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에서

by 박민진

십 년 전 여름휴가 때 일이다. 여행 일정은 A가 짠 것이었다. A는 사무실 옆자리로 지내다가 일 년 가까이 사귀었다. 사이를 비밀로 부치기로 했기에 조심스럽게 만났다. 당연히 휴가도 맞춰 쓸 수 없어서 이번 휴가는 처음으로 떠나는 장기 여행이었다. 그땐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도 좋을 만큼 애틋한 사이였다. 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셀레였다. 당시 장교와 군무원이 사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말 저말 나오기 좋은 일인건 사실이었다. 조직이 보수적인 것은 둘째치고 내가 과장인데 계약직인 군무원 직원과 사귄다는 것은 평정부터 인사고과까지 연계된 문제라서 더 그랬다. 이렇게 적고 보니 문제가 있었던 사이가 맞나 싶다. 나만 떳떳하면 되지 뭐. A는 그런 고민을 의식하기 어려울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유쾌하고 다정해서 사무실 사람들이 껌뻑 죽었다. 그래도 끝까지 안 걸린 건 잘한 일이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A와 그의 친구들 몇 명과 술을 마셨다. 용산의 몽탄이라는 고깃집이었는데 장작불로 훈연한 고기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이 있었다. 친구들이 신혼여행 미리 가는 거 아니냐고 놀렸다. 허니문 베이비 생기는 거 아니냐고 심하게 놀려대며 계속 술을 마셔댔다. 평소 술을 입에 잘 대지 않는 나로서도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도 술을 권하는 바람에 주량 이상을 넘겼다. 바로 속이 뒤집어졌다. 국방부 백신 신규 업체 선정 문제로 지난 며칠을 꼬박 야근을 한 참이었다. 그렇게 소주 몇 잔에 녹초가 되어 졸음이 쏟아졌고 속이 메스꺼워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느 순간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귀에서 잦아들더니 필름이 끊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난 방에 쓰러져 있었다. 택시를 탔는지 주머니에 택시 영수증이 구겨져 있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으며 비행기 출발시각은 세 시간 뒤였다. 미친 사람처럼 일어나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도 다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길이 막히는 여의대방로에서 어렵사리 택시를 잡아서 비행 80분 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연락을 해보니 A는 더 늦을 참이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는데 노란 택시에서 쏟아져 나온 A는 몰골이 더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은 마구 엉켜 있고 잠이 깨지 않은 듯 헛소리를 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왔는지 짧은 스커트와 말려 올라간 티셔츠가 다시 클럽으로 가도 될 판이었다.


우선 게이트 앞에서 둘 다 캐리어를 열고 물건을 점검했다. 엉망이었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우린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고작 보름 여행인데 인생의 절정기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둘 다 두통에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탑승 수속을 마쳤다. 그때 이상하게 여행의 감흥이 모두 사라졌다. 그날 새벽 난 악몽을 꿨다. 몹시 고통스럽고 불길하고 두려운 꿈이었다.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꿈이 불러일으킨 감정들은 고스란히 남이 있어 난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냥 이 여행을 가는 게 맞는지, 이 관계를 지속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회사 일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의 여행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에는 닥쳐올 낯선 상황에 대한 긴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미세하게 어제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난 술자리에서 취해 A의 친구 S와 다퉜다. 내가 소리 지르고 그 친구가 일어서서 내게 막무가내도 다가오는 형상이 얼핏 떠올랐다. A에게 물어보니 그런 적이 없었다고 했다. A는 졸린지 내 손을 자기 겨드랑이 가까이 끌어가며 웃음 띤 얼굴로 눈을 감을 뿐이었다. 난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숙취와 몸의 저림 때문에 좀처럼 편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로 싸웠지. 아닌가 꿈이었나. 조만간 나올 대한항공 기내식이 내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제발 미역국이 있었으면 싶었다. 라면은 못 시키나. 나는 다시 곯아떨어진 A이 얼굴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봤다.


A의 얼굴 속에서 또 다른 기억이 새어 나왔다. A의 친구는 왜 A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지 못하는지 내게 따져댔다. 나는 그럴 힘이 없다고, 그건 본청 인사과에서 결정할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지지 않고 대들며, 그건 A를 속인 것이라고 했다. A가 뭐 때문에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겠냐며, 그 얘기해봤냐며 나를 몰아붙였다. 우린 그런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A가 거들어주기를 바라며 옆을 돌아봤더니 A도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정확한 기억인지 악몽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내 속의 역겨움과 미심쩍음 그리고 불안과 초조함의 실체가 뭔지 느끼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A가 살짝 깨서 내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며 이 악몽의 출구는 오직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일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미리 예약된 관광지에서 사진까지 수백 장 찍어가면서 난 고통을 받아야 할 터였다. A는 계속 내게 뭔가를 속삭였다. 입김에 섞인 술냄새가 지독하게 역겨웠다. 토할 것 같았다.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의 두려움과 고통이 떠올랐다. 이 여행이 끝나면 다 집어치우고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영화관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예술 영화를 보며 시간을 축내고 싶었다. 도대체 수백만 원을 훌쩍 넘는 이 여행을 왜 가는지 미치도록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당시 문제가 많던 백신과를 맡던 내가 장기 휴가를 쓴다고 부장님 내밀었을 때 표정이 기억난다. 이 새끼가 미쳤나. 보름을 간다고? 너 진급 안 할 거냐? 제가 한 달 치 보고 다 끝내고 휴가 가겠습니다. 보고서 거의 다 썼습니다. 너 이 주무관이랑 휴가가 겹치네? 네 같이 갑니다. 둘이 사귀어? 친구 사이입니다. 지랄하네. 아무튼 됐고, 둘이 결혼이라도 하냐? 전혀 아닙니다. 결혼해라 그냥. 조만간 이 주무관 계약기간 끝나면 백수 될 텐데 네가 데리고 가라. 저도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물어보질 않으니까 네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평정은 잘 챙겨줬냐? 뭐 네가 챙겨준다고 정규직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약 연장에는 힘쓸 수 있잖아? 제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됐다. 나가봐라. 휴가를 떠나기 전 우리 부장은 그렇게 날 몰아세우다가 장기 휴가를 결재해주었다.


글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자꾸 글쓰기가 뭔지 생각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공들인 취미이니만큼 지속 가능성에 관해 묻지 않으면 버릇처럼 써버리게 된다. 난 글이 삶 속 뭔가를 해결해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삶이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답하기를 강요하는 날, 그 강요에 대한 응답으로 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글은 나의 미심쩍은 삶을 훈련시키는 연습이 되어주었다. 시간에 따라 나는 변하고, 변한 내가 저 시간 속에 박제된 오래된 나를 보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요즘 글이 가진 용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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