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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1. 2023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VER. 2.0

 ᅠ내 월급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최근엔 지폐를 쥔 기억이 없다. 수많은 청첩장을 쌩까서 그런 것 같다. '야 5만 원만 대신해 줘’로 퉁치다 보니 사임당 님 뵐 기회가 없었다. 대신 편의점에서 카카오페이를 암행어사 마패처럼 휘두르며 다닌다. 내 돈은 그냥 계좌에서 수치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지, 그 숫자가 0이 되지 않는 이상 삶이 크게 달라질 거 같지 않다. 난 요즘 흔한 주식이나 펀드도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보험도 없다. 그냥 계좌 하나에 쌓아두고 산다. 뉴스에서는 요즘 비트코인과 재개발 지역 땅 투기 열풍이 한창이라던데 내겐 저 먼 시베리아 벌판에 우뚝 선 늑대의 그림자처럼 희끄무레한 이야기다.


 ᅠ오늘 뉴스에서는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삶이 들썩이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작은 액정 화면에 나오는 수치가 삶을 오락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게 기이했다. 하나뿐인 형이 명색이 자산관리사인데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몇 년 전 형의 강남 입성을 축하했지만, 나와는 무관한 얘기로 들렸다. 난 큰돈과는 인연 없이 사는데, 같은 배에서 나온 저 아저씨는 주말에 스터디 모임까지 하면서 억대의 돈이 오가는 주식시장을 분석하고 있다. '어머니 어떻게 이리도 다른 형제를 낳으셨나요.'


 ᅠ그러고 보니 은행에 간 지도 한참 됐다. 은행에서는 달곰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우먼센스나 여성동아 따위의 여성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창구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노라면 속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떠나질 않았다. 왠지 모르게 루저가 된 기분이랄까. 내 관심사는 그보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섹스, 이성을 오르가슴에 다다르게 하는 비법 같은 자극적인 기사에 가 있었다. 나는 요즘도 은행처럼 매끈한 빌딩에 들어서면 기가 죽는다. 대도시 태생인데 마인드가 소작농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나는 쥐꼬리를 우려내서 그럭저럭 살고 있다.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돈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 좋은 아들이자 어느 조직 일원으로 어디 가서 폐 안 끼치고 살 정도면 족하다. 그마저도 쉽지 않지만 내 1인분을 지탱할 수 있다면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 자체가 없다. 어느 카페에 가서든 커피 몇 잔 정도는 마음껏 시킬 수 있으면 족하다. 회전 초밥집에서 접시 색깔을 따지지 않을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연어랑 광어를 원 없이 먹을 순 없는 삶이지만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부당하다는 것 정도는 글로 쓸 수 있는 삶이길 바란다. '그러고 보면 내 처지도 그렇게 나쁘진 않네.'


 ᅠ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읽으니 탈근대는 돈을 주고 경험을 사서 문화 자본을 축적하는 시대라고 하더라.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근데 그건 시대 탓이 아니라 주머니 사정 때문이다.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니 이왕이면 형체가 없는 경험을 사는 게 이득이다. 없이 살면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챙겨야 한다. 어쩔 땐 세상을 사는 게 오직 재밌으려는 싸움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사소한 데 이름을 붙이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후에 의미를 지어내면서, 봐봐 내 일상이 그렇게 지루하진 않다며 당위를 부여한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돈을 쓰는 대상은 한 편의 이야기에 가깝다. 책도 영화도 심지어 그 흔한 샐러드 한 접시를 사 먹으면서도 걸출한 이야기를 짓기 위해 고심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다 늙어서까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한 노작가의 이야기는 어떨까. 환갑이 넘어서도 빵빵한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꺼이 남성 호르몬을 복용하고, 무리해서 무게를 올리다가 바벨에 깔려 죽는 노익장에 관한 얘기. 그러니까 난 이야기를 지으면서 내 인생이라는 서사가 결코 흔해빠지거나 보잘것없지 않도록 애쓴다. 번지르르한 중산층의 삶과는 멀어졌으니 내 곳간에는 이제 예술작품 감상평만 잔뜩 쌓아둔다. 곳간 서랍을 열어보면 어디 가서 썰 풀기 좋은 농담거리가 가득하다. 과거엔 땅 투기든 주식이든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된 건물주가 부러웠지만, 이제는 위트 있게 대화를 풀 수 있는 교양을 동경한다. 그게 좀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그게 더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ᅠ내가 쓴 인생이라는 시나리오는 어떤 무대장치 위에서 펼쳐질까. 매일 그걸 고민하며 산다. 어떻게 해야 읽어줄 만한 드라마가 되려나. 통속극은 질색이니 먹물 냄새가 나면서도 뭔가 끌리는 구석이 있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적절한 예를 끄집어내고, 얼마나 실감 나게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진지하기보다는 아이러니, 역설, 회의를 끌어내는 글이면 좋겠다. 내가 이상향으로 꼽는 작가의 글이 있다면 과거엔 로맹 가리, 최근에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다. 조금 냉소적이고 세련되고 어딘지 모르게 츤데레에 가까운 작가다. '꿈은 높이 가지랬다고 내가 못 할 게 뭐 있나.' 그래서 매일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내고 있다. 신춘문예는 올해도 어김없이 본선 통과도 못 하고 증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엔 돋보이는 이야기꾼이 너무 많다. 서점에서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보며 이를 가는 수밖에.


