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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1. 2022

찬란한 불빛, 젊음이 가득한 세상

 내게는 이태원의 골목길이 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떤 길은 정말로 그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근처 대로가 자동차 물결에 삼켜지고 노포는 프랜차이즈로 바뀌었지만, 골목길만큼은 빗살처럼 빽빽하게 줄지어 섰다. 거리를 빼곡히 채운 다양한 나라의 음식점, 맞춤 양복부터 외국 소품점까지 줄지어 선 가게까지. 어느 길로 들어서던 지루할 새가 없었고, 새로운 정보를 파악하고 나면 다른 길이 열렸다. 골목길을 하나씩 모두 다녀보려면 매주 와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그 모름을 남겨둔 채로 걷는 게 좋았다.


 지금 외국인이 가장 많이 집산하는 서울의 이태원은 여러 문화가 섞여 있다. 과거에도 마찬가지라서 고려 때는 거란족, 조선조 전반에는 여진족, 후반에는 귀화 왜인이 살았던 곳이었다. 이질적인 풍경들이 뒤섞이며 펼쳐지는 낯선 모습을 좋아했다. 가끔 퇴근하고 마을버스를 타고 남산 둘레길 근처에 내려서 이태원 골목을 누볐다. 경리단길에서 남산 인근에 골목길은 내 산책 코스였다. 어려서는 근처에 아버지 회사가 있어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미군 부대 근처의 모퉁이들은 밥 먹기가 참 좋았다. 남산 돈가스와 스테이크, 인도 카레를 즐길 수 있었다. 커피를 직접 볶는 집도 많았다. 한적하게 구획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내겐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특히 가을날에는 명주실처럼 윤기가 자르르한 아침 햇살이 얼굴 가득 담겼다. 날씨 좋은 날 남산을 등지고 선 이태원은 국적 불명의 술집들을 품고 다른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색을 뗬다.


 내가 아는 멋쟁이 친구 민철이이태원에 자취방을 잡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민철이는 애인과 손을 잡고 둘이 다닌 장소를 보여주며 내게 이태원 곳곳을 소개해줬다. 녀석은 훤칠한 , 걸걸한 목소리, 코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향수 냄새가 특징이었는데 녀석의 여자친구는 그거 빼고 다 좋다고 했다. 민철이는 여름에도 라이더 재킷을 입었고, 돼지 목살을 사러 오토바이를 타고 양평에 다녀오곤 했다.  녀석을  따랐는데 그건 아마도 녀석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제멋대로여서였다. 녀석은 쓸데없는  좋아했다.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열심히 만들었다. 고철덩이를 모아서 페인트칠했고,  개인 전시회를 준비한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꽃가게를 하기도 했고, 터키식 디저트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대접했다. 나중에 이태원에 막걸리와 와인을 섞어파는 바를 차리고 싶어했다. 난 녀석이 사는 방식을 이해할  없었지만, 이해받으려고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말할  없는 것을 말하려고  쓰는 녀석의 대화 방식좋아했다. 민철이는 자신이 이태원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흔한 대학 졸업장도 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젊음의 질탕함을 누리며 사는 자기 삶을 자랑하기 바빴다.


 한 시기가 지나자 그런 낭만도 사라져 갔다. 언제부터였는지 이태원이 핫한 동네로 입소문이 나면서 인파가 몰렸다. 멋쟁이들이 많다고 소문이라도 났는지 홍대와 강남 피플이 한강 다리를 건너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까지 이태원을 찾았다. 회사 근처라서 자주 찾던 동네가 도통 발길이 닿지 않는 동네로 변해갔다. 이태원 지하철 역사는 큼지막했지만, 저녁만 되면 꽉꽉 들어찼다. 경리단길은  하나 지나가기가 벅차 보였다. 민철이도 결국 치솟은 월세를 견디지 못하고 방을 뺐다. 녀석은 이태원을 떠나기 전에 문자를 남겼다. 이태원에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기만 굶고 있는  같은 기분이 들어 더는 견딜  없다고 했다. 하남이나 남양주 쪽으로 간다고 했다. 이후로는 이태원에서 녀석을   없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나는 남산에서 회사 워크숍을 했다. 저녁에  끝나고 나이가 엇비슷한 동료들과 이태원에서 밥을 먹고 놀기로 했다. 핼러윈 주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동료들과 한참 동안 구경하며 걷다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작은 식당에 닿았다. 다소 외진 곳이라 골목은 가로등도 없고 조용했는데,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한쪽 테이블의 외국인들은 내가 알아들을  없는 언어로 소리 높여 떠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러시아어인 듯했다. 위스키 잔에 흔들면서 따지듯이 말하던 남자가 지금도 기억난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얼굴을 뒤덮었고, 눈은 짙은 파란색이었다.  킬로는 거뜬히 넘을  같은   장신의 거구였다. 그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같이  일행과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마도  테이블과 합석을 했는지 한국인들도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와인과 막걸리를 섞어 먹었는지 짙은 색 포도주 바틀과 지평 막걸리 흰 페트병이 테이블 밑에 가득했다. 그들이 자아내는 소란은 작은 식당을 압도했다. 일행과  식당  앞에 엉켜 주춤 섰다가 나갈까 하다가 그냥 별일 없겠지 하며 들어갔다. 거구의 가죽 잠바에서 나는 양가죽 냄새가  끼쳤다. 우린 파스타와 피자를 시켰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다섯 명이 옹기종기 앉아서 맥주만 홀짝거렸다. 30분만 쉬다 나설 생각이었다. 그때 일이 터졌다. 거구와  옆의 체크무늬 넥타이를  한국 남성이 실랑이를 벌이더니 어느새 몸싸움이 벌어졌고,  깜짝할 사이에 서로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우리 일행 쪽으로 쓰러졌다.   테이블은 부서졌고,  역시 밀쳐졌다. 다시 비틀거리던  사람은 휘청대다가   테이블을 덮쳤고, 노부부가 봉변을 당했다. 주인은 경찰을 부르는  같았고, 아무도 그들을 말릴  없었다. 간신히 문밖에 나선 나는 거구의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보였다. 넥타이를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패닉 상태에 빠진 우리 막내 직원은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골목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건 이후로  더는 이태원을 찾지 않았다.


 지난 주말, 많은 사람이 이태원 골목에서 목숨을 잃었다. 좁은 골목길은 참사 현장으로 변했다. 남다른 사람들이 걷던 거리는 이제 폴리스라인이 쳐있다. 무수한 이의 비명이 뉴스와 SNS를 통해 전해졌다. 당혹감을 넘어 믿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도무지 이렇게 가버릴 수도 있는 법인가. 요 이틀간 어디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아침 신문에 사치와 향락에 물든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향한 경고라는 어느 칼럼의 문장을 보고 속이 뒤집혔다. 잠시 분노가 차올랐다. 대체 그곳에 누가 있었던 건지 알고나 하는 말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차곡차곡 쏟아지는 일상을 마주하며 오늘 하루를 소화했다. 나는 어김없이 밀려드는 일과 앞서 잡은 약속도 다 소화했다. 고되게 뭔가를 생각하기가 꺼려지는 오후라서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머릿속이 텅 빈 사람처럼 텔레비전과 포털 뉴스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생각할 틈을 갖지 않았다. 제대로 생각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이렇게 멀쩡한 게 맞는 건가 고민하다가 이태원에 관한 감정을 적어봤다. 전적으로 나 스스로 견뎌내기 위한 글이었다. 돌아가는 추이를 똑똑하게 지켜보기 위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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