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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8. 2023

이토록 평범한 미래

최근 김연수 작가의 책으로 독서모임을 진행 해 발제문을 써봤다.


다 읽고 나니 확실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기운이 있는데 그걸 말로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은 더더욱. 테드 창의 소설을 읽다가 아 테드 창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게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육체와 시간에서 탈출하는 인물을 그려냈다. 거기에는 과학이 있었다. 그래서 '미래'를 자꾸 상상하고 기억하는 이 소설집 역시 일종의 sifi로 봐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다만 과학 대신 순수문학이라는 말에 붙은 그 순수, 먼지가 조금 쌓인 그 순수라는 말이 좀 더 어울린다. 테드 창이 기술의 발전, 이론의 발달로 맞이할 새로운 국면을 상상한다면, 김연수는 그런 수단 없이 오직 간절한 바람, 더 나아가 기도와 같은 의식의 수준으로 아직 접하지 못한 미래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테드 창이 넋 놓고 바라보게 한다면, 김연수는 부디 그렇게 되길,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를 염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 소설 발제를 하면서 이 설정, 29p.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라는 말이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고 싶었다. 이터널 선샤인처럼 우리 관계의 종말이 어떤지 알고 있지만, 기꺼이 다시 관계를 시작하겠다고 말하는 호기인지, 우리의 미래라는 건 늘 평범함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졌다. (1999년 부부가 된 나와 지민은 예언이란 예외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사건이라고 얘기한다) 그 부분을 대화하고 싶다. (세 번째 삶은 다 알고 가는 건데 재미가 있을까. 평범함으로 귀결하는 결말은 모를 땐 살만하지만, 다 알면 견디지 못할 권태 아닐까) 삼촌은 왜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하다고 했는지도 의아하다. 미래를 기억하면 진주의 사연처럼 이해 못 할 일이라는 건 없기 때문일까.


[난주의 바다 앞에서]

정현은 세컨드 윈드를 일찍이 깨달은 사람으로 나온다. 아마도 마라톤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사고가 묻어나는 어휘였다. 사점을 넘어서면 어느 순간 러너스 하이의 순간이 온다. 그러니까 우린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은정은 그렇게 고단하게 살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로기가 되어 쓰러질 걸 알면서 권투 시합을 벌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하고 보편적인 행복의 루트를 따르겠다. 하지만 삶은 은정에게 밭다리걸기를 걸었고, 은정은 세컨드 윈드를 보기 위해 정난주의 바다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점에 몰리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다른 바람이 불어옴을 느낀다. 여기에서 난 정난주의 결말을 각색한 은정의 마음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은정은 난주에게서 어떤 빛을 본 걸까.


[ 진주의 결말]

 이건 누가 봐도 그것이 알고 싶다고 화자는 표창원 아니면 이수정 박사다. 나도 이 프로그램을 즐겨서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단언, 그들의 프로파일링과 심리 분석 그리고 통계로 잡히는 살인의 의도와 정신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살인 동기까지. 그들은 낱낱이 팩트에 근거해서 분석해 낸다. 그런데 정말 그게 진짜일까. 그게 그 사건이 지닌 모든 것일까. 진주는 그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의 팬이라면서도 아무런 개성이 없는 교과서 같은 분석에 반감을 드러낸다.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가 몰리고 있었다는 게 선생님의 전제인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그렇다면 진주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88p.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이 질문은 소설을 내내 떠다닌다.  에코가 붙어서 웅웅 거리며 울린다. 그래서 진주는 그들의 편협한 해석, 자신을 그저 그런 피해자 혹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둔갑시키려는 상술에 자신만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 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이게 진주의 결말이다. 난 이야기로 결말을 다시 쓰려는 진주의 마음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김연수 작가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런저런 책도 많이 읽으시니 소재가 다양하다. 이런 소설은 과거 황석영, 성석제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내가 김연수의 대표작이라고 여기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단편집도 생각난다. 선배 정미의 초대로 같이 술을 마신 그는 그 자리에서 정미를 보고, 십 년 후에 다시 정미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정미를 기억한 실마리는 ‘다 끝났어.’ 카타무 호갸라는 인도말이다. 여기서 다 끝났다는 말은 왜 중요했을까. 아마도 세컨드 윈드와 맞닿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사점을 넘어서면 다다르는 새로운 국면. 정미는 비관주의자가 세상이 나아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 그 이야기는 우리 삶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인도에서 일을 하고 앓아눕고 나서야 정미와의 사랑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임을 눈치챈다. 절묘하게 파고드는 긍정의 낙차다. 비관을 가뿐하게 치고 오르는 희망의 격차다. 이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김연수의 절묘한 작법 덕에 긍정이라는 단어가 힘을 받는 게 느껴졌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확장한다. 그게 아마도 이 소설이 말하는 정신의 힘 아닐까. 난 모임에서 이야기의 힘에 관해 얘기해 보고 싶다.


