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인간을 다룬 책 3>
토머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악하며, 야만스럽고, 짧다” 홉스는 인간이란 본래 자신에게 내맡겨진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며, 끊임없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일삼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국가의 통제가 없이 인간 본성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박한 평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람의 본성은 착하고 이타적인데, 문명이 인간을 경쟁 상태로 내몰아서 사회가 척박해졌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 보고, 누군가는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다. 이런 상이한 의견 대립은 인간이란 단순히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까. 오늘은 사안에 따라 어느 정도의 이기심과 어느 정도의 이타심을 발휘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신비로움을 탐구하는 책들을 소개한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의 깜짝 베스트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 에세이의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세상이 하나의 위계 아래에서 돌아간다고 믿었던 19세기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좇는 이 책은 하나의 전기이자 과학사, 연애담, 범죄물, 과학이론, 자기계발서, 에세이를 넘나 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무의미가 지천에 흩어져 있는 인간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 이처럼 형식을 분간할 수 없는 책의 정체성은 작가가 다루는 주제가 삶의 혼돈 그 자체라는 걸 떠올려 볼 때 삶의 알레고리로서 기능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찰스 다윈의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를 밝혀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다. 그는 모든 생물종의 진화 계통을 밝혀내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잡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류의 진화에서 교훈을 얻어내려고 했다. 그는 생선 배를 갈라서 인간이 까닥하다가는 열등한 생물체로 퇴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는 자기 확신의 화신이었고, 도태된 자를 자비 없이 포기했다. 자신을 방해하는 자를 정의를 막아서는 반동분자로 치부했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와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인 당대의 학자 스타 조던의 주장은 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다.
저자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을 연구했던 어류가 사실은 과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낸다. 인간의 편의대로 직관을 맹신하는 행위는 비과학적인 것은 물론 오만하고 독선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찰스 다윈이 남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모든 생물이 그 나름의 소중함을 지니고 있음을 상기한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자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하게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러니까 삶은 혼돈에 가득 차 있고 어느 순간 무의미가 차오르며 우린 그저 진화의 산물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충분히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존 그레이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이 책의 원제는 ‘지푸라기 개'(추구)다. 추구는 고대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희생물이다. 존 그레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그저 추구와 같이 여긴다"를 인용하면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이 허상일 뿐이라는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의 환멸 어린 태도는 인간 혐오로까지 나아간다. 그는 인간이 지금처럼 안하무인으로 지구 생태계에 해를 끼치면, 지구는 스스로 자정작용을 발휘해서 인간을 멸종시키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어떻게든 이상 증식한 인간의 개체 수를 줄여내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을 거의 바퀴벌레나 쥐 떼처럼 치부하는 냉소적인 논조는 심히 불편하지만, 존 그레이는 철학과 사회학을 동원하여 허울 좋은 인본주의를 논파한다.
존 그레이는 인간을 ‘호모 라피엔스’(약탈하는 자)로 칭하며, 인간 지성의 최대 정점인 첨단 과학에 회의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불멸이라는 닿지 못할 목표를 위해 다른 생물체에 저지르는 온갖 잔악 행위는 오로지 인간종을 위해서만 기능한다. 언제까지 지구 생태계가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할까? 그 파멸의 헛발질에 관한 인간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반성해 본 적이 있는가? 독자는 그의 시퍼런 독설에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한 존 그레이의 대답은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구원을 요하지 않으니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필멸에 다다를 뿐이니 설치치 말아라. 남은 생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무의미 앞에서 초연해져라. 지속되는 우연에 겁에 질려하기보다는 풍파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직면하라. 이는 다소 허탈한 결론이다. 하지만 인간이 대의라는 명목으로 저지르는 무수한 악행을 생각해 볼 때, 짐을 내려놓고 삶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라는 말은 예상 밖의 위로로 다가온다.
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인간은 과연 이기적일까? 전쟁과 재난 앞에 무력했던 인간의 숱한 실수는 그 이기심에서 발현한 것일까. <휴먼카인드>는 절망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인류에게 희망의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책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이 우리를 여기에까지 이끌었으며, 앞으로도 지속해서 우리를 지켜줄 방패임을 증명한다. 인간의 성악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파리대왕>의 실제 사례를 찾아서 정반대의 결론을 발견하고, 스탠리 밀그램의 잔혹한 실험 역시 잘못된 인용과 확증 편향에 의한 것임을 밝혀낸다.
인간은 악하다는 인식을 걷어내면 항상 연대와 협력을 통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위기를 극복한 인류의 역사가 보인다. 미디어와 SNS는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고 혐오와 불평등을 통해 편을 가르지만, 인류는 현재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학자들이 무력한 인간 본성에 관해 얘기할 때 흔히 거론하는 ‘이기적 유전자’, ‘루시퍼 이펙트’, ‘방관자 효과’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소수자를 보호하고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 사회는 충분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이념과 사회 발달에 몰두하던 시대를 넘어 개개인의 감수성에 빛을 비추는 현대 사회의 감수성은 야만과 점점 더 거리를 벌리는 중이다.
플라시보 효과의 건너편에는 '노시보 효과'가 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악하다고 주문을 걸면 모든 행동이 악해 보이고, 역사는 악함에 증명하는 전방위적인 주석으로 느껴질 뿐이다. 미디어는 인간의 악마성이라는 프레임으로 클릭 장사를 하지만, 누군가 선한 일을 하면 시시한 뉴스로 치부한다. 인간이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고 얘기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듯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휴먼카인드>는 연대와 공감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악함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선하다고 기조 아래 정책과 사회 규율을 짜야한다. 악행을 막아서는 제도는 한계가 분명하니 개인의 의무감을 믿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특히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인간을 선하게 이끌 의무가 있는 지식인들이 오히려 인간을 악마시하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비겁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사진 출처: 영화 클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