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 2012
고전문학을 짧게 줄인 ‘고전’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정의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하지만 내게 고전은 이렇게 정의된다. ‘두껍기란 사전보다 더 두꺼운 것이 재미는 더럽게 없고, 딱딱한 말투들을 가진 인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짜증 나게 해 책장을 덮게 만드는 거북한 소설.’ 고전의 가치는 나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다. 보통 고전은 남들 특히 선생, 멘토라는 불리는 지식층이 추천하기에 우선 펼쳐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그 가치에 접근하기에 고전은 너무 지루하다. 책장은 무겁고, 인식의 깊이를 강요할만한 시간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책장을 펼쳐보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우리는 고전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고전의 가치에 대해 논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이렇게 읽기 힘든 고전을 짧게 줄여 읽으려는 최근의 시도들이다. 우선 서점에 가보자. 서점에 최근 고전의 가치를 강조하는 많은 서적들이 놓여있다. 대부분 장광설과 만연체를 중심으로 한 요약 불가의 서적들이다. 부산대가 출판한 <고전의 힘>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각계각층의 올스타들을 초빙하여 고전 추천사를 받아낸 책이다. 하지만 정작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게 함정이다. 그 위력적인 저자들의 약력에 밀려 고전은 여전히 오리무중을 걷는다.
고전이란 게 그렇게 쉽게 가치를 탐독할 수 있고, 정의되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고전의 가치를 논한 한 권짜리 책을 만들면 그만이다. 고전의 가치는 독자의 연령과 상황 그리고 접근 태도에 따라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내가 처음 초등학교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때, 난 이 장황한 스토리를 인과응보의 것으로 해석했다. '바람피우는 불순한 아내는 죽어 마땅하다' 그 정도의 인과는 설득력 있게 들리니까. 하지만 최근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느껴졌던 것은 일종의 페이소스였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을 저지른 후 속 안에 끓어오르는 감정의 응축이란 대단히 문학적인 것이다. 끝내 그 본연의 실체를 언급하지 않은 체, 끝나지 않는 기찻길과 논밭의 누런 땅을 응시하는 안나의 표정이 바로 그것이다. 파토스라는 말 외에 그 어떤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최근 출판사들은 너나 할 거 없이 고전을 새롭게 편찬하고 있다. 책은 얇아져 있고, 디자인은 고전답지 않게 세련되어져 있다. 하지만 결국 표지랑 글씨체, 종이 재질만 바꾼 것이다. 고전이란 게 외형만 바꾼다고 절대 쉬워지지 않는다. 이런 상술에 낚여 구입하면, 또 책장에 꽂아두고 ‘나 이런 것도 읽는 사람이야’ 정도의 기능을 할 게 뻔하다. 고전문학을 표지만 바꿔 출판해 돈을 벌려는 출판사의 흑심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고전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실용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고전이라고 고리타분한 접근방식을 고수할 것 없다. 고전을 도서관에 꽂혀있는 두꺼운 책으로만 읽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떳떳이 마주할 수 있다.
고전에 대한 영화사의 집착은 오래된 것이다. 특히 몇 년간 개봉한 영화들 중에 유독 고전을 재해석하여 연출한 영화들이 많은 것을 보면,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고전을 어렵게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두 시간의 시간적 제한은 그 품질의 정도를 차치하고라도 고전의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용인되고 있다. 최근 개봉한 고전 전문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역시 톨스토이의 무자비한 두께의 고전서적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고전의 열풍에 힘을 보태고 있다. 조 라이트는 전에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훌륭하게 연출한 경험이 있다. 이외에도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위대한 개츠비> 등의 고전문학이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끌었고, 그 결과 베스트셀러에 동명의 책들이 오르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스토리를 아시는가. 대부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내 방식대로 요약하면 이렇다.