[엄마 없는 아이들]

 혜진은 낙하산으로 주연배우가 되어 미움받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명준은  혜진은 어떤 표정과 얼굴을 보고 흐르는 얼굴, 표정이 있는 얼굴, 여름의 얼굴이라고 묘사한다. 내가 보기엔 그냥 반한 건데, 거기서 시간을 본 것이다. 시간도 그냥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절을 봤고, 인생의 절정을 느꼈다. 그런 얼굴을 잊을 수 없지. 156p.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명준은 이제 나이를 먹어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고, 혜진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혜진과 마주친 후로 그 시절이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걸 느낀다. 그리고 명준은 자신이 연극이 끝난 후에 울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여름이 끝난 것에. 명준은 왜 울었을까.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이걸 얘기해 보고 싶다. 사랑의 기미가 넘실대던 시절이 가버리고, 우린 끝에 가서 뭘 가지고 있을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동일본 대지진 때도 버젓이 웃으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희진은 세월호 참사 다음 날 벌어진 공연에서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궁금하다. 세월호 때 울었는가. 노래하다 멈출 정도의 오열이었나. 난 슬펐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세상 그 어떤 재앙처럼 넘겼다. 그런데 이후 후속보도에서 많이 터져버렸다. 그들의 문자, 자식을 향해 남기는 편지, 세월호를 의식하고 만든 소설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그건 이 소설의 제목처럼 다만 한 사람이 내게 왔기 때문이다.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재앙을 통계로 보면 독재자이자 학살자의 마음처럼 차가워진다. 김연수 작가는 상상하는 힘, 누군가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181p.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그러니 이토록 간청하는 목소리로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것이겠지.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나를 기억할 때, 지워진 기억을 복구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시간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얘기해 보고 싶다.


[사랑의 단상 2014]

 206p.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한 친구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은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한다. 빅토르 위고는 "우주를 사람으로 축소하고 그 사람을 다시 신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소설은 오직 한 사람뿐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지훈이 주인공이다. 사랑이 다 끝났을 때 지훈은 뜬금없이 사랑이라는 용례를 검색한다.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는 35살 지훈은 그곳에서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를 본다.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부분을 얘기해 보고 싶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로 시작한 이야기가 다시 미래를 기억하는 모티브로 돌아왔다. 마치 원형의 시간처럼, 이야기가 돌고 돈 것이다. 다른 체험을 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시간을 앞과 뒤로 재고 다시 흔들어서 깨우면서도 시간은 요지부동이다. 대신 시간을 상상하는 법은 익힌 것 같다. 231p.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소설이 말하는 정신의 삶이라는 게 키워드겠지. 극 중에서 할아버지가 편집자가 된다는 화자를 환영했던 것도 비슷한 이치다. 이야기로 갇힌 삶을 해방할 수 있다는 것. 생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일랜드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그게 문학 아니겠는가. 테드 창처럼 혁신적인 기술이 없어도 충분히 과학적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이 말하는 정신의 삶을 다들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얘기하고 싶다. 정신의 삶을 경험하면 정말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 발제문 전문


0. 작품의 제목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입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를 느끼셨나요. 김연수가 작가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나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1. 주인공 나는 동반자살 계획이 있는 지민을 외삼촌에게 데리고 갑니다. 지민의 어머니가 쓴 소설을 찾아 읽기 위해서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난 일이 원인이 되어 현재가 펼쳐지는 소설의 설정을 따릅니다. 29p.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 과거가 아닌 미래가 원인이 되는 삶은 어떨까요. 오직 상상과 가능성일 뿐인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삼촌은 왜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하다고 했을까.