 ᅠ무질서하게 흩어지는 소설 속에서 미덕을 찾아내길 좋아한다. 내가 한국 단편소설을 계속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도 시대의 재담가가 아이디어를 쉼 없이 제조하기 때문이다. 내 노트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능 있는 자는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라는 문장이 곳곳에 적혀있다.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떨면서 비결 하나라도 건져야 하니까. 글을 필사하는 일 따위야 돈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어수룩한 시인 흉내는 낼 수 있다. 이처럼 마음 같아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지만 일상은 녹록지가 않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해도 신상품 알림이 폰을 가득 채운다. 내게 주어진 길만 가려고 해도 택배 아저씨를 기다리는 마음은 애타고 설레다. 죽을 날이 되면 하늘을 우러러 두 점 세 점 부끄럽기만 할 것이다.  


 ᅠ한 사람의 소비 패턴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다. 돈을 모아서 명품을 사는지, 적금을 드는지, 모조리 여행에 쏟는지, 술값에 탕진하는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다. 효율과 생산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절정과 쾌감에 쏟는 걸 우선하는지도 갈린다. 미국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문자 작품으로 대번에 유명 작가가 됐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튼 이 문구는 쇼핑백처럼 보이는 빨간색 테두리에 붙여져 소비사회의 시각 이미지를 표상했다. 작가의 의도가 어쨌든 나는 이 문구가 현실을 우려하는 시선으로 보이진 않는다. 돈 벌어서 뭐 하겠나. 플렉스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나의 방종한 소비 내역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내 가장 큰 소비처는 헬스시장이다. 정확하게는 항노화이자 연애시장에서의 생존성이다. 그래서인지 지갑이 열리는 포인트는 정서 불안이다. 해마다 운동능력은 감소하고 있고, 체력은 떨어져만 간다. 어릴 적에는 뭐가 됐든 운동만 하면 괜찮은 삶이었는데, 지금은 운동 자체보다는 운동이 가져다주는 상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태가 안 좋다고 여겨지면 소비만이 해답을 쥐어준다. 물신숭배를 멀리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가르침도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상품과 같이 폐기수순이다. 지속해서 떠오르는 의문부호에 번쩍번쩍한 제품이 답을 채워낸다. 나는 젊음을 유지하고 사는가. 나는 남들 못지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이허브에 접속해 보자. 꼭 먹어야 하는 필수 영양소가 그토록 많다니! 나는 여전히 백 치수의 옷을 거부감 없이 걸칠 수 있는 걸까? 라코스테 홈페이지에서 날씬해 보이는 옷을 골라보자. 머슬핏 제품을 사면 등이 떡 벌어져 보인다던데! 오늘 먹어야 하는 단백질량은 다 채운 걸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가공 닭가슴살 제품을 쟁여두자. 마니커! 하림! 요 며칠 식단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럼 어제 한 운동은 말짱 도루묵인가? 이제 헬스장을 바꿀 때가 온 것 같다. 신상 뉴텍 기구가 깔린 헬스장이 어디라고! 과거에 알던 사람이 오랜만에 날 만나면 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얘기해 줄까? 이제 늙다리에 노땅이라고 손사래 치려나? 오만상을 다 찡그리면서 운동을 하는데 그럼 미간에 보톡스라도 맞자. 내성 없는 국산 보톡스 한 통 가격이 얼마더라! 요즘 헬스 유튜버는 다 몸이 좋은데 왜 라면 먹방을 하면서 구독자를 꾀어내는 걸까? 신라면 건면은 괜찮다고! 이토록 다양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 카카오페이 결제는 손쉽게 나를 안정시킨다. 매끈한 상품은 나의 불안을 알아주고 공허를 채워준다. 종교는 인간의 산물이지만 신앙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형국과 다를 게 없다. 과거에는 돈을 통장에 쌓아두는 게 불안의 묘약이었다면, 요즘에는 적재적소에 돈을 상품으로 교환할 때 마음이 은혜로워진다.