안나라는 유부녀가 젊고 싱싱한 백작 브론스키랑 바람이 난다. 원래 브론스키는 오빠의 처제 키티랑 맺어지기로 한 사이인데, 유부녀 안나의 치명적인 매력이 그를 꼬신 것이다. 안나가 대단한 게 첨에는 좀 숨기는가 싶더니, 이내 급했는지 젊은 남자랑 사랑에 빠졌다고 남편 카레닌에게 선포하기에 이른다. 카레닌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그 역시 아내의 선전포고에 당황하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표면적인 부부관계만 유지하려고 한다. 이에 반발한 우리의 안나는 카레닌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고, 보란 듯이 브론스키의 애를 낳아 이혼 도장을 받아낸다. 이 사건은 사교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안나는 예전과 같은 불꽃같은 사랑을 이어가지 못한다.
자 한마디로 내용을 요약하면 유부녀의 막장 불륜 스토리다. 다시 말해 'KBS 사랑과 전쟁'에 사용하기 좋은 스토리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 정도의 스토리를 막대한 양으로 집필한 원작에 의문부호를 표시한다. 그 대신 연극무대와 영화적 질료들을 혼합하여 만든 독특한 화법과 드라마틱한 음악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의상들이 쉼 없는 동력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제작자 '워킹타이틀'의 매끈한 솜씨와 명배우들의 연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이 탁월한 영상미는 톨스토이가 애초에 작품에 녹여내려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영상화하는데 일정 부분 성취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문학이라는 방대함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드넓은 동구권의 대지를 패닝으로 훑는 카메라의 압도적 질감은 영화라는 매체의 우월함을 뽐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영화를 통한 고전의 접근은 두꺼운 소설을 읽는 부담을 경감시켜 주고,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발생시킨다. 영화를 고전문학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종속적인 도구로 해석하는 것이 못내 찝찝하지만, 고전의 가치에 의문부호를 달지 않는다면 충분한 가치를 지닌 접근이다. 그 어려운 고전에 영화만큼 쉬운 길잡이가 되는 경우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감상하다 보면 진짜 고전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학을 통해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시각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실용적인 영화의 기능을 의미한다. 도시의 환락과 무위도식, 사랑 없는 결혼, 거짓과 허위의 예술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반성, 삶과 죽음의 경계,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까지 가능하다. 이는 완전한 문학에 대한 이해는 아니어도, 책을 구입해 펼쳐볼 수 있는 관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아 이 작가는 도대체 이 두꺼운 책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난 딱 여기까지가 영화와 문학의 효율적인 연계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기대하지 말자.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1877년에 집필한 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함으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1880년에 들어 위선에 찬 러시아 귀족사회와 러시아 정교를 비판하고 초기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여 '톨스토이 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결국 안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느낀 삶의 부조리의 감정적인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가 느끼는 처연한 감정 그리고 카레닌을 통해 비친 상류층의 허위의식들이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을 표시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할 당시 편집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읽기 싫어하는 마지막 8장을 끝내 욱여넣었다.(편집자의 마음이 심히 이해가 간다.) 8장은 이야기 구성에서 불필요한 것이다. 주인공 안나에 대한 언급보다 인류 공통적으로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독교적인 풀이집이다. 톨스토이는 문학이라는 세계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우리들은 영화라는 새로운 렌즈로 톨스토이의 인생을 다시 떠올려 본다. 러시아의 한 골방에서 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역설하는 한 노인을 떠올린다. 영화는 그렇게 삶의 다양한 층위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는 자신의 역할을 깨닫게 한다.
고전문학과 영화의 공존은 아직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엔 이르다. 표지만 바꿔내는 출판계의 저열한 행태는 고전문학에 대한 거부감만 더 키워낼 뿐이다. 이전까지의 고정관념 중 하나는 영화는 항상 문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있다. 문학의 깊은 세계를 영상으로 고대로 옮기기만 하는 단순 무식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역할이 바뀌어 문학은 영화의 시각적 대중성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국민 열 명 중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 요즘, 철자를 읽기에 너무도 가혹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문학이라는 거대한 관념 속으로 발걸음 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