데 내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짜증이 났나. 내가 뭘 잘못했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흔들더니 택시를 잡아탔다.


 그날 이후로 태주 형과 멀어졌다. 헬스장에서 마주쳐도 우린 서로 다른 운동을 했고, 얼마 후에는 태주 형이 아예 안 나왔다. 이후로 모임에도 날 초대해주지 않았다. 따로 성대 형에게 연락해볼까 생각했지만, 왠지 태주 형을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 그만뒀다. 크게 실망했다. 이유를 몰랐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갈등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너무 순순히 물러나는 내게 실망하기도 했다. 아니 잘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정도로 그들과 가깝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다 변색하여서 이렇게 미련을 갖고 툴툴거리는 걸지도.


 일찍 일을 시작한 내게 태주 형이 만들어준 공동체는 생에 처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친밀한 기분을 안겨줬다. 정말로 생애 처음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마땅한 친구가 없었고, 일을 시작한 후로는 늘 혼자였던 내게 그들은 완전한 세계를 선사했다. 풍성한 형들 곁에서 막내 역할을 할 수 있는 모임 자리는 내게 소중한 장소였다. 난 제대로 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한 셈이었다. 이후로 난 전과 같이 커피집을 전전하며 글을 쓰고 독서하며 혼자 놀았다. 영화관에 가고 배고프면 혼자 가츠동을 사 먹었다. 눈치를 보면서 사장님, 밥 리필이요!라고 외쳤다. 친구 하나 없는 직장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겪었다. 친밀한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이 다시 혼자가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전까지 혼자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다정한 맛을 본 터였다. 태주 형은 내게 단절의 상처를 남겼고, 순수한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안겨줬다.


 세미나는 곧 점심시간이 될 참이었다. 난 점심을 먹기 전에 집에 갈 생각이었다. 태주 형은 줄이 길어지기 전에 뷔페에 먼저 가있겠다고 했다. 우린 마치 내일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횡단보도에 서서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내뿜는 소음에 젖어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오래된 음악을 틀었다. 살짝 옆을 보니 건물 안에서 태주 형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태주 형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처럼 밝고 따듯했다. 어딘지 모르게 섭섭한 추억이었지만, 어찌 됐든 내가 틀림없이 분명 행복한 길로 나갈 수 있다고 믿던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생활이 궁핍하고 머리는 텅 비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넉넉하던 시절의 인연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술을 잔뜩 마시던 태주 형이 어떻게 사는지 잘은 모르지만, 무사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오늘 밤도 어쩌면 태주 형은 성대 형과 여자친구를 불러서 시끄러운 술집에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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