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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0. 2023

오늘 하루종일 맑음

VER. 2.0

 갑자기 휴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에 없던 반차를 내고 부랴부랴 회사 건물을 나서는데 부장이 날 불러 세웠다. '휴가 올렸네. 무슨 일 있어?' '아 갑자기 죄송해요. 집에 볼일이 좀 생겨서요.' 어떤 볼일도 없었지만, 볼일이 있는 사람인 척 서둘러서 외투를 챙겼다. 외투를 천천히 입기보다는 급해서 들고 간다는 제스처가 중요했다. 평소 휴가는 업무에 지장만 없으면 자유롭게 쓰라고 강조하던 차였기에 부장은 아무 말 없이 결재를 해줬다. 클릭 소리가 나자 무섭게 부장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평가 사업은 계획 지침이 아직 안 내려왔나?’ ‘네 상부에 확인해 봤는데, 담당자가 다음 주 초에 내린다고 합니다.’ 그는 애써 웃으며 휴가 잘 다녀오라며 말끝을 흐렸다. 연초라서 동료들은 휴가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초반 이미지가 중요하다 보니 다들 묵묵히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그 흔한 외근 나간 이도 하나 없었다. 나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분위기 맞추다가 작년처럼 연가보상비를 날리긴 싫었다. 올해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휴가를 다 챙겨나가면서도 일은 펑크 안 내는 실속형 얌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몸을 굽신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뭐라도 더 물어볼까 무서워서 미적댐 없이 귀신처럼 빠져나왔다. 누구랑 마주칠세라 계단실을 이용했다. 누가 보면 축지법이라도 쓴 줄 알았을 거다. 계단실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화장실 배수구에 물이 빠져나갈 때처럼 스르륵스르륵 소리가 났다. 비록 수챗구멍처럼 지저분하고 찜찜한 기분이 끼어 있었지만, 막상 회사 밖을 나오니 속이 후라보노 껌이라도 씹은 것처럼 후련했다. 나지막한 괴성을 지르고 친구에게 카톡을 남겼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최고야.'


 ᅠ회사 앞 좁은 골목길에 이르렀지만 딱히 갈 데는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몰라.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글도 쓰고 커피도 마시고 그래야지.' '그래도 휴간데 어디 안 가?' '그러게. 어디 가지?' 휴가를 쓰고 나면 어디라도 가고 싶을 줄 알았지만 갈 데가 없는데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날 리 없었다. 매일 가는 스타벅스로 들어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갈피를 못 잡고 골목을 배회하다가 우선 근처 역으로 향했다. 먼저 삼각지를 떠야만 했다. 4호선과 6호선 갈림길 앞에 놓였다. 놀기 좋은 동네가 많은 황토색 라인을 타기로 했다. 이제 방향을 택할 차례였다. 서쪽과 동쪽. 대충 좌측에는 합정동 우측에는 한남동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망설이는데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도착하기에 주저하지 없이 올라탔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자리가 한산했다. 의기양양하게 톡을 남겼다. '나 마포로 간다.'


ᅠ 지하철은 독서하기 딱 좋다. 고개를 너무 숙이면 목 디스크 걸리기 십상이지만, 백팩에 핸드폰을 얹고 '밀리의 서재'를 켜면 온당한 자세가 잡힌다. 난 내심 유튜브로 시간을 죽이는 치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아니 아르노'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누가 보면 유튜브 일절 안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책 내용은 불륜과 치정의 콜라보라서 격정적인데 왜 난 몰입이 안 될까.' 친구는 바쁜지 답이 없었다. 어쩌면 소설 속 이야기가 내 삶과 너무 멀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파리 중심구에 살면서 점차 멀어지는 사랑에 고통받는 여인의 속내는 내겐 그저 픽션이 가져다준 환상일 뿐이었다. 잠을 깨려고 유튜브로 내 삶과 더 유관해 보이는 여당 당 대표 선거 유세 영상을 봤다. 네거티브 네거티브. 말이 독하고 셌다. 정책 공약은 물 건너가고 상대를 깎아내려서 반사 이익을 보려는 심보가 다 보였다. '아직도 저런 구태의연한 수법이 통한다니.' 하긴 내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항시 남 눈치 볼 거 없이 자족하는 삶을 찬미하는 글을 써왔지만, 휴가 하나 낼 때도 수많은 동료와 상사 눈치를 봐야 한다. 구태의연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유를 갈구한다. 뒤로 험담하면서 앞에서는 뻔한 아첨이나 떤다.


