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1. 올해도 어김없이 노벨상 특수
아니 에르노가 노벨상을 받았다길래 책을 주문했다. '아니! 그녀가 노벨상을 받을 때까지 난 뭘 했길래 한 권도 읽지를 못했나! 무려 17권이나 번역이 될 때까지 뭘 했다니!' 낭패감이 들었다. 열심히 읽는다고 읽는데 못 읽은 책이 여전히 지천이다. 죽을 때까지 얼마나 더 읽을 수 있을까. 우선 아니 에르노라도 빨리 내가 읽은 작가 목록에 올려두고 싶었다. 중고 서점을 둘러보다가 제일 싸게 파는 곳을 찾아서 주문을 넣었다. 근데 며칠을 기다려도 택배가 오질 않았다. '기사님이 요새 날씨가 추워져서 그만두셨나.' 늘 밝은 얼굴로 내게 상자 꾸러미를 건네던 그 환한 미소가 자꾸만 떠올랐다. 갠톡을 해볼까 하다가 그건 아니다 싶어서 출근하는 길에 택배함을 확인했다. '아니! 다른 택배는 잘만 오는데 내 책만 오질 않다니! 이게 무슨 에러노!' 급히 중고 서점에 전화를 걸었더니 내가 주문한 책이 다 품절이란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딱딱해서 소심하게 알겠다고 하고는 끊었다. 쪼잔하게 서점 홈페이지에 악성 댓글을 쓰러 들어갔더니 나와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수상 소식을 듣고 득템을 하러 들어갔던 다른 고객의 원성이 가득했다. 살펴보니 아무래도 중고 서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주문이 갑자기 몰리니 기존에 올려둔 가격을 대폭 올리느라 고의로 품절을 시킨 모양이었다. '아니! 무슨 장사를 이 모양으로 하니!' 열받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한 해에 책 판매가 몰리는 일이 얼마나 있겠나. 나도 흥분해서 호들갑 떨면서 서점을 뒤지지 않았나. 파는 쪽도 흥분했을게 뻔하다. 지금 새 책도 동나서 주문에 들어갔다는데 중고 제품이라고 남아날까. 나는 어서 아니 에르노를 읽은 독자이고 싶은 마음에 서점으로 달려갔다.(정말 뛰어서 갔다.)
노벨상은 누군가에게 대목을 선사한다. 몇 년 전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으로 대부분 판권을 가졌던 민음사가 빛을 봤듯이, 올해는 아니 에르노의 판권을 가진 문학동네와 '일구팔사북스'가 대박이 난 모양이다. 나도 신이 났다. 어서 읽고 어디 가서 얘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 책으로 독서 모임도 신청했다.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은 보통 세월과 단순한 열정을 거론하는데, 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단순한 열정을 먼저 읽기로 했다. 책이 얇고 단단해 보여서 좋았다. 책은 참 이상해서 얇으면 더 만족스럽기도 하다. 손쉽게 한 권을 읽어냈다는 기쁨이 샘솟는다. 특히 이름난 작가의 책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어디 가서 아는 척하기도 좋으니까. 영화도 한 시간 반짜리 먹물 영화가 더 끌리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놈 저놈 냄새나는 영화관에서 세 시간씩 버티기는 싫은 법. 아무리 싸고 이름난 명저라고 해도 지나치게 두껍고 표지가 후지면 읽기가 싫어진다. 아니 에르노의 책은 대부분 깔끔한 판형에 감각적인 표지 그리고 소박한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
2. 가수 이소라
책을 이틀 만에 다 읽고 한 번 다시 읽었다.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니 더 벼려서 보고 싶었다. '이게 다일 리가 없는데. 더 심오한 뭔가가 숨이었을 거야.' 하지만 다시 읽고도 뭔가 숨겨진 함의라고 할 건 없어 보였다. 제목 그대로 단순하게 사랑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분노와 통증이 명명백백했다. 아니 에르노가 아는 건 나도 아는 감정이었고, 아니 에르노가 굳이 쓰지 않은 속내도 내가 유추할 수 있었다. 누가 그걸 모를까. 어쩌면 아니 에르노가 쓰지 않은 것이야말로 개인의 연애사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우리도 한 번쯤은 그렇게 비정상적일 만큼 뒤틀려버린 자신을 마주할 때가 있지 않았는가.
왠지 소설을 읽으면서 화자로 가수 이소라를 떠올렸는데,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소라가 프로포즈라는 공연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자신의 곡 '제발'을 부를 때 울음이 터져서 몇 번을 끊고 다시 녹화를 뜨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아버지가 날 비웃었다. 이소라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도 끝내 노래를 이어가지 못했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으려 하니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졌다. 어린 시절 그 영상을 보면서 난 이소라가 부러웠다. 저런 사랑도 해보는구나 싶었다. 제 감정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다. 내 감정에 취해서 타인의 시선일랑 개의치 않았다. 공연장의 관객도, 방송을 보는 나 같은 시청자도, 재차 연주를 해야만 하는 세션도, 방송국 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이소라는 분명히 그를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 좀 보라고. 너한테 쓴 곡인데 이렇게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슬프게 노래를 부른다고. 그러니 전화를 좀 걸라고. 목소리 좀 들어보자고. 이런 상상 때문인지 난 소설을 읽는 내내 이소라 특유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에르노 역시 자기 소설이 자신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의 마음가짐으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서 승부를 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니 에르노는 이소라의 몸으로 나타나서 날 자연스럽게 현실 세계로 끌어냈다. 시공간이 십수 년 전 파리에서 햇볕이 쨍쨍한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 단지로 옮겨졌다. 이물감 없이 나와 멀지 않은 그런 이야기가 되었다.
