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평 <죽음이 물었다>, 아나 아란치스 저
1. 가깝고도 먼 죽음을 가까이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죽음을 다룬 텍스트가 수도 없이 많다. 내 서재를 거닐어도 죽음이 얼마나 삶과 가까운지 실감할 수 있다. 내 눈과 가장 가깝고 손만 뻗으면 잡히는 곳에 죽음을 다룬 무수한 책이 있다. 그만큼 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직면하면 조금이나마 용감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한 번 사는 인생 향냄새 맡을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냐?' 책뿐만이 아니다. 임사체험을 다룬 으스스한 다큐멘터리도 여럿 봤다. 죽음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눈부신 빛과 혹독한 어둠이 양분하는 세계. 종교화에서 본 대로, 영화가 가르쳐준 대로, 소설에서 읽은 형태 그대로였다. 죽음에도 통념이 있고 흔히 말하는 클리셰도 잔뜩 끼어있다. 마치 UFO를 본 적도 없으면서도 스케치북에 접시 형태로 그려내고, 용은 상상의 동물이라면서 용꿈을 꾸면 여의주를 물고 나타난 신룡을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정말 죽음은 우리 상상대로일까. 죽음은 삶이라는 연극이 다 끝난 뒤에 벌이진 일인데 미리 알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책 <죽음이 물었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을 거니는 책이다. 죽음의 냄새가 진득하게 베인 곳에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작가 아나 아란치스는 브라질 사람이고 완화의료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의사다. <죽음이 물었다>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여타 다른 죽음에 관한 책과 달리 늙음과 마주하는 기백을 지닌다는 점이다. 죽음을 말할수록 삶이 드러난다는 역설이랄까. 죽음은 인간이 평생을 가지는 불안이기에 많은 얘기가 오가지만 정작 죽음의 전조 증상인 노화와 질병은 찬밥신세다. 모든 이의 죽음이 베르테르나 로미오처럼 갑작스러운 요절이 아니듯, 죽음의 길목은 노화에 따른 통증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안티에이징이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현대의 삶에서 어떻게 늙음을 전면적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우린 매일 이별하며 살고 하루하루 죽어가며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유행가로 읊으면서도 죽음이 건네 오는 질문은 마다하는 존재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아나 아란치스는 죽음의 문턱이 생각보다 가뿐할 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완화치료란 삶의 끝자락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 특히 통증을 완화시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의학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어느 누구도 함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죽음의 문턱까지는 이끌어 줄 수 있다는 위안을 준다.
아나 아란치스는 사람들에게 제 직업을 소개할 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고 있어요”라고 얘기하면 순식간에 긴장감이 도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성급히 자리를 뜨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버무리는 사람들을 보며 저자는 죽음이 얼마나 인간에게 꺼려지는 주제인지 실감했다. 창밖 햇살이 또렷하고 도심의 분주함은 활기로 가득한데 죽음을 얘기하면 초를 치는 사람 취급을 한다. 연말의 들뜸에 젖어서 캐럴을 부르는 사람 곁에서 죽음은 꺼려지는 주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건 전적으로 죽음의 과정에 무심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얘기한다. 나 역시 죽음에 관한 무수한 책을 읽어왔지만 죽음에 다다르는 고통스러운 통증에는 무심했다. <죽음이 물었다>를 읽으면서 사실 난 죽음에 다다랐을 때 찾아오는 느낌과 감정을 아예 몰랐기에 더 불안해했음을 알 수 있었다.
2. 죽음을 피하는 현대의학, 대안으로 떠오른 완화의료
저자는 작정하듯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을 택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는 상태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면서 완화의학은 우리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관심했던 사이에 통증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음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육체의 통증 외에 정신의 상흔과 공허감을 매워줄 수 있는 완화 치료사의 역량을 자신한다. 보통 사람들과 얘기하면 공통적으로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족도 친구도 없이 고독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몸이 불구고 말마따나 똥오줌도 못 가릴 때, 죽을 용기조차 없는 나약한 상태일 때 난 어떻게 죽게 될지 막연하게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저자 아나 아란치스는 이에 관해 삶과 죽음의 가교 역할을 하는 전문가가 있으며,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배우면 죽음을 마주할 때 좀 더 초연해질 수 있음을 얘기한다. 죽음 역시 훈련과 배움의 연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얘기하고 마무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계획할 때 죽음이 삶에 편입할 수 있다.