 버릇처럼 인스타그램을 켜고 피드에서 우후죽순 솟는 행복들을 의식한다. 인스타그램에 시간을 탕진하기 싫어서 삭제해도 이러저러하다 보면 다시 인스타그램을 켠다. 내가 인스타그램을 꺼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삶을 구경하면서 내 삶과 견주기 싫어서다. 인스타그램 속 지인이 불행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과장이지만 그렇다고 지인이 행복할 때 온전히 축하해 주기도 어렵다. 그건 꽤 복잡한 심경이라서 인스타그램을 삭제할 마땅한 이유로 보인다. 누구 말마따나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스타그램 피드를 문지르는 손에 주저함과 망설임을 없애기 어렵다. 불행 없는 화면을 보는 내 마음은 행복과 가장 멀어져 있다.


 '역시 휴가는 부족한 수면이나 보충하라고 있는 걸까.' 톡을 쓰고는 잠시 눈을 잠시 감았다가 이번에는 비소설 책을 폈다. 스테판 츠바이크가 전기 형태로 쓴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관한 글이었다. 어린 마르셀은 혹독한 질병을 안고서도 사교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그건 방대한 책을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지하철에서 사람을 구경하면서 이야기를 상상하길 즐긴다. 왠지 거장의 리추얼이 나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마르셀은 불운하게도 불후의 걸작을 쓰고도 사후에야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현대인이 앓는 각종 질병을 온몸에 품고 살아서 생애 단 한순간도 건강할 수 없었다. 마르셀은 사망하기 16년 전부터 자신은 곧 죽는다고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죽음과 가까웠다. 그의 삶은 불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작가는 작가인지 불행마저 문학으로 풀어내서 불세출의 작품을 남겼다. 프루스트는 평소 일이 틀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을 키우는 건 슬픔이라며 고통 없는 인생의 허망함을 얘기했다. 그는 통증이 뭔가를 깨우친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길고 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포갰다. 소설 속 '나'는 어느 날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코끝을 간질이는 홍차 향이 잠든 심연을 떠올리면서 이런 문장을 적었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 맛이었다." 나도 저녁마다 홍차랑 마들렌 대신 스타벅스 커피랑 생크림 카스텔라 먹는데. 이것도 비슷하네. 나도 마르셀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ᅠ엉따가 작동하는 서울 지하철은 겨울에 수면실과 다를 바 없다. 말로만 듣던 프루스트 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들렌 적신 홍차 향 대신 퀴퀴한 돼지갈비 냄새뿐이었지만,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취해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년의 기억일랑 떠오르지 않았지만, 몸이 노곤해지면서 잃어버린 사람을 떠올렸다. 가만히 보니 지하철 좌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건식 사우나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우리 모두 등만 대면 잠이 오는 현대사회의 구성원 아닌가. 나도 상수역을 통과하기도 전에 꾸벅거렸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긴급 케겔 운동을 시작했지만, 졸음 앞에는 삼대 오백을 치는 장사도 별수가 없다. '꽉 쥐었다가 5초 지나고 풀고 릴랙스. 쥐었다가 버티다가 풀고 릴랙스.' 꿈나라로 빠져들면서도 벌어진 입을 마스크가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살짝 떠보니 방송이 들렸다. '이번 역은 망원 망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디스 스탑 이즈...' 평생을 들어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편안한 잠과 어울리는 안내방송 목소리는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삭막함을 녹여냈다. 비몽사몽간에 가방을 챙기고 급히 내렸다. 캥거루 비슷한 동물한테 쫓기는 꿈을 꿨는데 마침 뒷덜미를 붙잡혀서 의식을 되찾은 참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달렸는지 왼쪽 장딴지가 얼얼했다. 꿈에서 '그만그만!'이라고 소리쳤는데 캥거루는 호주 출신이니 한국어를 모를 것 같아서 '스탑'하고 외친 기억도 났다. 그래도 캥거루가 덜미를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내처 은평구까지 갈뻔했다.