3. 대단한 용기
단순한 열정은 뜨겁고 호소력 짙은 문장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유머가 거의 없지만 절절한 문장을 읽다 보면 피식 웃음이 베어진다. 뭘 이렇게까지 무너져내리나. 뭘 이렇게까지 쓰나. 특이한 점은 아니 에르노가 제 글을 오토 픽션 즉, 자전 소설로 명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직 경험한 일만 쓴다고 공언하고는 불륜 얘기에 자기 파멸의 면모를 잔뜩 늘어놓다니 겁도 없다. 아니 에르노는 2005년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후에 커다란 공허를 강렬하게 느끼며 그 결핍을 바탕으로 글을 썼고, 일상생활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었고, 남는 시간에는 글쓰기와 섹스에 몰두하며 무너져 살던 자신을 일으켰다고 얘기했다. '프랑스 사람이라 그런가. 프랑스도 프랑스 나름이지.' 대단한 용기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떻게 이처럼 솔직할 수 있을까. 섹스와 그리움 그리고 반복된 불안이 어두운 씨앗처럼 단단했다.
4. 믿음이라는 방패
주인공 '나'와 달리 남자 A는 그녀의 집을 떠나면 한동안 처와 지내느라 여자를 잊고 지낸다. 나가 더는 견디기 어려울 즈음 찾아와서 몸을 섞고 다시 떠난다. A는 가정을 깰 생각이 없다. 나도 그걸 잘 안다. A는 기다리는 말도 없다.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도 하지 않는다. 나는 감히 이혼하라고 따지지도 못한다. 따지긴커녕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언제 다시 연락을 줄 건지 보채지도 못한다. A의 아내를 질투하지만 내색할 수 없다. 오히려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한다. 어떻게 그를 사로잡았을까. 그리고 철석같이 A가 결혼생활을 지루해하고 처와 섹스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믿는 자는 막을 수가 없다. 믿는 자는 안전하다. 믿는 자는 휘둘린다는 감각이 없다. 덜 사랑하는 쪽이 힘겹기 마련인 연애에서 나가 살아남은 방법이다. 믿음 속에서 여자는 기꺼이 목을 내놓고 복종하며 애걸한다.
5. 단순함
이쯤 되면 왜 소설 제목이 단순한 열정인지 알 수 있다. 추측건대 글쓰기와 섹스로 오직 한 사람만 그리워하면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단순하다. 오직 사랑만 떠올리며 사는 삶은 일상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일을 놓고 끼니를 거른다. A의 전화만 기다리느라 외출을 삼가고, 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비싼 옷을 산다. 병적인 사랑에 계산 따윈 있을 수 없다.
아니 에르노는 마치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소설을 쓴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지극히 정상에 가깝다는 걸 확인받기 위해서일까. 소설 속 나는 슈퍼마켓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 틈에 있을 때 생경해지는 기분에 관해 얘기한다. 저 여자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주말 약속이나 예쁜 카페에서 환담,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거나 머리 하러 샵에 가고, 애들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 애인을 향한 열정이 없는 삶이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니 에르노는 단순함 속에서 진짜 의미에 관해 얘기하려고 한다.
6. 사랑은 왜 사치일까.
아니 에르노는 소설 말미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건 사치라고 얘기한다. 비싼 집이나 보석과 자동차가 아니라 오직 한 사람에게 품는 열정이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은 욕심이다. 사랑이 지나간 후 작가는 더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한답시고 지성을 잃고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더는 지난 열정을 되찾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급속히 식어버리고야 마는 사랑에 투신하는 짓은 무모하다. 상처는 문학의 원료가 되지만 삶을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한다.
7.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구해내는 일
아니 에르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에 관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내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단순한 열정에서도 작중 나는 A와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고 얘기한다.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그의 체취와 숨결을 되살려내는 방식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공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 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 내려간 일기처럼."(60p)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는 제 글을 포르노에 빗댄다. 이는 오직 자위하기 위한 글이라는 의미다. 덧붙여 아니 에르노는 공개할 생각 없이 쓴다고 말한다. 그러니 눈치 볼 턱이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지나간 사랑을 소설로 써서 자신이 겪은 고통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걸 막아선다. 같은 맥락에서 단순한 열정의 말미에 헤어졌던 남자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 화자가 느낀 당혹스러움은 기록해둘 만하다. 화자는 오랜만에 찾아온 남자와 사랑을 나눈 후에 그가 자신이 사랑했던 A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끝난 지 오래다. 오직 기억 속에서만 유효하다. 그 시절의 감정만이 진짜다. 그 사람은 시간 속에서 소실되었다. 시간은 그렇게 힘이 세다.
1940년생 작가의 사랑 얘기가 현재의 나를 비롯한 다수의 독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내게는 기적으로 느껴진다.
커버 사진 출처: 영화 단순한 열정 스틸사진(Passion simple,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