아나 아란치스는 처음 의학에 몸담고 복잡한 병력을 가진 환자와 이야기할 때를 상기하며, 한참 동안 두려움, 죄책감, 바닥 모를 공포를 떨치지 못했던 걸 떠올린다. 저자는 의대 4학년에 대학을 자퇴하면서 뇌 질환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지속적인 상담 치료를 받아왔다. 저자는 고민 끝에 당시 막 떠오르던 완화의료로 목적지를 달리 하면서 의사로서 방향감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나 아란치스는 “사람들은 이유가 존재하는 한 어떤 방식이든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완화의료가 가진 의의를 설명한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의사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외로운 저승길에 동행하며 길을 안내하고 가는 길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 요즘 의사들이 아픈 환자의 모습을 견디지 못해 사람을 질병으로 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험은 나도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찾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지점이었는데, 진찰을 받을 때 의사는 내 부모를 인격체가 아닌 증상으로 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닌 병의 차도에만 모든 걸 쏟는 기분에 시달렸다. 정서상 문제는 따로 상담사를 붙이려들고, 자신들은 오직 텅 빈 눈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불안에 떠는 사람을 냉철하게 치료하는 게 의사의 본분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한 죽음에는 인격체로서의 대우가 필수적이다. 이에 관해 저자는 외과 의사이자 작가인 아툴 가완디가 남긴 말을 인용한다. “나는 의과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사망은 거기 포함되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마주하는 의사가 정작 죽음에 관해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과 마주치기 싫어서 환자를 회피하고 감정의 문을 닫는 순간 환자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병을 낫게 하는 것보다 병을 인정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현대의학은 잘 다루려고 들지 않는다.
3. 공감보다는 연민,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
의사에게 공감력은 위대한 재능이지만, 환자의 고통을 오롯이 느끼고 앓는 순간 의사 역시 한 인간으로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환자에 지나치게 공감한 탓에 부정맥 등의 증상에 시달리고 점점 더 카페인과 항히스타민제에 의지했던 경험을 고백한다. 환자를 대할수록 불면증과 체력 소진을 느끼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 여기며 버텨냈다. 하지만 아나 아란치스는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공감보다는 연민의 중요성을 몸소 깨닫게 된다. 나 자신과 내 삶을 돌보지 못하고 어떻게 환자에게 손을 뻗칠 수 있을까.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더 중요한 전제조건은 내 몸이 건강해야 네 이웃도 건강할 수 있다는 명령인 셈이다. 연민은 나와 상대를 구분 지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고, 할 수 있는지 아는 이성적인 눈이다. 공감이 온전히 상대에 빠져드는 거라면, 아나 아란치스가 말하는 연민은 상대를 존엄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치료의 가능성을 높임과 동시에 의사 자신도 온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평소 공감과 연민의 차이를 몰라 줄곧 섞어 쓰곤 했는데 아나 아란치스는 공감에도 차이가 있음을 완화치료의 개념으로 서술해낸다.
저자는 죽음의 고통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미래에 대한 계획과 돈을 버는 노동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 한정된 시간을 직업에 빼앗기면 삶에 의미가 고갈할 수밖에 없다. 삶이 미래에만 저당 잡혀 있을 때 죽음은 더 크나큰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없다면, 적어도 미래에 책잡혀서 현재를 희생하는 짓은 멈춰야 할 것이다. 늘 죽음을 대비하면서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울지 미리 결정해 놓는다면 갑작스러운 죽음도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 소중한 건 없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유한한 개념 없이 지금 이 순간이 가치를 갖긴 어렵다. 또한, 삶이 어떻든지 간에 죽음만큼 평범하고 공평한 건 없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어느 삶이든 종결 부호가 있다는 점은 두려움을 안기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누구든지 간에 같은 길로 접어든다는 믿음은 외로움을 떨칠 수 있게 해 준다.
4. 잃고 사는 기술, 상실의 시대
저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개념은 '잃는 기술'이다. 인간은 사람을 사귀고 이득을 보고 강좌를 듣고 책과 영화를 보며 글을 쓰고 기술을 배워서 먹고살지만 정작 뭘 잃고 살아갈지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실의 수용은 그런 의미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곳에서 나온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말고 일상적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우선 내가 고마워할 수 있는 바에 초점을 맞추면서 회한을 떨쳐내는 덕목이 필요하다. 사실 그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만 갈 수 있을까. 카르페디엠은 많이 이들이 우러르는 가치지만 세상의 모든 예술은 지난 시절에 대한 회한에서 나오는 경우가 잦다. 아나 아란치스는 재차 강조한다. 적어도 날 둘러싸고 함께 웃었던 날들은 잊지 말라고. 그러니까 사랑만은 예외라고. 이런 기준이라면 떨쳐야 할 것과 떨치지 말고 담아두어야 할 것들이 분명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사람들이 보통 이야기하듯 세상 모든 것들이 가시적이고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체험들이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말이 들어간 적이 없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예술작품들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며, 그 신비한 존재들은 우리의 작고 덧없는 삶 곁에 영원히 남는다.” 죽음이 물어오는 바에 답을 하는 방법은 예상외로 단순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특히 죽음과 예술을 깊이 생각하며 지낼 때 오히려 삶이 풍성해진다. 예술은 죽음으로 사라진 예술가의 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건 예술의 존재가치에 필수적이다.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우린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죽음이 물었다>를 읽고 나면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말이 더는 치레로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