 '나 망원역에 내렸어. 뭘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와서 하늘을 보니 요새 보기 드물게 날씨가 맑았다. 동네가 예뻐서 좀 걷기로 했다. 공기 질이 좋아서인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몸에 열기가 돌면서 이게 휴가의 맛인가 싶었다. 남들 다 일할 때 하는 걷기 운동이야말로 도시 산책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 보니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잔뜩 넣고 우즈강에 천천히 스며들 때도 이런 맑은 날씨였다고 한다. 어쩌면 날씨는 그 자체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날씨는 그날의 기분을 달리하는 걸 넘어서서 어떨 때는 한 사람을 인생을 뒤바꾸기도 하니까. 날씨는 모든 걸 차치하고 다 괜찮은 기분으로 둔갑시켜 버리니까. 날만 좋으면 서울도 여느 유럽 도시 못지않게 근사해진다. 착각도 유분수지, 망원동 골목길이 베네치아의 허름한 골목길처럼 멋스러웠다. 운하만 없지 오히려 더 깨끗하고 청량했다. 문학은 생의 대리 체험이라는 점에서 날씨가 일으키는 환각작용과 유사하다. 이처럼 카페와 독립서점이 즐비한 망원역 부근 골목길은 기가 막힌 날씨와 협업하여 다소 우중충했던 내 휴가를 부활시켰다.


 ᅠ포털을 확인하니 서울은 백여 일 만에 미세먼지 수준이 '좋음' 단계로 들어선 참이었다. 미세 먼지 핑계로 집에서 엎어져서 코 닿을 곳에 있는 공원에도 가질 않았다. 오직 공기청정기가 틀어진 헬스장뿐이었다. 비싼 자전거가 있으면 뭐 하나. 기껏 가입한 러닝 크루에는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올해에는 윤중로는커녕 공원 나들이조차 간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한강 둔치에서 쟁반도 던지면서 놀았는데 너무 옛일처럼 여겨졌다. 공기가 나쁘니 통창이 뚫린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창밖 한 번 보지 않았다. 수십 명이 칸막이 사이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놈 저놈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창문 열고 환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만 하다가 삶이 미세먼지만큼 매캐해진 기분이었다. 확실히 미세먼지는 야외활동의 적이자 일상의 묵시록이다. 외출도 제대로 못 하면서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류는 얼마 못 가 먼지 때문에 산책 한 번  마음대로 못 하는 신세가 될까. 미세먼지는 러닝 불참 핑계를 대기에는 용이해서 간혹 친애하는 적이지만, 내 우아한 산책을 막는다는 점에서 다이어트에는 천적이었다. 러닝은 러닝머신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산책은 육체와 정신의 결합이므로 외출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다비드 르 브르통은 제 책 <걷기예찬>에서 산책의 대체 불가능성을 적기도 했다.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은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ᅠ최근에는 산책할 여유조차 없었다. 미세먼지는 좋은 핑계였다. 퇴근하면 바로 카페로 가서 글을 써야 했고, 글을 쓰다 보면 바로 수면 시간이었다. 수면의 끝은 출근과 성기게 맞물렸다. 요즘 유행하는 N잡러 하려다가 일상을 조져버렸다. 새 책에 매달리느라 자주 가던 독서 모임도 빼먹기 일쑤였다. 하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요즘에는 날씨와 무관하게 한 시간에 한 번씩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가 부러웠다. 그들이 자체 발산하는 니코틴과 타르 연기는 자기 파괴적인 해방감이 있어 보였다. 더 독한 연기를 마셔대며 미세먼지 따위를 비웃는 그들은 이 시대의 진정한 연기파다. 옥상에서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호기로운 애연가는 짝다리를 짚고 허연 연기를 입에 머금고는 인생은 짧고 아등바등 살아봐야 별거 없다는 말을 뱉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기껏 팔 굽혀 펴기나 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호방함이 대단해 보였다.


ᅠ 망원동에서 연희동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연희동 부근에 접어들자 신기할 정도로 길이 곱이곱이 나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집 구경 사람 구경하느라 어딘지 살필 마음이 가셨다. 이 부근 부동산 시세가 장난이 아닐 텐데 동네가 무척 소박해 보였다. 소박함도 돈이 많아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서글펐다. 그래도 커피값 정도만 내면 골목길 투어는 가능하니 다행이었다. 어려서부터 걷기 좋은 서촌이나 북촌에서 살고 싶었다. 지금은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인사동부터 통의동까지는 다 느긋한 산책자의 명소였다. 그땐 뭘 몰라서 북촌이니 연희동이니 골목길이 죄다 허름하니 코너에 있는 비디오 가게 알바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 여기가 평당 얼마라고?


