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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23. 2022

구들장에서 귤 까먹으며 읽기 제격인 연애소설

소재 <연애소설>

 사람들은 신데렐라가 인생 역전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근데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장담할 수 없다. 결혼 생활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 어쩌면 더 큰 비극에 목놓아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둥실둥실 구름을 타고 올라가지만,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닥에 비를 쏟기 마련이다. 보통 독자는 해피엔딩을 선호한다고 믿기 쉽지만, 사실 책을 붙든 독자가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 건 주인공의 몰락이다. 영영 행복할 것만 같았던 신데렐라가 재차 추락할 때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힘이 붙는다. 셰익스피어가 왜 그토록 비극의 서사에 몰두했는지 알 만하다. 독자는 물이 고여 있는 우묵한 진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신의 지난 사랑을 반추한다. 의식의 원초적인 바닥에 앙금처럼 남은 이별의 아픔을 길어 올린다. 무릇 사랑이란 낙차가 크면 더 클수록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오늘은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꺼내 놓은 소설들을 소개한다. 깊어가는 겨울, 뼈가 시린 추위를 멀리하고 구들장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보기 좋은 연애담이다. 


제임스 설터 <어젯밤>


 제임스 설터의 소설은 치정과 그에 따른 배신을 주로 다룬다. 그는 미국 중산층 가정이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는지 공들여 묘사하는데, 그 고민의 요체는 안정적인 삶에 감춰진 권태감이다.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부부는 지루함에 빠져 허우적댄다. 고통받는 그들이 무는 미끼에는 성적 욕망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옆집 사람, 회사 동료, 친구의 배우자, 우연히 바에서 만난 취객까지 욕망의 대상은 그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미끼는 전 여친이다. 사랑했지만 어떤 사연으로 헤어진 사이. 바닥을 치지 않아서 아직 미련이 남은 관계. 모든 걸 이루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놓고도 한낱 유혹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들. 그렇게 한 번의 실수가 한 가정을 나락에 떨어뜨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 자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표정을 짓는다. 제임스 설터는 이처럼 한 사람이 가진 내적 결핍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가진 작가다. 파국 이후의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 그의 주특기고, 사랑에 치여 견디기 어려운 혼돈에 시달리는 인간의 소용돌이를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설터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어 명료하지만, 그만큼 차갑고 처연하다. <어젯밤>은 잊지 못한 과거에 발 묶여서 배신을 일삼는 이야기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읽다 보면 이가 딱딱 부딪치는 배신에 시달린다. 첫 수록작인 <혜성>은 필립과 아델이라는 부부 이야기인데, 그들은 친구 부부 집에 가서 식사를 즐긴다. 그 자리에서 아델은 느닷없이 필립이 과거에 저지른 부정을 폭로한다.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어린 여자와 도망쳐 살았던 필립의 과거를 비난한다. 도리 없이 모든 걸 인정하고 절망에 빠진 필립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혜성이 쏟아지는 벌판 위에 서서 망부석이 된다. 다 지워졌다고 생각한 상처가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 올랐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게 더는 없다. 단언컨대 그들은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포기>라는 작품의 구조도 <혜성>과 비슷하다. 한 부부가 ‘빌리’라는 아이를 키우는데, 엉뚱하게도 이 가족은 ‘데스’라는 시인과 한집에 산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데스와 더 이상 자지 말라고 부탁한다. 뜬금없는 추궁에 남편은 극구 부인하지만 어쩌다가 시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는지 다 털어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은 시인과 헤어지는 걸 포기한다. 가정을 놓아버리고 시인을 택한다. 큰 충격을 받고 낙담한 데스는 집을 나가고, 단란해 보였던 가족이 실은 산산이 조각난 상태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진실이 드러나는 걸 조금씩 미뤄왔지만, 욕망의 추는 차츰 금지된 사랑으로 기운다. 이처럼 설터는 남 보기에 그럴듯한 관계를 추구하면서도, 마음속의 연인을 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알면서도 위태로운 선택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설터의 연애담은 고유하다. 가망 없음을 잘 알면서도 어쩌면 잘 될 수도 있었기에 더 아련한 사랑이다. 시작한 적도 없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가짜는 아니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더 진짜처럼 보이고, 상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다 버릴 수 있는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 습관이나 관습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얼마나 지루한가. 설터는 지독하리만큼 냉정하게 관계의 끈을 놓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을 적시한다. 


이언 매큐언 <체실 비치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은 늘 초행길이라 좀체 불안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쿤데라는 리허설도 없이 살아내야만 하는 삶의 부박함을 얘기했다. 그래서 우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친다. 한낱 애처럼 매사 당혹스럽다. 다음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이언 매큐언은 쿤데라의 고민이 폭발하는 지점을 살핀다. 때는 1960년대 영국. 자유로운 삶이 세계를 휩쓴 해방의 시대를 코앞에 둔 시절이다. 자유로워지길 갈망하지만, 아직 보수적인 의식을 벗어던지지 못한 두 남녀가 만난다.

