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테러 라이브The Terror, LIVE, 2013
뜬금없이 축구 얘기를 해본다. 호날두의 플레이는 무척 화려하다. 사실 실력만으로 봤을 때 메시가 호날두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내겐 호날두가 더 매력적인 사람이다. 호날두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퍼포먼스적인 측면 이외에 특유의 호탕한 성격, 완벽한 프로의식, 잘생긴 외모 등이 종합된 결과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축구선수라는 카테고리 밖의 인간 호날두도 좋아한다. 가령, 노래방에서 아무리 노래를 못 불러도 느낌 그 자체가 좋은 사람이 있다. 반면에 노래를 아무리 잘 불러도 비호감인 녀석은 그냥 듣기가 싫다. 비슷하게 호날두는 축구를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항상 그라운드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호날두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항상 밉상처럼 보이는 선수가 있는 반면, 실력과 멘탈을 고루 갖춘 호날두는 늘 새벽녘에 뜬눈으로 밤을 세는 나와 같은 유럽축구 폐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06년 월드컵에서 호날두의 조국 포르투갈은 잉글랜드를 상대하게 된다. 당시의 경기에서 포르투갈의 전력은 잉글랜드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해 챔피언스리그를 평정한 쟁쟁한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제라드, 램파드, 존 테리, 루니, 퍼디난드 등)을 보유한 잉글랜드의 기세는 사뭇 볼 만했다. 그에 반해 포르투갈의 전력은 호날두를 제외하면 황금세대 이후의 노쇠화가 분명히 나타나는 약체로 분류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매치를 고대했다. 호날두라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 경기를 TV로 시청하던 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22명이 뛰는 경기에서 호날두밖에 안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부서지고 채이고 동료들을 향한 호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끊임없이 달렸다. 루니의 퇴장에 대한 공로(그는 이 사건으로 맨유에서 떠날 뻔했다.)는 물론이고, 존 테리와 퍼디난드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다이빙과 거친 도발을 일삼았다. 이건 지극히 승리에 대한 열망이 낳은 객기였다. 상대적 전력이 열세인 팀이 할 수 있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호날두는 더러운 플레이로 일관했지만, 결코 아름다웠다. 그것은 승리를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 호날두에 대한 극심한 호감이 부른 명경기였을 뿐이다. 호날두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다른 선수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지어 경기 자체보다 호날두가 하는 플레이를 지켜보는 재미가 더 크다고 느껴질 정도다.
내가 뜬금없이 호날두 타령을 하는 이유는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마치 호날두의 잉글랜드를 상대한 그 명경기를 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더 테러 라이브>가 취하는 영화적 태도에 있다. 더 테러 라이브는 마포대교 폭발과 인질극 그리고 방송시스템 안에서 추가적인 테러가 발생하는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급 시나리오를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 영화는 방송국 라디오 스튜디오 밖을 벗어나지 않는 공간적 제약에 가둔다. 마포대교의 폭발은 스튜디오 안에서 바라보는 창 밖 광경을 통해 처리하고, TV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달한다. 딱 봐도 CG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스펙터클은 아니다. 이 간접성은 제작비의 절감이라는 장점을 가지지만, 관객에겐 다소 심심한 모양새다. 명색이 더 테러 라이브라는 제목인데, 고층 건물 창문에서 바라보는 마포대교 테러라니 어쩐지 시시하지 않은가.
이런 와중에 유독 빛나는 것은 지루해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TV와 카메라, 전화, 휴대폰과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주고받으며 혼자 원맨쇼를 펼치는 하정우의 영향력이다. 하정우는 러닝타임의 거의 전체를 스튜디오 내부에서 진행하는 이 영화에서 한 배우가 작품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호감 가는 배우를 보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마치 브레드 피트와 멧 데이먼이 영화에 끼치는 영향처럼 하정우가 아니었으면 안 되는 영화가 있는 것이다. 그저 그가 하는 제스처와 행동 그리고 특유의 말투만 보고 있어도 즐거운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거의 모든 대중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스타 하정우의 힘을 영화가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정우가 맡은 캐릭터인 전직 앵커이자 라디오 진행자인 윤영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윤영화는 스캔들로 인해 생방송 뉴스 앵커에서 라디오 진행자로 밀린 인물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대중이 그를 신뢰하고,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이것은 배우 하정우의 스타성과 같은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설정이다. 하정우를 향한 관객의 호감을 적극 이용해 작품의 동력을 얻겠다는 계산이 노골적으로 엿보이는 설정이기도 하다.
