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언 플린의 소설<나를 찾아줘>의 주인공 ‘닉’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기자다. 뉴욕의 맨해튼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며 당대의 작품을 관람하고 글을 쓰는 닉은 뉴욕의 지성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삶을 산다.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였던 닉의 삶도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간다.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사라지고, 영화 잡지가 하나둘 폐간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하기에 이른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개개인에게 확성기를 주었고, 자연스럽게 저널리즘과 소통하며 영화를 보는 문화도 사그라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여러 개의 영화 잡지가 정류장 가판대를 장식하고, 평론가의 글을 교양으로 여기던 시절이 지나가고 이제는 유튜브가 대화를 잠식했다. 영화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니 읽기보다는 보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에 가면 아직도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영화에 관한 온갖 잡설이 범람하는 와중에도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영화를 깊이 읽어보려는 이들을 위한 책이 있다. 오늘은 영화를 읽지 않는 시대에 영화에 관한 책을 쓰는 작가들을 소개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몇 년 전에 <걷는 듯 천천히>라는 첫 에세이를 펴냈다. 생각보다 반응이 컸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일정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일본 감독답게 그의 얘기를 들어보고자 서점을 찾는 이들이 상당했다. 잔잔하고 때로는 가슴을 후비는 그의 영화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던 관객들은 기꺼이 책을 펴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두 번째 에세이가 출간됐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부쩍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더 나아가 속도전의 삶을 사는 도시인에게 곰곰이 생각하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의 매력을 알린 에세이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자의 윤리와 태도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프로 직업인의 면모가 돋보인다. 정치적 발언을 아끼지 않고, 자국 영화계를 향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젊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책의 양과 질 면에서 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예술관을 상세하게 파고든다. 그가 아마추어 시절부터 TV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연출하면서 쓴 수기들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사랑했던 영화와 영화인에 관한 소회를 들어볼 수 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 전기 형식의 전개가 펼쳐지며,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런 시절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기억의 편린도 들어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와 <걸어도 걸어도>는 그의 어머니가 즐겨 듣던 노래를 극 중 대사와 영화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어머니가 등장하는 신은 대부분 실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모친과 겪은 추억을 바탕으로 한다.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움과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영화 속에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와 완전한 이별이 불가능하듯, 인간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이란 미련과 함께 한 인간을 끊임없이 흔든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는 영화를 통해 어머니와 작별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어떨 때는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적었다. 그에게 영화라는 것은 산자와 망자를 잇고, 남겨진 자는 망자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과정인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어느 한순간으로 가고 싶지만 늘 기억 앞에서 주저앉는 사람의 마음을 회한으로 부를 수 있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기억의 한복판으로 돌아가서 돌이키며 한 번 더 시간을 깨무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영화 주간지 <씨네 21>을 구독한다. 과거에는 차고 넘치던 영화잡지지만, 오랜 시간 명맥을 유지하는 잡지는 <씨네 21>이 유일하다. 잡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꼭지는 지금은 사라진 <김혜리 기자의 영화의 일기>다. 이 코너는 정통 영화 평론과는 달리 에세이 형식으로 풍부한 감정의 결을 풀어 넣는 정감 가는 꼭지다. 김혜리는 관객 외에도 고정 팬이 많기로 유명한데, 섬세한 언어의 조탁은 물론이고 작품의 씨실과 날실을 엮어내서 한 편의 훌륭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솜씨 덕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글로 인간과 도덕과 사회의 문제를 점검하는 학자의 자세로 느낄 수 있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는 김혜리 작가가 그간 기고한 <영화를 일기>를 모아서 만든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효용은 영화와 글이 상보적인 관계라는 걸 증명했다는 점에 있다. 글을 읽으면 영화를 보고 싶고, 영화를 보고 글을 찾아 읽으면 사유의 폭이 더 커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김혜리의 글은 독자가 영화를 향한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지게끔 해준다. 누군가의 글을 향한 최고의 찬사는 어쩌면 당신의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건 김혜리의 글이 작품 안에 머물지 않고 영화에 관해 말할 때 얘기할 수 있는 온갖 트리비아까지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자료조사와 평소 쌓아 둔 인문학적 지식이 영화라는 예술이 현실을 재구성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보통 영화비평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난해한 경우가 잦은데, 이는 분석과 해체라는 작업 자체가 필자의 인장을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혜리는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에서 영화를 온전히 설명해내기 위해 최대한 영화와 포개지는 화법을 구사한다. 이는 창작자를 향한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고, 적재적소에 감독과 스텝의 말을 인용해서 작가 자신의 의견을 창작자의 연출 의도와 대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택한다. 무엇보다 통찰보다는 세심하고 다정한 인식으로 장면 장면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해독해내는 솜씨를 보면 문학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정성일 <필사의 탐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정성일은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다. 지금도 왕성하게 대중과 호흡하며 평론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는 그의 저서 <필사의 탐독>은 그가 10년간 각종 매체에 발표한 글을 모은 첫 번째 영화 평론집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시네필을 세 단계로 규정했다. 영화를 거듭해서 보고, 영화와 사랑에 빠지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접 영화를 만들어 봄으로써 시네마를 향한 사랑을 완성해낸다. 정성일은 드물게도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한 시네필이다. 2009년 영화 <카페 느와르>를 만든 그는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연달아 연출하며 중견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사의 탐독>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기까지 그가 영화를 사랑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가 평론가로서의 부담을 이겨내면서까지 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통감할 수 있는 노작이다.
<필사의 탐독>에는 여러 개의 질문이 있다. 특히 한국 영화계가 어떤 변화의 양상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지속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임권택의 세계로 불리던 충무로가 기존 문법을 완전히 벗어나서 마치 다른 우주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는 홍상수와 김기덕과 함께한 역사를 조망하고, 21세기에 들어서서 박찬욱과 봉준호를 통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지만, 한국적이라는 토속성이 희미해지는 경향을 진단한다. 그는 "영화가 나빠지는 걸 본 다음에는, 세상이 나빠지는 걸 보게 될 겁니다"라는 하스미 시게히코 작가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 영화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고민거리를 던진다. 그렇다면 정성일이 영화를 보며 필사적으로 싸우는 대상은 무엇일까. 결국 질문하는 영화의 힘이다. 관객에게 불쑥 던져지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대답을 이어가는 노력이 한국 영화의 명줄이라고 답한다. <필사의 탐독>은 그런 질문의 연쇄이며, 관객이 그 자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어른의 부탁이다. 영화가 더는 극장의 것이 아니며, 시리즈 드라마와 구분이 점차 어려워지는 시대를 맞아서 시네마가 허구의 세계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조바심도 엿보인다. 영화는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읽고 쓰며 종국에 가서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 짓는 세상 그 자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정성일을 향한 가장 큰 불만은 독자를 주눅 들게 하는 방대한 정보량이다. 밀도 높은 정성일의 문장은 골치가 아픈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촘촘한 논거를 읽어 가다 보면 영화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의 징후와 경향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도대체 영화를 향한 사유는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가 시험한다. 때론 질식할 것처럼 힘들어서 좌절감을 안긴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영화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배움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갖기도 한다. 그는 영화가 그 어느 매체보다 동 시대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크게 멀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영화의 신을 낱낱이 쪼개서 분석하고,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을 영화로 끌어안는 솜씨도 여전하다. 산업과 상품으로 취급받는 영화가 여전히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삶의 지렛대로 삶기에도 손색이 없는 매체임을 보여준다.
메인 이미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스틸 사진, ⓒ '전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