2. 28p. (예비) 외삼촌은 사고실험을 가장해서 나와 지민이 결혼한다는 원인으로 현재를 살 때 우린 무엇이 달라지는지 묻습니다. 실제 두 사람은 결혼합니다. 결혼 이후 1999년 부부가 된 나와 지민은 예언이란 예외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언은 맞아들어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부의 말처럼 그저 보통의 사건을 나열한 것에 불과할까요.


[난주의 바다 앞에서]

3. 57p. (예비) 은정의 말대로라면 은정은 현실적인 사람, 정현은 그 너머의 삶을 꿈꾼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느껴졌나요.

4. 소설가가 되어 개명한 은정은 정난주의 삶을 자기 식대로 각색하여 정현에게 들려줍니다. 왜 결말 부분을 자기 식대로 바꿨을까요. 이 소설에서 세컨드 윈드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 진주의 결말]

5. 71p. 진주는 자신을 오해하는 범죄심리학자에게 메일을 보내서 독백과도 같은 문장을 쏟아냅니다. 진주는 학자를 좋아하고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얘기를 쏟아냅니다. 그리고 말미에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 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진주는 어떤 오해를 풀고 싶었으며,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6. 84p. (예비) 진주는 자신을 수동적인 희생자로 해석하는 부분에서 자기 마음 같지 않음을 표합니다.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가 몰리고 있었다는 게 선생님의 전제인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88p.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진주는 이해받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이해해 보는 진주의 마음, 진주의 결말은 어떤 것인가요?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7. (예비) 선배 정미의 초대로 같이 술을 마신 그는 그 자리에서 정미를 보고, 십 년 후에 다시 정미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정미가 [인도방랑]이라는 책에서 본 ‘다 끝났어’ 카타무 호갸라는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에게 이 말은 왜 인상에 남았을까요.

8. 정미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정미는 비관주의자가 세상이 나아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 그 이야기는 우리 삶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셨나요. 주인공은 정미의 죽음 이후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엄마 없는 아이들]

9. (예비) 혜진은 연출가 선배의 애인으로 낙하산 주연이 되어 부원의 반감을 사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명준은 혜진이 반감을 산 이유는 표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혜진은 여름의 얼굴이었다고 말합니다. 혜진은 어떤 표정과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을까요.

10. 156p.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명준은 연극이 다 끝나고 웁니다. 슬픈 감정 없이 여름이 끝나버린 것에 웁니다. 그리고 그걸 피에로의 재담과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고 말합니다. 명준은 왜 울었고, 어떤 아이러니가 담겨 있을까요.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11. (예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는 버젓이 웃으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희진은 왜 세월호 참사 다음 날에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을까요.

12. 181p.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혜진은 게이세이사쿠라역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얀무덤이라는 곡을 시디로 틀어달라고 부탁한 후, 방명록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지만, 그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지워진 기억은 우연한 기회에 그곳을 들른 후쿠다 씨를 통해 되살아났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후쿠다는 어떻게 다시 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의 단상 2014]

13. (예비) 206p.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한 친구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은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얼마나 진실에 부합하나요?

14. 210p. 지훈은 서른 살이 되고, 사방이 탁 트인 들판에 적막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삶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기사를 검색해서 사랑한다는 말의 용례를 찾고는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25살, 빈 나무의 삶 그리고 사랑은 기억해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15. 231p.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소설이 말하는 정신의 삶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정신의 삶을 경험하면 어떻게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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