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모든 것

Shadow Dancer, 2012

by 박민진

영화의 위력은 시대의 비극과 역사적 사실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형상화하는 적극적인 개입에 있다. 묵직한 텍스트를 현실적인 공기로 흡입할 때 느끼는 쾌감이란 지극히 능동적인 기쁨이다. 그래서 영화는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숙명을 넘어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영화가 추앙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되는 점이 있다면 결국 영화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극 중 인물이 마시는 공기와 처연한 대화들을 통해 잠시나마 역사적 맥락에 개연성이라는 살을 붙여본다.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섀도우 댄서>역시 이런 영화적 특성이 비극적인 역사와 만나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IRA라는 비극의 역사


영화가 아니었다면 과연 'IRA' '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라는 단어를 알기나 했을까. IRA는 영국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단어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을 맡은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이 IRA를 소재로 영화를 찍었다. 보통 IRA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분쟁, IRA의 과격행위에 대한 내부적인 성찰, 폭력적인 영국의 시위 진압 등의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 이유는 장르적으로 다루기에 무척 민감한 소재이기에 감독들이 가볍게 손을 대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몇몇 이야기 안에 한정되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섀도우 댄서>는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평화모드가 수립되기 시작하는 1993년, 그 민감한 시기 속 IRA라는 단체를 다루면서도,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IRA와 그 뒤의 정치세력이 가진 위급성 그 자체보다는 자식을 향한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5.jpg 섀도우 댄서 Shadow Dancer, 2012
영화가 시작하면 한 가족의 비극이 펼쳐진다. 자신을 대신해 동생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던 한 소녀는 얼마 후 총에 맞아 숨져 돌아온 동생의 시체를 목격한다. 영화는 그저 창밖에서 펼쳐지는 화면을 스치듯 보여주며 이것이 영국군에 의한 비극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죽어버린 동생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길 그리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십 수년이 흐른 지금, 그 소녀는 영국 런던의 지하철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소속의 테러리스트다.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93년은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시작되기 직전, 오랜 갈등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다. IRA 세력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몇몇 극단적인 폭력단체들만이 조직적인 테러활동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콜레트(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가족들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전부 IRA에 몸담고 있다. 동생의 죽음이 가져다준 복수심 때문일까. 그 어떤 설명도 생략한 체, 그들은 그저 조직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하지만 콜레트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기에 너무도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들은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고통을 받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안정된 삶에 대한 욕구 때문에 그녀는 끝내 다수의 군중을 대상으로 한 지하철 테러를 수행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서둘러 도망치다 런던 지하철 테러 혐의로 영국 정보부에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어린 아들을 볼모로 자신을 집요하게 협박하는 정보부에 항복한 그녀는 결국 조직을 배신하고, IRA의 내부 정보를 넘겨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콜레트는 그녀를 오랫동안 감시하던 정보부 요원 맥(클라이브 오언)과 석연치 않은 약속을 한다.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그 뻔한 거짓말을 그녀는 철썩 같이 믿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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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보부의 스파이가 되어 동지들을 죽음에 몰아넣는 그녀의 상황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창백한 얼굴로 모든 게 설명된다. 굳이 입 밖에 내어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입에 손을 댄 체 방안을 서성거리는 그녀의 초조한 얼굴은 어머니와 누나 또한, 스파이이자 테러리스트인 정체성의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료들은 죽어가고, 가족들은 내부적 갈등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다.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그녀는 강요된 선택에 목을 맨다. 중요한 것은 아일랜드의 독립도 역사적 사실이 주는 무게감이 아니다. 이 딜레마에서 그녀가 손에 쥔 가치는 오로지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뿐이다. 다시 일상의 소중한 행복을 찾겠다는 열망이다. 테러나 폭력 자체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은 그리 깊이 다루지 않으면서도, 가족이라는 강력한 고리와 모성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에 매료된 영화의 후반부는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짚어가는 과정이다.


클라이브 오웬


당시 영국 정보부의 폐쇄적 업무형태를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즐거움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통해 잠시 엿본 적 있었지만, 이 영화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무실의 공기를 묘사한다. 줄담배와 동료 기자 간의 소재 전쟁, 상관의 힐난과 직업윤리에 대한 깊은 회의까지 사무실은 다양한 가치로 꽉 끼어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사무실의 정치학을 파고들지는 않지만, 모니터 너머로 오가는 기밀의 형태들을 파악하는 클라이브 오웬의 기민한 연기는 충분히 즐길만하다. <클로저>에서 한 여성에 의해 감정의 형태가 무너지고, 이성을 온전히 망가뜨리는 파괴적인 남성으로 열연한 바 있는 클라이브 오웬은 <섀도우 댄서>에서도 역시 유사한 형태의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클라이브 오웬이 연기한 맥은 정보부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지목된 콜레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조직을 배신하는 남자다. 상대를 감시하다가 그녀를 동경하게 되고, 결국엔 사랑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하는 남자의 파국을 클라이브 오웬처럼 강렬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있을까. 그의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토스가 화면에 흘러넘친다. <섀도우 댄서>는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클라이브 오웬을 비롯한 배역진의 훌륭한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큰 작품이다. X파일에서 스컬리로 인기를 끌었던 질리언 앤더슨의 실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1.jpg 섀도우 댄서 Shadow Dancer, 2012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이중간첩, 지하철 테러, 조직 내의 암투와 고문 등을 소재로 한 영화 치고는 느리고 건조하다. 대사가 적고, 반전이라고 등장하는 사실조차도 아무런 극적 효과 없이 고스란히 나열되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회색지대라고 불리던 첩보 전쟁 시대의 비극을 소재로 관객에게 장르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의도가 전혀 없다. 마치 이 소재를 장르적 형태로 소비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듯 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섀도우 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모성이라는 숭고한 정신에 깃든 인물들의 주저함 때문이다. 사람이 대체로 지켜야 하는 윤리적 선 앞에서 연신 고통스럽게 찡그리는 얼굴에서 드라마를 읽는다. 그리고 연신 창백하고 초조한 얼굴로 정보부의 취조를 상대하던 그녀는 집 앞에서 깊은 한 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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