 ᅠ연희동을 지나 한참 걸으니 헬스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산책의 청량함이 느껴졌다.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나긋한 바람이 불고 커피가 향긋한 데 가서 멍하게 놓여날 생각이었다. 한참 걷다 지쳐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다리를 꼬고 누가 읽다 버리고 간 한국일보 신문을 읽었다. 내가 평소 구독하는 기자가 미분양 사태에 난 아파트 실태와 요즘 횡횡하는 전세 사기 수법을 심층 취재했다. 안팎으로 온통 부동산 얘기뿐이었다. 집이 먹고 자고 쉬는 문제에서 벗어나 제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물증이 된 세상은 나 같은 노매드에겐 너무 낯선 곳이다. 다 미친 짓이었다. 다리를 풀고 아이들이 그네 타는 걸 구경했다. 뛰어놀기에는 너무 작은, 지자체가 구색만 맞춘 코딱지만 한 공원이었다. '여기 그래도 공원 하나 있소. 봐봐 잘 보면 공원 맞잖아.' 서울 도시계획은 누가 세웠는지 몰라도 아파트에는 관대하지만, 쓸만한 공원에는 각박한 사람이로다.


 바람에 휘날려온 전단에 눈이 갔다. 녀석은 비틀거리다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어쩐지 의미심장해진 난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오픈! 초대박 세일! 헬스 등록하면 요가 필라테스 복싱까지 무료! 주차 두 시간 무료!" 난 파격적인 혜택이 가득한 광고 문구보다 주차장까지 딸린 편의성이 눈에 띄었다. 운동도 차를 몰고 가서 하는 신세라니. 생각해 보니, 내 최근 운동량이 줄어든 이유도 승용차 탓이었다. 어디든 차를 타고 다니니 확실히 살이 더 붙는 기분이다. 물론 내가 살이 찌도록 많이 먹는다는 걸 잘 알지만, 과거에는 어디든 걸어 다녀서 몸이 더 가벼웠다. 요즘에는 집 근처 어딜 잠시 들르더라도 주차장을 먼저 검색하고 나선다. 솔직히 말하면 괜히 차를 사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딜러가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해서 차를 샀는데 막상 나는 차를 잘 쓰지 않는 인간이었다. 차를 사기 전엔 내가 다시는 차를 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근데 이상하게 그땐 차를 사야 할 이유가 1,200,000개쯤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 수 없는 허영심이 돌기 시작하면서 덜컥 구입했다. 왠지 서른 후반에 접어든 내 나이에 걸맞은 차가 필요해 보였다. 때마침 내가 사려는 차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차라는 얘기도 들렸다. 폭스바겐 골프는 내게 문학적인 차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딜러가 황수관 박사 못지않은 달변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설득의 심리학'이라도 읽으셨는지 나는 딜러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막상 새 차를 받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차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 값비싼 오판이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어릴 적부터 포르셰를 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명인 반열에 오르고 고대하던 포르셰를 사고 나서는 오히려 차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포르셰를 타면 포르셰가 보이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고는 그 비싼 차를 친구에게 줘버렸다. 그는 친구가 운전하는 포르셰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따. 진짜 멋지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와 비슷하다. 차를 타면 걷는 거리가 줄고, 걷기가 줄면 유산소 운동을 더 해야만 한다.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데, 비싼 세금을 내고 보험까지 든 차를 그냥 두기도 또 뭐 하다. 차를 막상 보면 너무 예쁜데, 운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다시 팔면 그만이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근데 시세가 꽤 떨어져서 딜러의 감정가가 나를 붙들었다. 내 찰 팔 땐 어디라고 광고하는 업체는 모델료가 비싸서인지 터무니없이 가격을 후려쳤다. 있어 보이려고 차를 샀는데 막상 차를 타지 않아서 골치가 아프고, 없어 보일까 봐 차를 타면 또 차가 막혀서 골치를 썩이니 이거야말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냥 주차장에 박아두고 인증사진 하나 찍고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 보듯 한다. 나도 안다. 이건 스스로 바보라고 시인하는 꼴이다.


ᅠ 쉼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홍제동에 다다랐다. 홍제동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결국 홍제동에 이르러서야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둔 '투두리스트'가 떠올랐다. 오늘은 미뤄둔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야 하는 날이었다. '이제 어디든 들어가 앉아야겠어. 손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 어디로 갈까.' 골목마다 카페가 그득하니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난 다수의 선택지 앞에서 피로를 느꼈다. 우선 따질 게 너무 많았다. 어디 커피 맛이 좋을지, 어디 주인이 친절할지, 어디 의자가 안락할지, 어디 화장실이 깨끗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가방을 고쳐 매고 발길을 돌려 한 번 가본 적 있던 연희동 소재의 비좁은 독립서점 겸 카페로 들어갔다.


