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니체가 쓴 '선악을 넘어서'의 첫 문장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저도 모르게 괴물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과 닮아간다는 말은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도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짧은 대사와 함께 등장한다. 최소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자던 이 말은 욕망에 휘둘리는 주인공의 나약한 면모와 함께 흘러나온다. 오늘은 까닥하면 욕망에 휘둘리고야 마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다룬 심리학책을 소개한다.
쌤통의 심리학, 리처드 스미스 저
인간의 어두운 심리에는 교묘하고 모호한 면모가 적지 않다. 사촌이 땅을 사면 당연히 배가 아플 수 있지만 과연 잘 나가던 사촌이 그 땅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면 어떨까. 그것이 부당한 강탈이 아니라 어쩌면 사촌이 평소 보인 오만한 태도로 인한 인과응보에 가까운 고난이라면 또 어떨까. 인간에게는 질투의 감정이 있지만, 남의 불행에 즐거움을 느끼는 부끄러운 기쁨도 있다.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는 누군가의 불운에 쌤통 심리를 느끼는 것을 뜻한다. 작가 리처드 스미스는 우리가 가볍게 느끼는 질투에서부터 밀그램의 복종 실험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인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까지 샤덴프로이데의 감정 안에서 설명해 낸다.
저자는 우선 샤덴프로이데가 자연스러운 즐거움이라는 걸 상기한다. 특히 요즘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비교 대상의 후퇴가 나의 상승으로 귀결한다. 늘 인정투쟁과 존재 가치에 골몰하는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그것이 반사 이익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의 위치가 상승하면 자연스럽게 쾌감을 갖는다. 이는 진화적인 과정에서 갖춰진 본능이며, 이를 통해 우리 선조는 더 우월한 유전자를 획득해 냈다.
저자 리처드 스미스는 대중매체가 샤덴프로이데를 자극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 많은 뉴스가 다른 사람들의 스캔들과 불행에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포맷으로 시청자들을 유혹하면서 점점 더 기세를 더해가는 예능 프로그램은 어떤가. 곤경에 빠진 사람들과 희화화된 일반인 출연자를 보면서 하향 비교가 주는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스포츠 관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편 네 편을 가정하고 싸움을 부추기면서 상대의 패배에 쾌감을 느낀다. 개개인으로서는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 유니폼을 입거나 국기가 걸린 경쟁 안에 들어가면 욕설을 내뱉고 상대를 저주한다. 정파 논리에 휩싸인 정치인과 그 지지자의 상태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고 본능적인 쌤통 심리를 조건 없이 수용할 수만은 없다. 존재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본성을 내재해 있다고 해서 샤덴프로이데를 당위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인간에게는 공감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거울 신경 세포가 존재하며, 타인의 불행에 마음을 쓸 수 있는 선의 역시 본능처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즐거움에 굴복하기보다는 후천적인 의지로 샤덴프로이데를 감추고 제어할 수 있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들, 이언 레슬리 저
저자 '이언 레슬리‘는 쉽게 단언한다. “누군가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꽤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증거다.” 구체적으로 누군가 10억을 벌었다면 그 값어치에 걸맞은 거짓말 솜씨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들>의 저자 이언 레슬리는 거짓말이 삶의 지천으로 깔린 자갈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탄탄한 이론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거짓말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지 이해시킨다. 모두가 거짓말을 비난하지만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관뚜껑에 못 박는 날까지 습관처럼 거짓말을 달고 산다. 이언 레슬리는 심리학부터 뇌과학, 역사, 철학, 예술사까지 종횡무진 넘나들며 거짓말의 생태계를 조망한다.
저자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악’과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배우는 것을 지적한다. 거짓됨이라는 말의 어감을 바꿔야 그 불가피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거짓말이 인생의 필수 불가결하다면, 잘할 수 있는 쪽으로 교육방식을 바꿔야 근본적인 해결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우선 정직한 만큼 거짓말이 우리 삶에 주요한 가치라는 점을 인정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거짓말이 인간을 진화시켰고, 착각이라고 치부하는 자기기만이 삶을 고통에서 구해냈다. 그렇게 책은 말미에 다다르면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거짓말과 예술의 연관관계다. 인간의 만성적인 작화(confabulation) 능력은 예술의 실마리로 여겨진다. 거짓말을 통해 상상력을 발달시키고, 언어의 가능성을 확대한다. 최악의 거짓말은 감추기 급급한 서툰 거짓말이다.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뱉었다가 되려 기분만 상하게 하는 조잡한 거짓말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작화 능력을 개발시키지 못하는 교육제도는 질 낮은 거짓말쟁이들을 양산한다. 인류는 문학이라는 거짓말을 토대로 삼고 그 위에 삶을 축조한다. 꿈속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고통을 해소하고, 끝내 새롭게 발현하는 공상이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드러난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들>은 비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일상이 된 거짓말이 어쩌면 평생 배워야 하는 삶의 태도임을 증명한다.
복수의 심리학, 스티븐 파인먼 저
복수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늘 복수 욕구가 떠다닌다. 애원하는 날 차버린 애인, 주말 내내 작성한 보고서를 찢어버리는 직장 상사, 교실에서 틈만 나면 괴롭히는 덩치 큰 동급생까지. 하지만 사회 구조와 교육 그리고 물리적 감시망이 촘촘해질수록 복수 욕구는 감추기 급급해진다. 복수를 오직 범죄 심리로 취급하고 억제해야만 하는 인간의 악의로 규정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앙갚음은 금기시되고 오직 지난한 사법적인 절차에 의존할수록 복수심은 더 커져만 간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인생에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잘 마시고, 잘 먹고, 잘 복수하는 것.” 이처럼 복수는 원수를 처치하고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는 인생의 동력으로 볼 수도 있다. 스티븐 파인먼은 복수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복수심을 느끼면서 우리가 가진 억울하고 내처진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복수를 부정하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하지만 기대와 달리 복수의 형태는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정치권의 극단적인 정파 논리, 사이버상의 난폭한 댓글까지 복수는 대리전의 양상으로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다. 미디어 역시 복수심을 발현하는 배출구로 기능한다. 복수의 금도를 중시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부터 최근에 큰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까지 예나 지금이나 대중매체는 복수 장사에 한창이다.
불평등 지수가 날로 높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MZ세대가 가진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가는데 복수심을 부정하고 억누르기만 한다면 행복하게 사는 게 가능할까. 과거부터 복수는 집단이 스스로를 지키는 보호책이었다.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는 원칙에 따라 부족 간의 평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처럼 복수는 악행에 대항하는 정의감의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정당한 복수심은 사회적 단죄를 통한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까지 맡아왔다. 오히려 복수심을 비난하고 숨기려고만 든다면 음지의 영역에서 더 큰 분노를 통해 삐져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개의 복수는 미묘하고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사람들이 직장과 공동체 안에서 소통할 때 늘 용인과 아량의 경계를 오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덧붙여 자존심과 모멸감 그리고 계급과 성취욕이 결합할 때 복수는 알게 모르게 한 사람의 내부에 자리 잡는다. 성공한 기업가와 위대한 예술가의 전기를 읽다 보면 내쳐지고 퇴짜 맞은 경험을 자신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을 입증하고 인정받으려는 의지가 복수심을 통해 발현하는 것이다.
출처 :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스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