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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9. 2022

지금 끝나면 좀 아쉽지

 언젠가 아침에 눈이 잘 안 떠져서 혼잣말한 적이 있다. '아 좀 일어나라고 병신아!' 전날 헬스장도 안 가고 딴짓거리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새벽에 깨어서 라면을 먹고 유튜브에 홀려서 몇 시간을 축내다가 아침에야 겨우 선잠을 잔 탓에 내 자기혐오 수치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이렇게 말해줬어야 했다. '넌 좀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더 쓸데없이 보내도 누가 안 잡아가.' 하지만 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너무 나약해. 지금 이 꼬락서니를 봐. 으아아아(고함)'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되어야 하는 나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효율과 발전을 테트리스처럼 잘 쌓아서 격파하지 못하면 초조해한다. 그럴 때 내가 만트라처럼 외우는 라틴어가 있다. 메멘토 모리. 입속으로 몇 번이고 맴맴. 미친 사람처럼 중얼중얼. 한밤중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을 때나, 식탁에 앉아 입 안 가득 흰밥을 집어넣고 있을 때, 대체로 내가 멍할 때 나는 죽음의 유혹에 솔솔 끌려 들어간다. 오줌발은 졸졸 밥알도 쩝쩝 시간마저 슬슬 소멸로 흐르지 않던가. 나뿐 아니라 이놈 저놈 다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피식한다. 삶이 무망하다는 걸 상기하면 간절했던 것에서 놓여날 수 있다. 아니 운동화를 끌러 내는 것처럼 느슨해질 순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죽음은 이상한 순간에 날 구출해낸다.


 살다 보면 수습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바짝 곤두선 채로 화를 내고 거북목증후군이 생길  같은 자세로 다리를 떤다. 초조하게 달달달. 별거 아니긴커녕 별스러울 때. 그때 '메멘토 모리' 직방이다. 몸에 힘을 풀고 등을 의자에 기댄 후에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다음 주쯤에 소행성이 충돌할 위기가 닥쳐와서 다들 유서를 하나씩 쓸지도 모른다.(나는  글을 내밀 생각이다) 펜잘이라도 먹은 것처럼 편두통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죽음을 다룬 책을 굳이 찾아서 읽는 것도  놓여남이 가져다주는 안식에 있다.   쓴다는 작가들은 적는다. '뭐라도  것처럼 우쭐대지 .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까.' 일순간의 감탄!  기운이  달아나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죽음의 . 그래 씨발 별거 없잖아. 시발점이 있었으니 마침표도 있을 거라는 믿음. 이야기는 닫힌 구조 안에서 완전해질 것이다. 물론 늙는  무섭고 노화에 따른 질병은 삭막하지만 나만 겪는  아니니 되려 힘이 난다. 정주영이나 이병철이라고 별수 있었겠나. 유격 훈련받을  이놈 저놈이랑 어깨를 두르고 조금만  버텨보자고 눈을  감았었는데 그때 실눈을 뜨고 옆을 봤을  구원이 있었다. 나보다  죽을  같은 신음을 내고, 어쩔  몰라하는 개구리들의 표정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우린 같이 죽어가고 있구나. 같이 죽어가다가 같은 밥을 먹겠구나. 죽음도 아마  정도가 아닐까. 이놈 저놈과 부대끼다가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함께 개울에 뛰어들 것이다. 조금  버티는 놈도 있고, 어디서 구명조끼를 구해오기도 하겠지만 그래봤자다. 사실이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먹을 커피부터 생각할  있다. 그냥 가면 아쉬우니, 가기 전에  모금 하자.


 평균 수명으로 따져보면 난 앞으로 기껏 오십 년 남짓 더 살 것이다. 그것도 차 액셀러레이터를 지금처럼 팍팍 밟으면 장담하기 어렵다. 지난 37년이 별로 길지 않았으니, 남은 세월이라고 천천히 갈 리 없다. 마음이 바쁘다. '어서 더 놀아야 하는데.' 그래서 내일 죽으면 무척 아쉬울 것이다. 난 이 년을 썩히느니 돈 벌면서 의무복무를 채우느라 장교가 되었고, 단순히 독립해서 돈 벌고 살려고 글 대신 컴퓨터를 전공했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나 직장생활이 붕 떴단 생각이 든 것이고, 지금도 내로라하는 환경 안에서 일하면서도 흥미가 안 가는 것일 테다. 흐릿하게 시간만 죽이며 멍하게 있으니 퇴근하기가 버겁다. 무관심하니 성의가 없다. 밥값을 해야 하니 적당히도 어렵다. 내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우습지만, 명백하게 진심이다. 지금 죽으면 내게 좀 미안할 것이다.


