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거진 <씨네21>의 22주년을 축하하며
세상엔 사람에게 가르치기 좋아하는 사람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개인별로 편차는 있겠지만 ‘아 나는 가르치는 건 질색이야’하는 사람과 ‘난 잠자코 앉아 배우는 것을 좋아해’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내 경우엔 절대적으로 배우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떠드는 것보다 듣고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질색이다. 나같이 가르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 되면 불행하다는 동사의 뜻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우선, 내가 가르친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하게 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세상에 가르치기 좋아하고, 어느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끓어 넘치는데 굳이 나같이 소질도 없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내게 가르친다는 것에 트라우마를 갖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꾸준히 다니던 봉사활동 중에 일어났다. 처음엔 청소를 하고, 물건을 옮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안 좋은 중고교생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선생님 역할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모두들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다. 왜냐면 아무리 봉사활동이라지만, 다른 교우들(정확하게 말하면 여자애들)과 어울릴 기회도 없고, 만날 책상에 앉아 씨름하던 우리에게 또다시 학습의 장으로 들어가라는 요구는 천부당만부당했다. 또 가르친다는 것이 꼰대처럼 보일 확률도 높아서 봉사를 하고도 개운치 않은 상황이 오고 만다. 그런 일에 내가 나서게 된 것은 그놈의 피해 주지 말자는 심보 때문이다. 당시 봉사동아리에 내가 친구들을 꼬셔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어쩐지 리더와 같은 모양새가 되어 나서기 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한 행동이지만 곤란한 표정을 숨기긴 힘들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전담한 승훈이의 중간고사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꼼꼼하게 가르친다고 사력을 다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내가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당하는 쪽이 더 불행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조마조마함을 감출 수 없던 그때 내게 떠오른 생각은 기발했다. 그것은 바로 토론 수업이다. 여러 학생들이 그날그날 숙제를 서로서로 설명해주면서 문제를 푸는 시간을 마련했는데, 사람이란 게 책임감과 행하고 싶은 욕심이란 게 누구나 다 있기에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내 요구에 부응해 서로의 학습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창 민감한 나이라 그런지 이성과 함께하는 수업에 무척 긴장하기도 했지만, 많은 신경을 써서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놀라웠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따분한 일이지만, 직접 참여하고 얻어가는 행위는 능동적이고 유익하다. 서로서로 진도를 체크하고,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토론하기 시작하자 수업의 속도와 능률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결국 나는 마음고생에서 벗어나 가르치는 행위의 끔찍함만을 깨닫고 모임의 주동자 역할만 해주었다. 슬그머니 한 발짝 빼는 여유.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 내 의견을 어드바이스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서로의 친밀감을 상승시킨다. 이것이 배움이라는 코스에 얼마나 적절한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인간적인 친밀감은 곧 관심의 상승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비평가라는 직업의 존재감이 확연하게 줄어든 이유 역시 이런 사람의 심리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생겨난 소통할 수 있는 수단들, 즉 자가 비평의 수단인 블로그와 SNS의 활성화로 더 이상 평론가들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글을 올렸을 때 즉시적으로 답이 오고, 거기에 특정 의견을 붙어 토론할 수 있는 SNS의 짧은 글 삽입의 특징은 일방적인 비평을 죽였다. 존재감이 약해진 평론의 장은 영화매체들로 이어졌다. 몇 년 전 꽤 인기 있던 영화주간지 무비위크가 폐간되고, 과거 키노, 스크린, 필름 2.0과 같은 영화잡지 역시 시대의 흐름을 잡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내가 작성한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서로 소통할 수 있는데, 굳이 돈 들여 꼰대의 말을 듣고 영화를 보지 않는다. 최근엔 오히려 파워블로거와 연예인들의 SNS가 더욱 큰 영화 선택의 기준이 되곤 한다. 실로 능동적 인간들의 시대(프로슈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같이 남의 말을 듣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론 문화가 사라지는 현상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왜냐면 평론가들은 그 분야에서 나름의 학식과 경험 그리고 진정 좋아하는 마음을 지닌 마니아들이(오타쿠들) 대부분이다. 쏟아지는 SNS이 홍수 속에서 가치 있는 코어 콘텐츠를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의 평론의 장은 마련이 되어야 피드백과 수렴 그리고 개진이라는 올바른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SNS의 짧은 멘트들은 거의 다 쓰레기에 가깝다. 무언가를 심플하고 단순화해서 발언한다는 것의 미학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포괄을 추종치 않는 한 숨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획일적인 문화적 폭력은 지양되어야 하는 법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듣기 좋아하는 사람, 배우길 좋아하는 사람,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묵묵히 보기만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어울려 살 수 있는 삶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