 ᅠ한참 미뤄둔 원고 편집을 끝내고서야 책방 귀퉁이에 꽂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표지를 장식했다. 뜻밖의 만남에 반가웠다. 소설은 내 기억과 달리 눈 오는 날씨로 시작했다. 새하얀 눈이 내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추운 날씨에 꼭 붙어서 서로를 쓰다듬어 줄 만도 한데, 두 사람은 짐짓 얌전하게 바라만 봤다. 유심히 보니 여자는 지독하게 못생겼고 남자는 지나치리만큼 평범하다. 못생기고 평범한 연인은 내 불손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정작 두 사람을 못살게 구는 건 바깥 타자다. 나를 비롯한 호사가의 야만스러운 주둥이가 두 사람에게 모멸을 안겼다. 못생기고 뚱뚱해도 압구정 성형수술로 싹 다 뜯어고치면 단숨에 미녀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약을 파는 영화가 명절 영화로 대히트를 기록한 나라 아닌가. 우습게도 난 파반느를 읽으면서 그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라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겹살을 굽던 친구가 자기보다 뚱뚱한 주인공에게 조언이랍시고 비계나 떼먹으라며 통박을 주는 장면이었다. 그걸 유머랍시고 쓴 천박함에 대해 생각했다.


 ᅠ난 가끔 내가 헬스장을 빼놓지 않고 다니는 게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닐까 생각한다. 집착에는 뭔가 들러붙은 게 있을 테니까. 좀 더 솔직해지자면 성적 매력을 바탕으로 하는 연애의 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한 싸움을 지속했다. 뭘 하든 늘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어딜 가든 외모를 본다. 얼평, 외모평을 주의하는 시대지만 그만큼 의식하는 건 외모를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기 좋은 몸은 어디서든 호감이니까. 자존심상 어디 가서는 곧잘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에 관해 멋을 부리면서 얘기했다.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면서 헬스는 더 나은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취지로 떠벌였다. 그땐 그럴싸하게 얘기했지만, 그 ‘나음'이 순수한 운동의 희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다르지 않다. 되려 몸뚱이를 노골적으로 계급의 영역으로 다루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인스타그램 속에 줄줄이 딸려 나오는 멋진 몸을 향한 찬사에 조바심이 나서 아무 생각도 없이 땀을 흘린다. '요즘에는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애들이 더 마르고 날씬해.' 이런 말도 다 외모로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쉬운 소리다. 유튜브에는 다이어트 보조제의 부작용과 스테로이드를 불법 투약을 고발하는 '약투' 운동이 피드로 올라온 지 한참이다. 건강하고 보기 좋은 육체가 미의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안티에이징의 시장에서 인정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ᅠ배가 고파서 근처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당연한 듯 생선 백반이 주문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그래도 생선이니까 건강한 단백질이라며 위안으로 삼았다. 손님이 거의 다 기사분이라 그런지 다들 지쳐 보였다. 서울 시내에서 운전한다는 게 어떤 건지 표정이 말해줬다. 나도 서울 시내 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된 펜대 운전사 노릇을 했더니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써서 두드리는 건 분명한 타격 행위니까. 두드리고 때려서 글을 완성하면 튼튼한 집을 지은 목수가 된 기분이다. '좀 피곤하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테이블이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쪽에 놓여 있었다. 확실히 혼자 밥 먹기 편한 식당이었다. 놀랍게도 칠천 원 가격에 고등어와 장조림에 된장찌개까지 나왔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뉴스를 보며 식사했다. 콩나물무침이 자아내는 참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글쓰기도 엄연히 육체로 밀고 나가는 행위라서 그런지 강렬한 허기가 날 지배했다. 뉴스룸에서는 고위층 인사 비리와 향응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튀긴 생선이 기가 기막히게 맛있었다. 그릇을 치우는 아주머니 손놀림이 어찌나 재빠른지 옆자리 손님이 자리를 뜬 지 10초 만에 새 테이블이 생겼다. 기자를 피해 급히 들어가는 유력 인사의 발걸음은 그보다 더 날랬다. 나도 날래게 밥을 먹어치웠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은 헬스장에 안 가련다. 산책도 엄연히 운동이니까. '153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서 갈아타려고.' 바쁜지 답이 없는 친구에게 톡을 남겼다. 오늘 휴가도 이쯤에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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