ᅠ 카드 명세서를 떼 보니 내 월급은 곳곳에 뚫린 하수구로 빠져가고 있었다. 분석해 보니 카카오 쇼핑 다음이 식당과 카페다. 최근에는 옷도 잘 안 사고 한때 빠졌던 애플 제품 사재기도 치유됐는데 이제 식욕을 주체 못 하고 있다. 나는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외식한다. 무엇보다 체중 관리를 위해 되도록 값비싼 샐러드나 초밥 식당에 간다. 무엇보다 스타벅스에서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결재하고 있다. 나는 커피와 주전부리를 계속 사들이며 카페 귀퉁이 테이블에 빈 접시를 쌓아 올린다. 굳이 집에서 써도 되는 글을 스타벅스에서 각 잡고 쓰면서 작가 행세를 한다. 백색소음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귀를 틀어막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면서 우리 동네 푸드파이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누구나 다 먹고살지만 소박하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며 먹는다는 건 다른 얘기다.


 ᅠ나는 예스24 골드 등급을 몇 달째 유지할 정도로 책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있다. 주말이면 알라딘중고서점까지 걸어가서 굳이 무거운 책을 들고 온다. 다 읽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물욕을 책으로 다 풀고 있다. (다이소 쇼핑만큼 방종하다) 우선 이름값이 있고 표지가 이쁘면 집어 온다. 표지가 무슨 미술 팸플릿이라도 되는 양 내용은 보지도 않고 '어머 내 거야' 하면서 집어 올 때도 많다. 책은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고, 다 읽으면 팔 수도 있는데 왜 이리도 장서가가 되려는 걸까. 책은 나를 꾸며내는 장신구로써 적합하다. 일종의 무대 소품이다. 그 어떤 물건도 집에 두기 싫어서 작아진 옷이나 추억이 담긴 기념품까지 다 당근 마켓에 팔아 젖혔지만, 책은 쌓아놓고 지식인이 사는 집이라는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한 인테리어로 쓴다. 최근에 온라인 모임과 회의를 자주 해서 화상회의를 할 때도 책은 좋은 배경 화면이 되어줬다. 뒤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화상회의를 하면 내가 마치 움베르토 에코라도 된 듯 넉넉한 기분이 된다. 그 자그마한 사각 틀 안에 무엇을 둘 것인지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 준다. 카톡 프로필과 인스타그램 게시물만큼 중요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대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거실 벽에 유명 화가의 프린트물 복제본을 데코로 걸어놓았다. 몬드리안이나 로스코의 작품을 인쇄한 액자를 단돈 오만 원에 구입해서 내 지적 허영을 드러내는 장신구로 삼았다. 난 사각 프레임 안에서도 지식인을 연기하려고 여러 소품을 애용하고 있다.


ᅠ 요즘 같은 미니멀리즘 시대에 소유를 줄이고 내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물건만 남겨두는 과정은 고스란히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각색 방식이다. 내가 아무리 큰돈을 만지는 사람이 돼도 플롯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세간을 가볍게 해서 늘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나라는 사람의 시나리오가 번잡스럽지 않은 노매드의 삶이길 바란다. 최근 뉴스를 보니 결혼과 출산을 바라보는 청년 대다수의 시각이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집값 상승과 근로소득으로는 4인 가족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이 일정 부분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청년 세대는 이런 세태를 문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앵커의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포기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대체로 궁지에 몰려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삶의 궤도를 달리할 거라는 말이었다. 어른이 가르쳐 온 정형화된 삶의 틀을 거부하고 다채로운 경험에 투자하겠다는 말로 들려서 다행스러웠다.


 ᅠ인격을 뜻하는 페르소나라는 단어의 어원이 가면이라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의 연극성은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는 새로운 경험에서 진가를 발휘하니까. 변신에 능할수록 송강호처럼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갈 수 있다. 이는 곧 왜 좋은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한다. 다니엘 카너먼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하고, 그 마무리가 어떤지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정서적 판단을 달리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가령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을 함부로 낙오자로 점찍는 세태는 어떤가. 섣부르게 죽음의 원인을 추측하는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저급한 보도 행태는 괜찮은가. 망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찌라시는 실패한 이야기의 전형이다. 반면 끝까지 자신의 마지막을 살핀 사람은 죽음의 함정을 피해 가기도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로맹 가리는 유서 마지막 줄에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적었다. 내 인생의 서사에서 마침표를 스스로 찍겠다는 의지였다. 그의 기념비적인 죽음은 많은 문학가에 의해 인용되고 살펴져 왔다. 삶은 결국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로 판가름 나는 걸까. 누군가는 연금을 다 털어서 입주한 실버타운에서 평화롭게 삶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벽지에서 글을 쓰다가 피를 토하며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종 직전의 내 곁에는 어떤 물건이 놓여 있을까. 그걸로 내 삶을 어떻게 유추해 낼 수 있을까. 우선 방종한 내 소비내역부터 좀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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