다시 <더 테러 라이브>로 돌아와서, 사건을 발생 직후부터 영화는 하정우를 희극 무대(스튜디오) 위에 던져놓고 갖가지 소품들과 1인극을 벌이게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하정우의 연기가 이 영화가 가진 최소한의 스펙터클을 더없이 훌륭한 서스펜스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하정우는 다분히 무리한 설정 위의 상황극에서 고도의 집중력으로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테러범을 잡는 것과 인질을 구하는 본질의 목적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종속된다. 하정우라는 배우가 취하는 액션과 리액션의 향연이 관객과 호흡을 맞추며 진행하는 과정이 더 테러 라이브의 재미인 것이다. 다양한 변수들이 발생하는 상황을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이겨나가는 모습이 어째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비슷한 설정으로 재미를 본 작품이 바로 <터널>이다. 하정우는 이 작품에서 역시 제한된 공간에서 밀착 클로즈업이라는 여건을 극복하고 표정과 대사의 리듬만으로 관객과 호흡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를 따라다녔던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줌 인으로 잡고 엔딩 크레디트를 맞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하정우와 함께 호흡하고 숨을 쉬었던 것이다. 마치 호날두가 뛰는 엘 클라시코 중계를 보듯. 오로지 그를 감상하기 위해 이 러닝타임을 달려왔다. 인물의 고단한 여건과 영화가 가진 자체적인 제약들이 오히려 작품의 강점으로 작용하는 광경은 마치 호날두가 잉글랜드의 스타들을 상대로 한 비열한 경기력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일종의 객기이자 한 매력적인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의 승리를 추종하는 우리들은 그저 모든 것에 합리화를 씌워주고, 그의 왕관을 기대하면 그만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더 테러 라이브>, <터널>은 사회적인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갖가지 메시지들이 핵심을 이루는 작품이다. 계층과의 갈등이나 미디어의 부작용 그리고 정부를 향한 쓴소리들은 다소 익숙한 설정이다. 하지만 너무 자극적이고 노골적으로 그 메시지에 올라타다 보니, 상당 부분 작품의 의도가 흘러넘치는 부작용이 생긴다. 이것은 영화의 빈약한 스펙터클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시나리오 작업 상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차라리 오로지 서스펜스를 위한 도구로서 모든 인물(설정) 들을 이용했다면 더욱 입체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 영화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정우를 위한 지원군이 되었다면, 영화는 더욱 풍성한 재미를 안겨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하정우의 연기는 말도 안 되는 설정까지 눈 감고 싶을 만큼 매혹 안의 퍼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한 영화인 <베리드>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베리드의 경우에는 땅 속의 관 안에 갇혀, 사지를 움직이기 힘든 공간적 제약을 만들어 놓고는 주인공에게 배터리가 한 칸밖에 안 남은 휴대폰 하나 달랑 주고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에 비하면 고가의 방송장비에 각종 카메라와 스텝들을 등에 업은 <더 테러 라이브>의 하앵커는 꽤 행복한 편이리라. 베리드의 경우엔 온몸을 옥죄어 오는 관 속의 갑갑함과 암흑이라는 시작적 제약 속에서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 하정우의 얼굴에 노골적인 줌 인 처리를 한 것을 생각하면 이 두 영화의 극명한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다. 베리드는 영화를 보는 나 역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암흑 속 객석에 앉아 러닝타임을 견뎌야 한다. 옴짝달싹 못하고 휴대폰에 의지하여 구조를 기다린다. 이러다 보니 전화통화 내용이라는 청각적 정보만이 영화의 주요 전개 장치로 자리한다. 내가 베리드를 청취의 영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화통화의 내용이 곧 주인공의 생사와 연계되고, 관객들은 전화통화를 머리로 떠올리며 머릿속 스크린을 작동시킨다. 관객의 연상이 곧 주인공의 운명으로 자리 잡는 독특한 설정이다. 실제 관람 중에 난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옆에서 매너 없이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이 관 속의 폐소 공포증은 영화'관'이라는 암실을 떠올리게 했고, 제약은 곧 현실로 다가와 이 건물에 불이라도 나면 우리는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쓸 데 없는 생각으로 번졌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로크>가 있다. 이 영화는 운전석에서만 모든 영화의 러닝타임이 이루어진다. 그는 자발적 감금상태(정부의 출산을 보러 가는 길)에 놓여 있고, 그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중요한 업무를 차 안의 블루투스 전화기로 처리해야 한다. 거기에 아내에 외박한다는 말도 없이 떠나는 여행길이라 가족과 통화하며 현실을 무마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드린다. 전화가 올 때마다 관객은 이 남자의 현실과 조우하여 옴짝달싹 못하고, 영화는 결코 빠져나갈 길을 마련하지 않는다. 이 영화 역시 주인공 톰 하디의 각진 얼굴에 많은 것을 의지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지만, 우리는 이내 단순한 각본에 질려버리고 만다. 부유하고 잘 나가는 전문직 남자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그가 스스로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이 제약에 동정의 마음을 보내기 힘들어진다. 또한 정부의 아이를 보러 가는 것이 윤리적 선택인지에 대해서도 물어볼 것이 있다. 그렇다 보니 영화는 주저하고 변명이 많아 중언부언한다. 영화가 자 이제부터 이런 제약 안에서 영화를 시작할 거예요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관객은 그건 내 알 바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