런던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에드워드’는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플로렌스’와 사랑에 빠져 일사천리로 결혼식을 올린다. 드디어 고대하던 첫날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고민에 시달린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섹스에 무능해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플로렌스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섹스 자체가 두렵다. 그리고 리허설도 없이 생방송으로 호텔 침대에 다다른다. 창밖으로는 푸른 체실 비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까마득하게 먼 거리에서부터 흰 물결이 밀려오는 게 보인다. 이제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 부부라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게 있다고 글로도 배우고 풍문으로도 들었다.

살짝 취한 몸을 이끌고 벌건 살과 마주한다. 상상을 통한 사전 모의 시뮬레이션은 실전에서 무용하다. 영상물을 통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도 다 소용없다. 온몸이 저리고 긴장감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무심코 넋 없는 말을 뱉어보지만, 상황만 더 안 좋아진다. 훗날 첫날밤을 추억하며 함께 웃을 나날을 떠올리지만, 지금으로선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무언가 놓쳐버렸다는 생각은 왜 떠나질 않을까.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를 다 망쳐버렸다는 허탈함에 힘이 빠진다. 겨우 이건가, 그토록 고대하던 사랑의 결실이 고작 이 정도인가? 그에게서 손을 떼고 어색함을 감추려 하지만 바닷가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체실 비치에서>는 두 남녀의 첫 경험을 담담하면서도 밀도 깊게 그려냈다. 그들은 왜 실패했을까? 왜 다시는 관계를 되돌릴 수 없었을까? 단순한 오해에 불과했을까? 젊은 부부는 책으로 배웠던 모든 지식이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무도 그들에게 섹스에 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달뜬 감정에 목소리에 언성은 높아져 가고, 휘두르는 몸짓은 점점 더 관계를 망가뜨린다. 두 사람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헤어질 결심에 이른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당의정을 벗기는 과정이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녹음이 우거진 공원은 클리셰에 불과하다.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다분히 동물처럼 느껴지는 본능을 품어내기 때문이다. 스산한 체실 비치에서 그들은 사랑이라는 그릇에 뭐 하나 담지도 못하고 갈라선다. 감정을 토로하는 법을 몰라 맥없이 기회를 날린다. 회한이란 시간이 흘려보낸 후 뭉쳐진 마음이다. 에드워드는 모든 게 금기에 휩싸인 시절의 잔재를 회고한다. 체실 비치에서 떠나보낸 그녀의 팔을 붙들지 못해 괴로워한다.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19살 대학생 ‘폴’은 여름 방학에 본가에 머물면서 테니스를 배운다. 파트너로 ‘수잔’을 만나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두 두 배 이상 더 많음에도 한눈에 반해버린다. 잘 나가는 남편에 두 딸까지 있는 여자지만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점차 만나는 횟수를 늘려가면서 사랑의 도피를 떠나기로 한다. 런던 시내에 둘만의 보금자리까지 마련해서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한다.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은 갑작스럽게 닥친 사랑에 투신하는 이야기다. 무슨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힘겹게 헤쳐 나가는 두 사람은 낭만 그 자체다. 우리는 보통 앞뒤 재지 않는 사랑을 칭송하지만, 그 사랑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줄리언 반스는 기억으로 남은 사랑의 파편을 마구 섞어서 펼쳐 놓는다. 달콤했던 시절이 지나가고 사랑이 식어갈 무렵부터 모든 것이 흩어지기까지 다룬다. 쇠창살을 뚫고 돌진해 오는 눈부신 파편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폴은 왜 스무 살 치아가 나는 여자에게 빠졌을까? 소설에서 묘사하는 수전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어서 엉뚱하지만 그런 자유분방한 사고 때문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폴은 또한 수전의 유머 감각에 감탄하고, 영국의 상류층의 사고방식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니까 아직 미숙하고 덜 떨어졌던 풋내기 폴은 지적이고 위트 넘치는 수전의 지성에 반한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위와 태도가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연애의 기억>은 폴이 한 어른을 만나 그를 경애하고 끝내 완전히 흡수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소설은 초반에 폴의 입장에서 서술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주어 대신 '그'라는 인칭 대명사를 쓴다. 오직 나와 너만 보이던 뜨거운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 냉철한 눈을 가진 관찰자의 시점으로 변모한다. 폴은 시야가 트이면서 제 또래의 삶을 갈망하고, 수잔과 달리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젊은 여성의 품을 찾아 나선다. 수잔 역시 소설 초기에 안전하고 유능한 자기 모습에 관해 자부심을 가졌지만, 폴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점차 시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사랑의 확신이 사그라들자 점점 더 사회적 압박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수잔은 점차 건강을 잃어간다.

폴은 수잔을 떠날 때, 마침내 그녀를 되돌려준다고 표현한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다니. 폴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한다. 수전을 잊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제 역할을 하며 산다. 하지만 폴은 수잔과 함께 살았던 시절을 계속해서 떠올릴 것이다. 사랑이 남긴 행복과 고통, 기쁨과 슬픔이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줄리언 반스는 이 소설의 제목을 'The Only Story'라고 붙였다.


메인 이미지 제임스 설터 <어젯밤> 표지, Duncan Hannah ⓒ 'Catherine Spaak I'(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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