 난 긴 세월 운동을 꽤 해놔서 아직 놀 기운이 창창하다. 지금도 틈틈이 잘 놀고 있다. 이 글은 출장 가는 기차에서 쓰고 있는데, 월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다들 시체처럼 눈을 감고 존다. 나 혼자 책을 백 쪽 가까이 읽으면서 잡지 꼭지를 하나 끝내고 이 글까지 끼적이고 있다. 그간 잘 가꿔온 덕에 앞 좌석에서 개저씨가 내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고 옆자리에서는 인자하신 할머니가 표고버섯 말린 걸 내 입에 밀어 넣어도 난 잘 놀고 있다. '총각이 너무 잘 먹네. 떡도 좀 먹어봐. 물티슈도 줄까.' 난 웃으면서 고분고분 다 받아먹었다. 다 먹으면 끝이 날 것을 알기에. 이처럼 기초 체력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평온하다. 무엇이 날 평온하게 하는지 이제 좀 알 것만 같다. 조급하지 않다. 난 고요한 것이 주어지면 꽤 잘 사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신이 나서 외치는 고함에 들뜨기보다는 조금 비켜서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줄 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서 겨우 찾은 즐거움인데 조금 더 즐기고 싶다.


 난 멀리 있지만 관심을 보이는 관찰자로 살았다. 깊숙이 개입하진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으면서 구시렁거렸다. 때로 놀라고, 때로 즐겁고, 때로는 짜증 내는 통에 재밌었지만, 어디에도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안 하고 살았다. 사고하는 일은 즐겼지만, 삶에서는 수동적으로 반응했다. 그저 사람들이 지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팔짱을 끼고 속 편히 상상했다. 올드보이에도 비슷한 대사가 있었는데.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존나 용감해질 수 있어." 난 지나치게 상상만 하며 살았다. 그렇다고 견디면서 살아온 건 아니고 무던한 척하면서 구석으로 도망쳤다. 틈만 나면 딴짓했다. 그게 내가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었고, 지금까지 꽤 잘 통했다. 한데 그게 요즘엔 잘 안된다.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생각해보면 조금씩 부피가 커져서 바깥으로 터지고 있는 것 같다. 내겐 독서하고 대화를 나누는 토론이 무척 중요하다. 글에 관한 대화가 내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차를 마시면서 생각한 것을 털어놓는 행위가 매우 중요해졌다. 일종의 의식처럼 고양감을 가져온다. 글쓰기 모임, 독서 모임을 하면서 삶의 태도도 살짝 벌어졌다. 더 많은 콘텐츠를 다양한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완전히 뒤로 물러설 수 없음을,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상상은 한계가 있다는 걸 실감했다. 내겐 보기 드물게 확실한 변화의 기미다. 죽기 전에 아직 시간이 좀 있다면 상상을 줄이고 좀 더 개입하고 싶다.


 최근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려는  모습에 여자친구는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다.  때도 굳이 팟캐스트를 틀면서까지 이야기와 정보를 구하는  이상하게 보였을까. 근데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다. 생각이 실로 제일 골치 아프고 시간 잡아먹는 일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냥  놓고 즐기기에는  상상을 넘어 망상과 함께 산다.  밖으로 내어놓으면  자리를 잃어버릴 잔혹함과 관능이 솟아오른다. 특히 침대에 누워 있으면 벽지에서 온갖 형상이 쏟아져 나온다. 기예르모  토로의 영화에서나 나올  같은 괴물까지 출현한다. '도대체 눈이  개야!' 독서나 영화는 특정한 방향으로, 작가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좋다. 그러니까 나의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 쉽게 생각하면 오직 나만   있는 독창적인 생각이 좋을  같지만, 생각이라는  쓸데없는 근심이 8할이고, 나머지는 저녁밥의 단백질 함량을 고민하다가 날이 저문다.  책과 영화를 보면서  많은 작가들과 어울리는  좋다. 플롯 속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들을  다른 차원이 열리는 기분이다. 그들과 떠들다 보면 지금 죽기에는 너무 재밌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내 삶을 한껏 더 놀만한 곳으로 끌어올렸다. 나는 아마도 그들 덕택에 수십 년 동안 성공이 불확실한 일에 매달려볼 생각이다. 슬픔과 괴로움 없이 늙기 위해서. 그렇다면 삶이 끝날 때, 좀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난 내 글이 지닌 패턴을 믿고, 그것이 쌓여 생각으로, 이야기로, 진실로 이어진다고 확신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에 의지한다. 이런 느낌은 나같이 평범한 자에겐 보기 드문 확신처럼 여겨진다. 죽기엔 아직 쓸 게 많다.

 끝으로 여생은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해야만 한다는 말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너른 기준을 갖고 불필요한 것들을 솎아내고 있다. 마음이 다칠 때도 있고 마음대로 안돼서 침대맡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하지만 어찌어찌 잘 떨쳐내고 있다. 이기적일지는 몰라도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얘기만 하고 싶다. 골치 아픈 건 질색이고, 난 의무나 책임은 최소한으로 지려고 한다. 이 계획은 계획대로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런데도 이런 마음은 나의 태연한 표정과 잘 어울린다.


커버사진: introduction,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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