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불이 들어왔다. 차 두 대가 빨간불에 걸리지 않으려고 가속으로 내달았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안달이 난 운전자들은 클러치를 밟은 채 당장이라도 출발할 태세였다. 바쁜 사람들 틈 사이에서 나만 두리번거렸다. 옆 차선에서 창문이 열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블라우스에 담뱃재가 떨어질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조바심 없는 얼굴 표정이 근사했다.
파란불이 켜졌고 차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씀 에세이 모임 마감 날이다. 뭘 쓰지. 봄의 설렘에 관한 글을 써야만 하는데 자꾸만 담배 피우는 얼굴만 떠올랐다. 내가 딱 서른이 되었을 때 만난 수연이는 끝까지 흡연 사실을 숨기다가 홍대 뒷골목에서 딱 걸렸다.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어내다 내 눈과 마주쳤다. 새벽 1시, 봄바람이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난 입맛을 다시면서 눈을 껌뻑이며 얼간이 같은 얼굴로 수연이를 바라봤다. 대학 동기들이랑 놀고 있다더니 머리를 브로콜리처럼 한 녀석과 맞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못 이긴 척 담배를 벽에 비벼 끌 때 수연이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느긋하게 연기를 뿜는 얼굴 그리고 휘적거리는 팔과 다리. 눈을 감고 마지막 연기 한 모금을 깊숙이 들이마시던 여유. 내가 나타났을 때 머뭇거리던 몸짓. 수연이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봐라,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너는 웃기는 놈이야. 괜찮은 척 좀 그만해. 네가 몰 안다고 잘난 척이야. 평소 볼 수 없었던 오만한 얼굴이었다. 평소에 독서 모임에서 뻔한 얘기만 늘어놓던 애가 아니었다.
그날 내 기분은 배신감보다는 내가 모르는 수연이를 본 당혹함이 컸다. 예기치 않기도 했거니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수연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꽤나 도발적이었다. 그렇게 빤한 애는 아니었네. 그래 속이는 게 없을 리가 없지. 나도 속였잖아. 난 오히려 날 속이고 내가 모르는 사람과 있는 수연이가 기꺼웠다.
그날 새벽까지 브로콜리 친구까지 셋이 함께 앉아서 잘 마시지도 않던 소비뇽을 마셨다. 수연이 대학 후배라고 근처에서 자취하면서 공연도 하고 전시도 한다고 했다. 그래 그렇구나. 문어 몇 조각을 잘라놓고 뽈뽀 어쩌고 하는 요리가 나왔다. 가격이 사기였지만 별말 없이 와인을 마셔나갔다. 너스레를 떠는 브로콜리의 농담에 애써 미소 지으며 수연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연이는 분주하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내가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이지. 그냥 궁금했다. 수연이는 저 브로콜리에게 어떤 얘기를 했을까.
그날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수연이와 투닥거렸지만,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어떤 스위치가 켜졌다. 난데없이 달궈졌다. 점차 내리막을 겪고 있었는데 난 뭔가 꽂힌 사람처럼 녀석에게 집착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녀석을 더 알고 싶어졌다. 한동안 수연이를 만나면 유심히 옆모습을 보곤 했다. 얘가 걔가 맞아? 때로는 화장실 가는 뒷모습을 훔쳐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수연이가 대화를 나누다가 딴생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여기보다 어딘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30년을 사랑해도 조그만 것 때문에 싸우고 갈라서는 게 사람이라지 않나. 난 결국 수연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 헤어졌다. 호기심 많은 애라 날 금방 지겨워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프고 속 끓인 이별이었다. 처음 만날 때 수연이는 명문대생에 책 얘기나 좋아하던 애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복잡한 남자관계와 아무 데서나 자는 술버릇 그리고 가족에 대한 맹렬한 증오심이 차례로 떠오른다. 어디서든 술을 사겠다고 나서는 방종한 기질이 녀석의 아침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요즘 내 글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열심히 시간이 남긴 인상에 관해 쓰며 결론짓는다.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그러다가 다시 지나쳐 생각해 보면 다시 그 인상을 재고하는 식이다. 살아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단순하다 못해 일관성 없이 쭉쭉 써 내려간다. 어떤 주제나 의식도 없다. 수연이는 사람이 볼수록 신기하고,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믿게 해 준 사람이다. 그 사실은 내게 세상이 꽤 살아갈만하다는 증거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계속 적다 보면 삶이 꽤 재미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